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에반게리온 극장판>(2021)의 결말을 생각해보았다. 중학생 때 에반게리온을 처음 접한 뒤 이 이야기의 결말을 계속 상상했고, 몇 개의 결말(TV판 결말, 1997년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결말, 만화책의 결말)을 실제로 보기도 했지만, 이런 식의 결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야 말로 에반게리온은 정말 끝났다고 선언하는 것 같은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을 본 뒤 복잡한 생각과 감정이 찾아왔고 이를 좀 더 고민해보고 싶어졌다.
한 편의 픽션 영화는 필연적으로 어떤 세계를 만든다는 전제에서 시작해보자. 이 세계는 물론 진짜가 아닌 가상의 허구이다. 그렇다면 관객은 어떻게 이런 허구를 보며 감동을 느끼는 걸까? 다시 말해 우리는 왜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의 신지가 본인의 의지로 에바에 타겠다고 말할 때나, 미사토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에 나설 때 마음이 움직이는 걸까? 냉정하게 말하면 이들은 그저 픽션 속 가상의 인물이며, 심지어 실제 배우가 연기한 인물도 아닌 애니메이션 캐릭터일 뿐인데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정신분석학이나 매체 이론 등 어려운 이론을 참고해 다양한 가설을 세울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창작자가 자신이 만든 세계 안에 녹여내는 어떤 태도에 관객이 (무)의식적으로 감응하는 것이라고 간단히 가정해보자. 이 가정에 따르면 신지와 미사토의 모습에 내가 감동한 이유는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다시 한 번 용기를 내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담고자 한 창작자의 선택과 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총감독이자 핵심 창작자인 안노 히데아키는 20년 넘게 에반게리온을 만들면서 때로는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다는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모호한 행동으로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회피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고, 그냥 모든 걸 망가뜨리고 싶다는 자기파괴적 충동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어떤 태도를 보여주든 이는 창작자의 고유한 권리이자 자유이므로 일단 존중해야겠지만, 결과적으로 안노가 에반게리온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에서 현실에 발붙인 채 미래를 향해 계속 걸어가겠다는 의지를 다짐한 것이 개인적으로 조금은 의외였고, 그래서 예상보다 큰 감동을 받았다.
나아가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에서는 안노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마지막까지 성실하게 책임지겠다는 존중할만한 태도도 느껴졌다. 앞으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에반게리온 시리즈는 안 좋은 의미의 ‘떡밥’이 많은 작품이었다. 감독은 작품 내에서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모호한 설정과 비관습적 전개를 계속해서 선보였고, 이는 작품의 개성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때로는 자신이 만든 세계와 인물을 소중히 다루지 않고 그저 유희의 대상으로 다루는 것 같다는 인상을 줄 때도 있었다. 물론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에도 이런 유희적 요소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주요 인물들이 한층 성장한 모습으로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는 장면이 최소 하나 씩은 있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안노는 에반게리온의 세계 속에서 20년 넘게 살아온 인물들이 그동안 어떤 변화를 겪고 어떻게 변했는지 진지한 태도로 설명해주었다. 그중에는 죽음을 맞이한 인물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 괴로워하며 살아갈 인물도 있겠지만, 관객인 우리가 그들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준 점에 대해서는 작은 고마움의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결국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이 만족스러웠던 건 감독이 에반게리온이라는 (허구의)세계관에 자신의 진심을 담아 관객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 애니메이션에서든 실사영화에서든,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예고도 없이 불쑥 등장한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매우 복잡한 감상을 내게 안겨주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감독은 에반게리온을 매듭짓는 과정에서 에반게리온의 세계가 그저 가상의 픽션일 뿐임을, 심지어 현실을 재료로 만든 게 아니라 애니메이션이라는 2차원의 이미지일 뿐임을 폭로하듯 말한다. 결국 뭉클한 감동과 함께 결말을 지켜보던 나는 엔딩크레딧이 올라오는 동안 꽤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껴야 했다. 방금 나는 자신이 만든 세계를 마지막까지 책임진 안노의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지만, 동시에 안노가 자신이 만든 세계를 스스로 부정했다는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도 하나로 정리하기 어려운 이 감정을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려 한다.
1995년 TV에서 첫 방영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세계의 종말을 막기 위한 에반게리온과 사도의 대결로 시작해, 2020년에 발표한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에서 신지와 신지의 아버지가 인류의 존재 방식을 두고 벌이는 싸움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20년 넘게 에반게리온을 총감독한 안노 히데아키는 에반게리온만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만들어냈다. 그는 퍼스트-세컨드-서드-니어서드-포스-에디셔널 임팩트, AT 필드, 인류보완계획, LCL 용액, 롱기누스의 창, 가이우스의 창, 검은 달, 릴리스, 아담, 신 죽이기, 골고다 오브젝트, DSS 초커 등 별도의 자료를 참고해도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용어들의 연쇄와 함께 독특한 세계관을 만들어냈고, 그 결과 다른 어떤 작품과도 차별화되는 ‘에반게리온 월드’를 구축했다. 명확한 설명 없이 매번 새로운 개념을 등장시키는 불친절한 세계관 구축 방식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고, 2007년 공개된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에반게리온: 서>) 이후의 과격한 전개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에반게리온이 특유의 세계관을 통해 고유한 개성을 창조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나를 포함한 많은 관객들이 매력을 느끼고 긴 시간 동안 몰입해 온 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에반게리온의 끝을 알린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의 결말 시퀀스와 에필로그는 지금까지 만들어 온 고유한 세계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여준다. 물론 안노 히데아키는 이전부터 계속 ‘이상한’ 시도를 했다고, 그러니 이 작품이 딱히 예외적인 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는 주요 등장인물들이 차례로 망가지는 처절한 전개 끝에 이 모든 이야기가 꿈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허무한 결말을 제시한 적도 있고,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가 단지 TV에 매주 방영 중인 연속극임을 상기시키는 예고편을 만든 적도 있다. 하지만 전자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의 결말을 통해 새롭게 대체되었고, 후자는 ‘예고편’이란 별도의 예외적인 영역에서 시도한 안노의 악취미적 농담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되묻는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은 그리 단순하지 않은 문제를 안겨주었다.
이때 중요하게 언급하고 싶은 순간은 세 가지로서, 하나는 이카리 신지와 신지의 아버지인 이카리 겐도가 ‘마이너스 우주’에서 벌이는 최후의 싸움이다. 인류 전체를 하나로 합치려는 겐도와 이를 막으려는 신지의 전투는 에반게리온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대결이자 테마 중 하나였다. 드디어 아버지와 정면으로 맞설 마음이 생긴 신지가 싸움을 시작하자 나는 이미 벅찬 마음으로 싸움의 결말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노 히데아키는 여기서 이상한 연출을 시도한다. 신지와 겐도가 싸우는 공간을 마치 인공적인 연극 무대처럼 그린 것이다. 신지가 탄 초호기와 겐도가 탄 13호기가 도시에서 싸울 때 건물들은 부서지는 게 아니라 마치 특촬물의 디오라마처럼 가볍게 ‘튕겨나간다’. 그 자체로도 비현실적인 묘사일뿐더러 에반게리온의 주된 연출 양식과 비교해도 이질적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안노 히데아키가 그동안 좋아한다고 수차례 밝힌 특촬물 장르의 시각적 전통을 차용한 것으로 이해하려 했다. 그런데 초호기가 밀려나 ‘벽’에 부딪히자 그 벽이 거대 세트장을 둘러싼 하늘색 휘장으로 밝혀진다거나, 미사토의 거실벽이 부서지자 이 장소가 조명 기계로 가득한 작은 연극 무대임이 밝혀지는 장면이 잇달아 등장하자 생각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덧붙여 신지와 레이가 ‘에반게리온 세트장’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는 카메라와 촬영 장비들이 소품으로 등장하며, 심지어 그 벽에는 에반게리온 모형들이 벽에 세워져 있기도 하다. 마치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이 단지 하나의 연극이나 공연이었을 뿐이라는 듯 말이다. 물론 이는 95년의 TV 방영 당시 마지막 화에도 등장했던 연출이지만 이번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은 그 묘사가 더욱 구체적이며, 무엇보다 신지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상상이라는 설정도 없다. 아무리 여기가 ‘마이너스 우주’의 세계이더라도 이러한 장면은 그동안 착실하게 구축한 에반게리온 월드의 디제시스 질서에 구멍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에반게리온 월드의 질서, 혹은 긴 시간 공들여 만든 픽션의 규칙을 스스로 부인하는 시도는 계속 이어진다. 두 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장면은 신지와 레이가 대화를 나누는 신에서 후경에 펼쳐지는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옛 이미지들이다. 처음에는 팬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90년대의 작화와 함께 신지와 레이의 기억을 묘사하는 적절한 연출이라 생각했지만, 영화가 단순히 인물들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타이틀 장면까지 삽입하자 다시 한 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첫 TV 방영 당시 사용된 제목 이미지, <신세기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파>(2009), <신세기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Q>(2012)등의 타이틀이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연출은 에반게리온의 세계 내부를 보여주는 시도가 아니라, 명백히 에반게리온의 세계 바깥에서 에반게리온을 바라보는 시도로 읽힌다. 즉 지금까지 어떤 특이하고 초현실적인 연출이 등장하든, 이를테면 지구보다 큰 거대 3D 레이가 등장하거나 교복을 입은 신지가 친구들과 함께 우주 위에 떠있어도, 이는 어디까지나 에반게리온이라는 세계의 질서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과거 회상 장면에서 연필로 거칠게 그린 스케치가 등장해도 에반게리온의 세계 자체를 벗어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세계가 단지 가상의 창작물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내는 지표인 타이틀 이미지를 삽입한 연출은 관객을 에반게리온 월드에서 강제로 떼어놓으려는 과격한 시도로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이상하게 느낀 장면은 모든 사건이 마무리된 후 신지와 마리가 거리를 걷는 엔딩신이다. 왜 신지가 갑자기 전철역에서 양복 차림을 하고 있는지, 왜 갑자기 DSS 초커가 풀리는지는 알 수 없다(또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다만 내 눈길을 끈 건 실제 현실의 이미지였다. 신지와 마리가 등장하는 순간까지만 해도 스크린 속 이미지는 모두 익숙한 애니메이션이었지만, 카메라가 두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며 서서히 하늘로 올라가고, 도시의 풍경을 부감으로 보여주기 시작하자 애니메이션 풍경은 실사 풍경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애니메이션 속에서 펼쳐진 에반게리온의 세계가 일본 우베시(이곳은 안노 히데아키의 고향이라고 한다)의 실제 이미지로 끝난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세계 속에서 관객과 만났던 에반게리온이 그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현실의 논픽션 이미지를 제시하는 건 그동안 에반게리온을 받치고 있던 지지대 자체를 흔드는 행위처럼 보인다. 방점은 ‘마무리’에 있다. 만약 이런 연출이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의 마지막 장면이 아닌 곳에서 등장했다면 이렇게까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1997년의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도 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의 모습 등 실사 이미지를 꽤 길게 보여주었지만, 이 연출은 꿈과 현실의 관계를 논하는 나레이션과 잘 맞아떨어졌기에 그리 이질적이지 않았으며, 감독은 곧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다시 돌아와 그 속에서 영화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20년 넘게 이어진 시리즈의 끝이라는 중요한 이벤트가 애니메이션의 문법을 벗어난 영역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애니메이션의 세계 속에서 살아온 에반게리온의 인물들이 작품 안에서, 작품에 의해 부정당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의 마지막을, 나아가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끝을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결론을 완전히 내리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 이 작품에 관한 나의 전체적인 감상은 여전히 긍정적인 쪽에 더 가까우며, 한편으로는 긍정과 부정에 관한 냉정한 대차대조표를 당장 작성하기 보다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한 물음과 고민들을 정리하는 게 보다 생산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에반게리온이라는 세계에 균열을 내는 연출들을 긍정적인 관점에서도 읽어보고 싶다. 특히 세 번째로 언급한 실사 이미지의 사용과 관련해서는 안노가 에반게리온의 세계를 애니메이션이라는 주어진 영역을 넘어 다른 현실 세계로까지 확장시키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에반게리온은 단지 하나의 영역 안에서만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닌 어떤 식으로든 또다른 세계와 접점을 만들며 마무리된다. 즉 전 인류를 하나의 물질 안에 통합시키겠다는 에반게리온 월드만의 고유한 사건과 이를 둘러싼 인물들의 고민이 에반게리온 월드 바깥에 있는 우리의 세계와 맞닿으며 끝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폐쇄’라는 키워드가 아닌 ‘연결’, ‘확장’이라는 키워드를 끄집어낸다면 너무 과도한 해석일까? 또한 두 번째로 언급한 연출과 관련해서도 매체에 관한 자기 반영적 개입을 통해 작품 외부를 직접 지시함으로써 창작물과 현실이 맺는 관계를 상기시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때 감독은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현실과 분리된 허구의 어떤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수행하는 행위자로 위치시킨다. 이로써 아야나미 레이가 신지 앞에서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발언을 할때 그녀는 단지 가상의 캐릭터가 아니라 지난 20년간 대중문화 담론 안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아이콘의 아우라를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레이는 허구의 캐릭터인 동시에 누구보다 현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인 셈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무대를 전경화하는 첫 번째 연출 역시 관객이 작품에 더 깊이 몰입하도록 유도하는 게 아니라 픽션이라는 연약한 구조 자체를 직시하게 이끄는 연출로 이해한다면 마냥 부정적으로만 평가하기가 힘들어진다.
즉 안노는 작품 내 디제시스 질서를 깨는 위험을 스스로 감수한 채 에반게리온의 세계를 어떻게든 현실과 직접 만나게 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자타공인 오타쿠이기도 한) 감독이 자신이 그동안 만든 작품을 완결짓는 단계에서 그 결말을 현실의 층위에 갖다 놓으려 시도하는 태도는 그 자체로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애니메이션 작품이 에반게리온의 길을 걸을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곤란하겠지만, 적어도 안노 히데아키는 이상할 정도로 애니메이션과 현실의 관계를 강하게 의식하는 감독인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건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작품 외부, 즉 현실의 기호 없이는 끝낼 수 없다고 생각한 안노의 판단이다. 그는 자신이 만든 픽션의 질서만으로는 무언가 불완전하다고 느낀 것일까? 그래서 에반게리온이 단지 애니메이션일 뿐이며 결국 현실이 아니라는 걸 반복해서 폭로하는 연출이 감독이 끝내 해결하지 못한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의 세계가 현실이 아니란 걸 굳이 과장해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무리 없이 현실 세계를 지시하는 데 성공한 다른 감독들과 안노 히데아키를 비교해보자. 이 관점에서 그는 여전히 픽션의 가능성을 믿지 못해 픽션 외부의 영역을 의식하는 불안한 창작자처럼 보인다.
그런 맥락에서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짧게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 하고 싶다. 엔딩크레딧이 올라오기 바로 직전 도시의 풍경이 나올 때, 화면 아래를 자세히 보면 신지와 마리가 여전히 애니메이션의 형상을 한채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 장면에서는 논픽션 이미지와 애니메이션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작게, 너무나 잠시 등장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이 순간을 중심에 놓고 에반게리온의 결말을 기억하고 싶다. 비록 감독은 이 모든 이야기가 애니메이션 속 가상의 이야기임을 (굳이) 말하며 작별을 고했지만, 에반게리온 월드의 신지와 마리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