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된 역사, 덧씌워진 얼굴들

Fear Street

0.

‘장난으로 시작해서 살인으로 끝난 이야기’ 서점의 손님이 의붓딸에게 줄 ‘쓰레기 졸작’ 책의 제목으로 제시되는 이 문장은 〈피어 스트리트Fear Street〉 시리즈(이하 〈피어 시리즈〉)(2021)의 세계를 단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시리즈는 첫 오프닝 시퀀스부터 자신이 B급 영화임을 전혀 숨기지 않는데,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서점 직원 헤더(마야 호크)가 저주에 걸린 라이언(데이비드 톰슨)에게 곧바로 희생양이 된다는 점이나 그 과정에서 라이언의 칼을 〈피어 시리즈〉의 원작 소설책으로 방어하는 등, 〈피어 시리즈〉는 농담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일까. 호러 영화의 외피를 두른 채 사실상 하이틴 영화 장르처럼 연출하고 있는 시리즈는 영락없는 B급 영화의 그것이다. 그러나 〈피어 시리즈〉를 단순히 B급 영화의 전형으로만 두기에는 어쩐지 찝찝하다. 이 장난 같은 상황에서도 미묘하게 제대로 기능하는 호러의 세계 때문이다. 시리즈는 호러를 외피 취급하면서도 호러의 기능을 아예 배제하지 않음으로써 두 세계가 서로를 참조하고 보완하게 만든다. 다시 앞의 문장을 불러오도록 하자. 시리즈는 분명 장난으로 시작해서 살인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지금부터 나는 이 혼종성에 대하여 말할 것이다. 〈피어 시리즈〉는 그 공개 방식부터 혼종적이다. 〈피어 시리즈〉를 연작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간의 차이를 두고 발표될 수밖에 없는(시리즈 간의 시간차가 있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아이러니하다) 보통의 연작 영화와는 달리 〈피어 시리즈〉는 동시에 촬영되었으며, 마찬가지로 동시에 공개되었다. 이는 드라마의 발표 방식과 유사하며, 〈피어 스트리트 파트 1: 1994〉(이하 〈피어 1〉)에서는 다음 영화의 예고편을, 〈피어 스트리트 파트 2: 1978〉(이하 〈피어 2〉)에서는 앞 파트의 내용을 다시 넣어 설명한다는 점에서 분명 드라마의 순차적/병렬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피어 시리즈〉를 드라마로 보아야 하는 걸까. 그렇다고 말하기에도 이상하다. 〈피어 시리즈〉는 에피소드마다 각자의 완결성을 갖추고 있으며, 주인공이 달라지는 드라마다. 물론 잘못된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 〈피어 1〉부터 달려오는 인물들이 있지만 우리가 몰입하는 주인공들은 각 파트별로 과거의 시공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리고 결코 영향을 끼칠 수 없도록 현대로부터 과거 순으로 배열된 설정 역시 드라마의 연결성과는 다른 지점이다. 마치 프리퀄이 계속되는 드라마라고나 할까. 느슨하기 짝이 없는 고리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는 강도의 연결점. 〈피어 시리즈〉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드라마와 영화의 중간에 걸친 무한한 상태를 의도하고 있으며 영화 안팎으로 자신을 은유한다. 〈피어 시리즈〉는 대중에게 공개되는 방식부터 자신이 OTT 시대에서나 가능할 수 있음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드라마의 감각도, 영화의 감각도 아닌 혼종적 감각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원래 〈피어 시리즈〉는 20세기 스튜디오가 한 달의 간격을 두고 연속 개봉을 하는 연작 영화로 기획되었다는 점이다. 코로나로 개봉이 미뤄지다 결국 넷플릭스 독점작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던 것인데, 이렇듯 〈피어 시리즈〉가 자아내는 혼종성은 코로나 시대가 만들어낸 우연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의도치 않게 경유한 OTT 플랫폼이야말로 ‘연결되어 있지만 어긋난 상태’, 즉 시리즈가 품은 혼종적 상태를 극대화하기 좋은 포맷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OTT의 감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아직 섣부르다고 한다면, 〈피어 시리즈〉에서 이러한 감각을 구축하고 유지하는 것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시리즈의 중핵처럼 기능하고 있는 ‘상상된 역사와 덧씌워진 얼굴’들 말이다.

1.

시리즈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상상된 역사는 〈피어 시리즈〉의 세계를 구축하는 토대이지만, 시리즈의 내외부를 수식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셰이디사이드Shadyside(‘음지’라는 뜻)와 써니베일Sunnyvale(‘양지’라는 뜻)로 양분된 세계는 다분히 과잉되어있는 세계인데, 완벽히 나눠진 계급 사회처럼 두 마을은 저주와 축복의 대명사처럼 통용된다. 당연히 〈피어 시리즈〉에 나오는 장소와 역사는 가공의 무대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 곳의 저주 역시 가공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상상된 시공을 배경에 두고 뛰어다니는 인물들의 목적 또한 잘못 상정되어 내려온 저주라는 사실은 〈피어 시리즈〉의 세계가 근원부터 잘못되어 있음을 폭로한다. 분명 그들은 이 세계에 발붙이고 살아가고 있지만 모든 것이 어긋난 세계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뿐만인가. 〈피어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선형적 세계를 살아가고 있지만 시리즈는 역선형적 서사로 진행되고, 주인공을 착각하게 만들며(〈피어 2〉), 단절되어있는 뒤 파트의 이야기는 앞 파트의 인물들을 끊임없이 수식한다. ‘연결되어 있지만 어긋나버린’ 상태를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피어 시리즈〉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은 상상으로 기입된 역사가 시리즈의 모든 스토리를 관장하는 핵심적인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역사는 제목에서부터 주인공처럼 새겨지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선제적 인상을 남긴다. 우리는 시리즈에 돌입하기도 전에 앞으로 나올 시공에 대한 준비태세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관객을 준비하게 만드는 것은 꽤나 위험한 시도다. 그들은 모종의 결말을 예측하고 있으며, 〈피어 시리즈〉의 표면적 장르인 호러를 다분히 의식할 것이다. 성실한 관객이라면 시리즈를 보기 전 당시의 가치관마저 학습해가며 일부 세계를 노출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감독은 이러한 준비태세를 되레 엉뚱한 곳으로 되받아쳐,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허를 찌르게 만든다. 〈피어 스트리트 파트 3: 1666〉(이하 〈피어 3〉)을 제외하곤 시대적 배경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가져와 무장해제 시키고는, 오히려 우리가 이 ‘상상된 역사’ 혹은 이야기의 전사(前史) 그 자체를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테면 〈피어 1〉을 보고 나면 그 다음 파트인 1978년도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인가 같은 호기심 유발에서부터, 시리즈에 등장한 각각의 살인마들에 대한 에피소드에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방식 같은 것들 말이다(단순히 대체역사라고 하기엔 〈피어 시리즈〉가 원전으로 삼는 역사는 없다). 그럼으로써 상상된 역사는 실제 역사가 후세대에 작동하는 방식, 즉 어떤 존재의 과거를 궁금하게 만들고 그에 대한 기록을 찾고 기억하게 만듦으로써 성립하게 되는 방식을 우리의 사고구조에 심는다. 이는 시리즈가 이미 결말이 결정된 과거의 이야기임에도 지속가능할 수 있게끔 힘을 부여한다. 무엇보다 〈피어 시리즈〉는 시대적 배경을 가져오면서도 실제와 혼동될 여지를 막아버린 채로 작동방식만을 따온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역사와 비슷하지만 역사는 아닌 그 무엇. 〈피어 시리즈〉는 확실히 영리한 시리즈임에는 틀림없다.

2.

〈피어 시리즈〉에서 언급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부분이 있다면, 〈피어 3〉에 등장하는 덧씌워진 얼굴들일 테다. 그 어떤 연결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어 1〉과 〈피어 2〉에 나왔던 인물들의 얼굴이 〈피어 3〉의 등장인물의 얼굴로 상정된다. 〈피어 3〉의 인물들이 그들의 선조라는 식의 사후적 설명도 없는데다 저주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마녀 세라 피어(엘리자베스 스코펠)의 얼굴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인공 디나(키아나 마데이라)의 얼굴로 덧씌워지는 순간이 묘사가 되기에 그들의 얼굴은 확실히 덧씌워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피어 3〉까지 따라온 관객들이라면 이 부분에서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영화적 허용이라고 하기에 뻔뻔스러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제시되는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인물의 얼굴이 지속될 때, 우리는 흔히들 이입했던 감정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피어 시리즈〉의 연결은 인물들 간의 감정선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물론 또다른 주인공이자 디나의 애인 사만다(올리비아 스콧 웰치)와 디나의 애정은 파트 내내 유지가 되지만, 이는 당시 저주처럼 여겨졌던 동성애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에 ‘어긋난 저주’의 맥락에서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둘을 제외하면 그 외 다른 인물들의 감정선은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피어 1〉에서 디나의 동생 조쉬(벤자민 플로렌스 주니어)는 잠깐이나마 연애 감정을 가졌던 같은 학교 친구 케이트(줄리아 리왈드)의 죽음을 바로 앞에서 목격하면서도 그다지 감정적 동요가 없으며 다음 파트에서 인물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는 친구를 잃은 다른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 된다. 〈피어 2〉 역시 마찬가지다. 저주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 지기(새디 싱크)와 어린 시절의 닉(테드 서덜랜드)의 로맨스는 〈피어 3〉에서 잠깐의 망설임을 만들 뿐 다른 선택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끝맺고 만다. 〈피어 시리즈〉는 확실히 인물들에게 감정선을 부여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피어 시리즈〉에서 〈피어 3〉이 핵심적인 이유는 디나가 마치 환생의 결과물처럼 여겨진다는 점에 있다. 1666년도의 세라는 1994년도의 디나와 마찬가지의 사랑을 하기 때문에 세라의 얼굴은 디나의 얼굴로 덧씌워질 수 있게 된다. 상상된 역사는 덧씌워지는 얼굴들과 결합하여 이러한 연결점을 부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저주처럼 내려오는 동성애와 중세의 마녀사냥이라는, 그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억압의 진짜 역사들을 가리키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건, 이러한 재현이 ‘역사의 반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라와 디나는 같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음으로써 결코 둘은 동일한 인물이 아님을 적시한다. 그건 비단 시대의 진보를 뜻하는 게 아니다. 〈피어 시리즈〉는 대과거와 과거, 그리고 현재에 징검다리를 놓고 서로가 서로의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시도한다. 그리고 감독 및 각본을 맡은 리 재니악은 그것이 연결되지만 어긋난 상태로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는 〈피어 시리즈〉 같은 형태만이 시도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분명한 것은 연결되지만 어긋나버린 이 이상한 세계가 우리의 세계와 역사에 일정 정도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어 시리즈〉가 정말로 OTT로만 가능한 콘텐츠라고 묻는다면 나 역시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피어 시리즈〉가 예정대로 연작 영화의 형태로 개봉을 했다면, 우리가 ‘극장의 경험’이라고 일컫는 그 무엇으로 지금의 감각을 느끼기는 어렵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피어 시리즈〉는 다음 파트를 곧바로 넘어갈 수 있는 ‘모니터의 경험’이 필요한 시리즈다. 극장의 퇴장은 OTT 업체들의 의식적 행위(〈블랙미러 : 밴더스내치〉 같은)가 아니라 OTT의 감각을 무의식으로 체화하기 시작했을 때 가속화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피어 시리즈〉가 그 시작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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