This is not a comedy

Bo Burnham: Inside

미국의 스탠딩 코미디언 보 번햄은 2020년 코로나 시대의 전례 없는 칩거 생활을 맞닥뜨리자 방 안에서 벌이는 1인극 콘텐츠를 기획한다. 〈보 번햄: 못 나가서 만든 쇼〉(Bo Burnham: Inside, 이하 〈인사이드〉)(2021)는 장장 1년을 훌쩍 넘긴 나날 동안 그가 쌓아 온 독백의 기록이다. 연출, 연기, 노래, 촬영, 편집 등 모든 역할을 홀로 도맡았고 비록 장소는 협소하지만 포크, 락, 힙합, 뮤지컬, 인형극 등의 형식을 빌려온 일종의 원맨쇼 콘서트를 다종다양한 구성으로 보여준다. 이때 〈인사이드〉라는 타이틀에는 ‘방의 내부’에서 벌이는 쇼를 가리키는 표면상의 의미가 읽히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서서히 잠식해 가는 그의 ‘내면’에 관한 기록까지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본작은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영화로 공개됐으나, ‘영상’ 혹은 ‘콘텐츠’라고 부를 법한 다양한 해체주의적 실험의 향연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모든 장면이 영화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다가온다. 온갖 주제와 형식을 망라한 이 콘텐츠(보 번햄은 이 영화 기획을 두고 영화 속에서 정확히 ‘콘텐츠’라고 명명한다)의 내부에서 그는 과연 “이 시국에도 코미디가 가능한가”를 노랫말을 통해 자문한다.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우울한 소식들로 둘러싸인 이때 과연 농담이 터부의 영역이냐 아니냐, 라는 물음이다. 그 밖에도 보 번햄은 자본과 노동의 아이러니, 인종차별과 제노사이드, SNS 관심 유발자들을 향한 신랄한 풍자 등의 의제를 노골적으로 끌어오지만, 단지 주제에 대한 언급으로 그칠 뿐 심오한 고찰로 이끌어 나갈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해당 주제들과 무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게다가 그는 노골적으로 백인 남성, 정확하게는 400년간 발언권을 가졌던 미국의 백인 남성 주체로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다. 그는 백인 남성이라는 자리에서 현재의 모든 논쟁적 의제에 관해서라면 침묵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짧은 침묵 뒤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그래도 닥치긴 싫어요”, “그렇다면 방법이 없을까?” 더불어 스치듯이 지나간 한 장면에서 보건대, 그는 선생보다 코미디언이 혹자의 삶을 긍정적으로 전환하는 데 훨씬 높은 기여를 해왔다고 믿는다. 시국에 만연한 절망감에도 불구하고 저버릴 수 없는 스피커(speaker)로서의 열망은 그를 코미디언이자, 시나리오 작가이자, 배우이자, 연출자이자, 유튜버의 정체성을 오가게 했던 지극히 본성적인 무엇을 담지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는 대목이다.

대신 보 번햄은 자신을 백인 남성의 표본으로 규정한 이래, 형식상의 끊임없는 자기 객관화의 콘텐츠를 선보인다. 그러한 내용은 시종 멈추지 않는 노랫말 속에도 표현돼 있지만 기획의 과정과 마무리에 깔끔하지 않게 처리된 미묘한 편집점에서 보다 두드러진다. 가령, 그는 ‘엄마랑 페이스타임(FaceTime With My Mom)’, ‘백인 여자의 인스타그램(White Woman’s Instagram)’, ‘섹스팅(Sexting)’ 등의 노래를 통해 의도된 가벼운 농담의 무대를 선보인다. 여기엔 비대면 소통이 이루어지는 온라인상의 세태에 관한 풍자와 조롱이 담겨 있지만 이상하게도 이 농담이 속 시원하거나 우스꽝스럽기만 하지는 않다. 그것은 아마도 한 편의 무대가 시작하고 마무리되는 순간 사이에 ‘잉여’라고 느낄 법한 지속이나, 음악이 완료되지 않은 지점에서 ‘탈락’된 장면들로부터 발생하는 효과 때문일 것이다. 무대가 끝난 이후의 정적, 음향 기기의 잡음, 노트북 편집 화면을 응시하며 읊조리는 혼잣말을 덜어내지 않은 채 몇 초간 연장된 화면의 지속과 갑작스런 이탈이 난무하게 되자, 도리어 부각되는 것은 무대 위의 존재가 아닌 보 번햄이라는 무대 밖의 개인성에 가까워진다. 그 여백으로 하여금 이 방의 텅 빈 공간, 그리고 청자 없는 독백의 상태가 선연해진다. 무대 위의 퍼포머가 곧장 한 명의 평범한 인간 주체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 경험은 마치 우상을 구경하러 간 콘서트장에서 돌발 사고로 공연이 멈추게 되었을 때 느껴지는 갑작스런 현실의 대면과도 흡사한 구간을 형성한다. 게다가 본격적인 레퍼토리를 전달하는 무대 위의 보 번햄보다도 오히려 이 순간들이 〈인사이드〉라는 콘텐츠의 성격을 규정하는 듯 보인다.

특히 ‘무급 인턴(Unpaid Intern)’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자아도취한 자신의 비디오를 보며 리액션 영상을 찍는 대목은 그의 콘텐츠를 관통하고 있는 작동법인 ‘객관화’가 정점에 달하는 순간이다. ‘리액션(re-action) 영상’은 현재 유튜브 플랫폼에 유통되고 있는 대표적인 스테레오 타입의 콘텐츠다. 리액션 영상을 클릭하는 주체의 기저에는 리액션을 유발하는 원본에 대한 자의식 또는 인정욕구의 심리가 다분히 존재한다. 리액션 영상을 촬영하는 주체 역시 그들의 욕망을 실현해줌으로써 스스로가 주목받을 만한 대상으로 거듭나며, 혹은 유효한 논평을 생산할 수 있는 스피커로서의 자족감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한 메커니즘을 모를 리 없는 보 번햄은 ‘무급 인턴’을 노래하는 자신의 영상을 셀프 논평하고, 논평의 논평, 논평의 논평의 논평을 이어나가며 이른바 메타 비디오 논평을 실현해 보인다. 논평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형식상의 시도는 그 자체로 영상 생태계에 익숙한 관객에게 즉각적인 코미디로서 기능하기도 하거니와, ‘자아도취’와 ‘자기혐오’라는 기저를 동반한 객관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흥미로운 것은, 수십 가지 레퍼토리의 배리에이션으로 보 번햄이 시도한 자기 객관화의 코미디 쇼가 중후반부로 향할수록 서서히 다른 양상으로 전환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간략히 말해보면 온갖 상상력과 표현 욕구의 끼로 무장한 한 남성의 ‘조증’ 상태로 시작한 쇼가 점차 조증과 울증을 오가는 ‘조울증’의 구간을 만들다가, 막바지에 이를수록 ‘울증’의 상태에 침잠하는 모습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혼자서도 즐거운 쇼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그의 야심이, 장기적으로 갇힌 상태와 소통이 부재한 상태를 견디면서 점차 사멸해가는 과정이 여과 없이 담기게 되었다. 어느 순간 그는 바깥 세계(아웃사이드)를 ‘비(非) 디지털 세계’로 명시하기까지 하는데, 고립된 상황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시청자를 위한 소통을 녹화 중인 그에게 세계는 디지털과 비 디지털로 구분될 뿐이다. 디지털을 기준점으로 삼게 된 이 대목은 문밖의 오프라인 세계에 대한 갈망이라기보다 문의 안쪽에서만 발생하는 온라인 접촉의 시대를 더욱 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오히려 바깥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본격적으로 쇼를 기획한 지 1년이 넘어가자 그는 더 이상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이제 이 레퍼토리의 향연을 단지 콘텐츠로만 부를 수는 없게 되어버린 이유는 바로 이렇게 의도치 않은 전환의 구간에서 오는 기이한 공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기도 하고, 말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해 버리기도 하며, 급기야 무대를 이탈하기도 한다. 아마도 그가 말하는 비 디지털 세계는 코로나 시대의 코미디언이 꿈꾼 자유로운 무대, 혹은 관중의 반응으로 하여금 자기 존재를 자각할 수 있는 이상적 공간이었을 테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고립된 자신과의 대화에서 길을 잃어 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웃음을 잃어 갈수록 공연은 어떤 경지의 상태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그의 속내를 파악하기 힘든 아득한 심연이 감지된다. 푸른색 조명 아래 ‘모두 나를 봐요(All Eyes On Me)’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피치를 변조해 완전히 달라진 낮디낮은 음색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가사대로라면 모두의 시선을 받아야 할 무대지만 가상의 관중이 토해내는 임의적인 환호의 사운드와 갈 곳 없는 그의 시선만이 빈 무대를 어지럽게 채운다. 그는 이 레퍼토리에서 과거 경험했던 무대 위에서의 공황발작을 고백하고 청자의 불안을 위로하는 듯하다가 자신을 신격화하는 퍼포먼스도 보여준다. 돌연 카메라를 들어 자신의 모습을 어지럽게 담기 시작하던 그의 노래는 울먹임과 포효를 오가다가 짜증스러운 외침으로 급작스럽게 일단락된다. 러닝타임을 10분쯤 남겨둔 이 대목의 정념은 〈인사이드〉의 초반부, 호기롭게 쇼를 변주해 가던 재기발랄한 코미디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라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귀결에는 필연적인 질문이 따라온다. 영화는 그가 겪는 고통의 원인을 ‘고립’과 ‘공포’라는 두 가지 기제 사이에서 분명히 설명하지 않고 있다. 우선 영화 〈인사이드〉가 표방했던 1년여의 기간 동안 완벽히 홀로 고립된 채 영화를 찍기로 한 기조 자체가 픽션인지 실제인지부터 분명치 않고, 과거 그가 무대에서 경험한 공황발작의 트라우마가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극복되지 않는 듯한 광경 그 자체마저도 영화라는 틀 안에 담기기로 ‘이미 결정’되었던 것인지, 과정 속에서 의도치 않은 결말을 ‘맞닥뜨린’ 것인지도 모호하다. 그것은 아마도 〈인사이드〉가 픽션과 다큐멘터리, 무대와 비무대를 수시로 오가는 과정에서 겹쳐진 혼란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쇼의 기획자이자 희(비)극 속의 주인공이기도 하니, 관객 또한 혼란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러한 혼란을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간에, 결과적으로 단순한 쇼 혹은 패러디로 치부되었을지도 모를 그의 콘텐츠가 엄연히 다양한 각도를 겨냥해 음미할만한 복합적인 영화로 탄생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싶다. 앞서 언급한 유튜버 콘셉트 리액션 영상과 별개로, 〈인사이드〉에는 그가 자신의 영상을 직접 마주하는 두 개의 리액션 쇼트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쇼의 중반부, 그가 어린 시절에 촬영한 셀프 비디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이다. 영상 속의 소년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고 보 번햄의 현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상황 자체의 발랄함과는 별개로 영상 속의 사운드는 묵음 처리돼 있고, 이를 응시하는 보 번햄의 눈빛에는 경멸과 불안 사이의 무엇이 담겨 있다.

이와 같은 자기 응시의 모습은 정확히 마지막 장면에서 반복된다. ‘굿바이(Goodbye)’를 부르고 난 뒤 소기의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그가 문틈의 빛을 따라 방 밖으로 걸어 나간다. 이때 우리를 당황케 하는 것은 그를 잠식하는 늪과 같았던 방 안을 탈출하게 된 그에게 문밖의 빛이 구원은커녕 더 끔찍한 절망을 안겨 주는 듯한 인상이다. 마침내 문밖으로 나온 보 번햄을 향해 객석의 박수가 쏟아지고, 이 장대한 쇼가 관객을 위한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객석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다시 자신을 지켜줄 방안을 갈망하며 황급히 문고리를 붙잡는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그는 곧장 공황발작의 상태가 되고, 객석은 그런 그의 몸부림을 희극 마임으로 받아들여 폭소를 터뜨린다. 하지만 이후 카메라가 천천히 물러나면서 이 현재의 사건은 다시 기록된 영상으로 밝혀진다. 그 바깥에는 일련의 ‘문밖을 나가는 보 번햄’의 코미디를 정조준하는 보 번햄의 시선이 보인다. 객석은 떠들썩하게 그의 코미디를 상찬하지만 보 번햄의 얼굴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다. 종전의 어린 시절 영상을 볼 때 처음 목격했던 경멸과 불안의 얼굴이 재차 반복된다.

독백을 통해 짧게나마 언급해 둔 대로, 그는 공연 중 공황발작을 경험한 이후 트라우마로 5년간 무대에 서지 못했다. 그 맥락으로 미루어 보건대 방안에서 벌인 이 기나긴 무대의 실험은 팬데믹이라는 외부의 상황이 빚어 낸 것이기도 하지만, 다시금 오프라인 무대에 서기 위한 코미디언 보 번햄의 내면으로부터 출발한 치유의 시도에 더욱 가깝다. 그러나 그가 목표 삼은 치유의 순간은 발생하지 않았다. 보 번햄의 코미디는 어떤 식으로건 자기 객관화의 방법론을 관통하고 있으며, 그러한 객관화의 변증법적인 결론 하에 카메라는 그가 스스로 무너져 가는 과정을 담게 된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레퍼토리의 반복은 세상을 향한 치유(표면적으로 의도한 것)나 자신을 향한 치유(그가 실제로 의도한 것)가 되지 못했고, 되레 자신과의 독대를 반복하다 커져간 당혹감이 영화를 압도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는 〈인사이드〉가 보 번햄의 내면으로 향하기로 한 이상 끝없는 자기 객관화로 삼을 수 있는 필연적인 결말이며, 앞선 질문(실제와 허구의 경계 문제)에 대해 정답을 내지 않은 채로도 얼마간 유효한 결론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사이드〉는 웃음의 얼굴로 시작해 좌절한 얼굴로 막을 내린다. “무관심은 비극, 지루함은 범죄인 세상(“apathy is a tragedy, and boredom is a crime.” 극중 노래 ‘Welcome to the Internet’의 가사 일부.)”에서 그가 선택한 모종의 결론은 문의 안팎 어디에서도 안심할 수 없는 혐오와 불안의 얼굴이다. 이 지독한 농담의 끝에서 다시 그의 첫 번째 질문을 상기해보자. 이 시국에도 코미디는 가능할까. 〈인사이드〉는 코미디가 될 수 있을까. 보 번햄은 쇼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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