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그간 한국에서 좀비 서사의 시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블록버스터 <부산행>(2016)에 이은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2019)의 등장은 세계 무대에 선 ‘K-좀비’의 본격적인 도래를 알렸다. 동북아 3국 간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던 서구의 이목에 드디어 ‘조선’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좀비 영화의 정신적 시초로 알려진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이후 50여 년이 흐른 뒤였다. 첫 시즌(이하 <킹덤 1>) 공개 이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발표된 두 번째 시즌(이하 <킹덤 2>)을 관람한 관객들은 ‘전편보다 더 재미있는 시즌 2’의 등장을 반기는 모양이었다. 호평을 보낸 관객들의 인상을 들여다보자면 대체로 그 이유는 ‘훨씬 빠릿해진 좀비의 움직임’에 장르물로서의 만족도가 상승했다는 데 모였다. 흡사 전례 없는 코로나 19 대국민 백신 접종 현장이 막힘없이 현장이 일사천리라는 대한민국의 국민성을 자찬하는 말들처럼, 한국형 좀비가 특히 한국 관객에게 환영받기 위해서는 도저히 굼뜬 움직임을 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킹덤 1>에서 ‘느린 호흡’과 ‘지루한 전개’, ‘더딘 공포감’을 꼬집는 적지 않은 평을 의식한 듯한 <킹덤 2>의 좀비들은 신체적 능력이 대폭 향상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다루고 있는 에피소드의 양 자체도 크게 늘어 촘촘한 진행을 따라가는 쾌감도 늘었다. 그러자 나는 궁금해졌다. 과연 좀비의 속도는 좀비 장르의 성공과 결부되는가. 그들의 신체적 능력이 고양될수록 작품의 평가는 긍정적이기 쉬운가. 그렇다면 그 속도감이라는 것은 좀비 장르에서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고 있는가.
1.
<킹덤 1>에서 본격적으로 좀비의 공격력이 발현되는 시점은 2화에 등장한다. 동래 의원 지율헌의 툇마루 밑에 몸을 욱여넣었던 좀비들이 밤이 되자 하나둘 잠을 깨기 시작한다. 누워 있던 시체는 관절을 하나둘 꺾으며 하반신부터 차례로 괴기스럽게 몸을 일으키고, 꺾인 관절 움직임에 덧댄 효과음은 즉각 섬찟한 공포감을 유발한다. 일어난 시체가 산 사람의 목을 물어뜯는다는 사실을 목격하자, 구경꾼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친다. 아직까지는 죽은 자의 공격보다 산 자의 움직임이 더 돋보이는 상황이다. 3화로 넘어가면 좀비가 덮쳐오는 사태를 아는 자와 아직은 모르는 자 사이의 간극, 점점 더 세를 불리며 덮쳐오는 좀비 떼의 공격이 서로 맞물리며 긴장감은 조여온다. 이들 중 대다수는 곧 좀비 무리에 편입돼 떼로 달려가는 좀비 군집을 이루게 된다. 그간 좀비 영화의 홍수 속에 한국형 좀비가 환영받는 가장 큰 이유로 좀비의 아크로바틱한 신체 표현이 거론되곤 했다. 이러한 경향은 <부산행>, <킹덤>, <반도>(2020)에 이르기까지 협력한 <킹덤>의 안무감독 ‘전영’이 좀비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디자인해 더욱 산 자의 그것과 거리를 벌려 놓으면서 공포를 극대화한 공에서 찾을 수 있겠다. 그의 인터뷰에 따르면, <킹덤 1>은 잠에서 깨 움직이는 이른바 ‘몽유병적 모티프’를 통해 움직임을 구현했다. 그 결과 좀비의 동적인 움직임과 정적인 움직임이 느슨하게 연결된 형태로 우리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게다가 <킹덤 1>의 경우, 정체 모를 역병의 난세를 알아차린 이들이 감염자의 특성을 파악하고, 대비책을 세우며, 생사초의 비밀에 접근하는 이야기를 우선적으로 필요로 한다. 뿐만 아니라 결말부 6화에서 좀비가 ‘온도’에 반응한다는 새 가설을 세우기 전까지는 오직 좀비의 활동이 두드러질 ‘밤’을 대비해야 하는 존재로서만 생각해왔기 때문에, <킹덤 2>에서 우리를 육박해올 좀비의 공격력은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예측이 서게 된다. 6화의 마지막 장면, 산속에 잠복해 있던 좀비 군집은 날이 밝아왔지만 외려 낮은 온도에 활동성을 얻으며 먹잇감이 가득한 마을로 대거 이동을 시작한다. 이때 먼 거리로부터 달려오는 좀비의 형상은 안개 속의 실루엣과 그림자 정도로 드러나 있고, 허를 찔린 당혹감으로 그 이동을 바라보는 인물들이 침을 꼴깍 삼키는 얼굴이 교차로 편집된다. 해당 장면은 <킹덤 1>을 엄습한 공포의 요약이기도 하거니와 다가올 <킹덤 2>에서의 강화된 비극을 ‘안개’와 ‘거리감’을 통해 예고하는 클리프 행어로서 기능한다. 동지가 지나 찬 기운이 사라지지 않자, 좀비들이 잠을 자는 일시 정지의 사태는 이제 불가하게 되었다. 따라서 <킹덤 2>를 여는 초반부는 대낮에 육박해오는 좀비 떼의 습격과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사투로 조성된다. 좀비가 달려오는 속도는 급속히 빨라졌으며, 어둠에 가려졌던 몰골은 더욱 흉악한 자태로 보여지고 있다. 이로써 흡사 군력과 군력간의 싸움을 방불케 하는 전투가 시작된다. 이미 전날 밤 치른 진수성찬의 식사로 인해 의복과 신체의 곳곳은 피 칠갑이 된 상황이다. 지율헌의 앞마당에서 시작되었던 사태는 반경을 넓혀 세력과 세력 간의 싸움, 전방위에서 조여오고 달려오는 괴수들로부터의 사투로 확장됐다. 아슬아슬하게 좀비 무리와 결계를 치고 많은 수의 좀비의 굶주림이 극심해지자 이들은 먹잇감의 존재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작은 소리와 피 냄새에 반응하는 으르렁거림은 훨씬 야성적인 소리로 그려진다. 2화에서 궁궐 안을 탐색하던 세자 이창(주지훈)은 빠른 속도로 마룻바닥을 쿵쿵대며 달려오는 좀비의 선연한 움직임을 감지한다. 좀비의 얼굴이 곧바로 창호지를 바른 문을 뚫고 들어와 프레임의 정중앙에서 세자(프레임 밖의 관객)를 똑바로 응시한다. 이후 이 좀비의 으르렁대는 소리는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의 것처럼 덩치가 큰 사운드로 들려오며 세자와의 몸싸움에서도 거침없는 일격을 가한다. 여기서 촉발되는 시·청각적 공포는 이제 매 순간 목을 뜯길지도 모르는 위기 속에서 한시라도 방심할 수 없는 사태를 감지하도록 만든다. 좀비 장르의 쾌감이란 바로 코앞에 닥친 위기를 피하는 데 달려 있어서, 좀비 개체의 빠르기와 흉악한 공격성은 곧바로 쾌감에 직결된다. 게다가 이 좀비의 정체는 세자가 그토록 알현하지 못했던 국왕인데, 이와 마찬가지로 극을 이끌던 주요 캐릭터의 좀비화 역시 관람자의 긴장과 속도감을 부추기는 요소가 된다.
2.
좀비는 애초에 재빠르게 움직이는 부류가 아니었다. ‘시체가 일어나 걷는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자체가 이를 지켜보는 인간 관객으로서는 큰 공포였기 때문에,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와 긴장을 조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50년의 세월 동안 좀비 서사는 관객에게 서서히 익숙해졌다. 따라서 무뎌진 공포감에 다시금 불을 붙일, 말하자면 좀비라는 개체의 버전 업(Version-up)이 필요했다. 그에 따라 대니 보일 감독은 <28일 후>(2002)를 통해 최초의 달리는 좀비를 구현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것을 좀비라고 부르기는 애매한데,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이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변이를 일으켜 사람을 물기 시작하므로 ‘죽음’이라는 필수 전제와는 관련이 없다. 어쨌건 이는 좀비 장르에 속도감을 부여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열었고, 이후 좀비 영화의 향방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후 잭 스나이더 감독이 2004년에 발표한 <새벽의 저주>에서 좀비들은 빠른 속도로 달리면서 엄청난 공격성까지 겸비한 공포스러운 존재로 묘사된다. 점프하거나 괴성을 지르는 등 프레임에 전면적으로 튀어나와 카메라를 향해 냅다 달려오는 식이다. 그러다가 좀비물의 최고 흥행작으로 일컬어지는 <월드워Z>(2013)에 이르면 물린 지 단 12초 만에 좀비로 변할 만큼 바이러스는 진화하며, 엄청난 빠르기로 전속력을 다해 달려오는 좀비의 공격성은 물론, 인간이 쌓아둔 높다란 장벽을 넘기 위해 거대한 좀비 기둥을 쌓을 정도로 거침없는 야성적인 집념을 보여준다. 이렇듯 대중영화 속의 좀비는 스크린의 역사 속에서 최대한의 신체 능력을 갖춘 개체로 차츰 진화했다. 좀비의 속도감이 장르의 긴장과 관련이 깊다는 사실은 여타 좀비 영화들이 앞다퉈 좀비의 능력을 발전 시켜 왔다는 것으로 간단히 설명된다. 하지만 역사가 언제나 균질한 발전을 하지 않듯, 속도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는 존재한다. 그래픽과 분장 기술의 진일보에 힘입은 좀비들이 등장한 이후에도, 여전히 ‘느린 좀비’라는 원형의 명맥을 잇는 작품도 있다. 지금에 와서 느린 좀비가 별다른 자극을 줄 수 없을 것이라는 오해와 달리, 달릴 줄 모르는 좀비들의 세상을 그린 <워킹 데드>는 추후 좀비 시리즈의 정전으로 남기에도 손색없다. 시리즈라는 유사점으로 좀 더 적절한 비교가 될지도 모르는 <워킹 데드>에서, 좀비들의 속도는 분명 인간이 걷는 속도 그 이상으로 빨라지지 않는다. 소리가 이끄는 대로, 자신들과 다른 인간의 냄새가 풍기는 곳으로 본능적인 움직임을 하지만, 표적의 대상이 된 인간보다 더 우월한 신체적 지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경우가 아니라면 달리기만으로도 좀비의 반경에서 벗어나기는 쉽다. ‘달리는 좀비’가 출현한 지 한참 지난 2010년에 발표된 <워킹 데드> 시즌 1의 풍경이다. 전 세계의 수많은 좀비 장르 마니아를 양산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워킹 데드>의 저력은, 좀비 대 인간의 구도에서 벗어나 인간 대 인간의 구도로 선회한 방향의 전환에 크게 빚을 진다. 하루아침에 붕괴한 수년 년의 문명, 회복 불가능의 원시 사회로 회귀한 이곳을 더욱 지옥으로 체감하도록 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인간이다. 생존에 대한 위협이 도사린 형국에서 인간성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워킹 데드>는 다양한 에피소드로 증명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재난 서사이자 영웅 서사를 내포한 장르인 좀비물에서, <워킹 데드>는 좀비의 속도가 관건이 아니었다. 가족 드라마, 혹은 윤리 드라마로서 갖춘 설득력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성공 요인이다. 이런 가설은 어떨까. 이제 21세기의 좀비물은 좀비 서사가 결합하고 있는 부차적인 장르의 성공과 더욱 깊게 연관되고 있는 양상이다. 정확히는, 더 이상 그 장르는 부차적이지 않다. 오히려 제2의 서사에 진한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 좀비라는 외피를 가져온 양상이다. 좀비는 이제 거들 뿐이다.
3.
<킹덤> 역시 유사한 맥락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킹덤>의 외피가 좀비라면 껍질 속의 내용물은 ‘정치 스릴러’이면서 ‘미스터리 추적극’에 다름 아니다. 본작이 ‘속도감’에 대한 비난을 제쳐 놓고도 나름대로 성공적인 서사의 연결성을 갖출 수 있었던 까닭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단란하고 평온하게 굴러가는 세계의 안정감을 가장 먼저 보여주며 위기감을 조성하던 재난의 클리셰를 벗어나, <킹덤>은 이미 좀비가 된 왕의 모습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흉포한 위기감을 던져 시리즈의 포문을 열었다. 그에 바짝 따라붙는 주인공 세자 이창의 서사는 병든 아버지를 알현할 수 없게끔 발목을 잡는 해원 조씨 가문의 세력 다툼과 깊게 연관된다. 조정의 핵심 인사인 영의정이자 조씨 가문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는 조학주 대감의 잔악한 횡포는 정치 스릴러의 관점으로 보아도 입지가 큰 정적이며, 재난 드라마로 보아도 최고의 빌런이다. 이에 더해 백성들의 딱한 사정은 정치가 본래 향해 마땅한 쪽을 가리키며 정치극으로서의 면모를 갖춰간다. 이는 좀비 사태의 발현과도 맞물리는 사건을 빚어내면서 짜임새를 획득한다. 특정 세력의 세도정치에 소외된 일반 백성들은 끔찍한 굶주림을 겪고 있다. 이들이 좀비 바이러스를 가진 시체로 고깃국을 끓여 먹는 참담한 비극이 발생하고, 이로써 생존의 최저선에 대한 추구로 선택한 바가 초래한 최하층민의 좀비 떼를 맞닥뜨리면서 <킹덤>은 최초의 재난 상황과 대면하게 된다. 부패한 정치적 상황은 좀비 세상의 참극을 불러온 원흉으로서 정확히 지적되고 있다. 해원 조씨 가문과 세자 사이의 알력 대결을 중심으로, 좀비 바이러스를 일으키는 ‘생사초’의 비밀에 관한 미스터리의 서사가 동시에 진행된다. 여기에서 미스터리를 이끄는 중추적 인물은 동래 지율헌의 의녀 ‘서비(배두나)’다. 흔히 좀비 장르에서 바이러스의 근원은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라는 손쉬운 수식으로 대략 무마되곤 했다. 그러나 <킹덤>은 서비의 활약으로 하여금 이 근원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본격적으로 진행해 보이려는 야심을 펼치기 시작한다. 초반부, 감염된 자들이 밤에 활발한 활동성을 보이는 대신 낮에는 잠을 자듯 조용해진다는 사실에 비추어 그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빛’인 것으로 짐작되었으나, 이 가설은 한 번 고꾸라진다. 환한 대낮이지만 산속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감염자들의 행동을 발견한 서비의 추측은 ‘빛’이 아닌 ‘온도’가 그들을 움직인다는 발견으로 나아간다. 게다가 이승희 의원이 죽은 왕을 되살린 ‘생사초’에 관해서도 추적이 이어진다. 의녀 서비의 탐구적인 태도와 일말의 발견이 난세의 유일한 희망으로 보이며 기대를 걸도록 하지만, <킹덤 2>를 마무리한 이후로도 바이러스의 진실에 관한 속 시원한 해소는 여전히 요원한 상황이다. 이를테면 ‘찬 기운을 좋아하는 생사초의 잎에 촌충이 알을 낳고,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은 바로 이 촌충이다’는 서비의 발견, 그리고 ‘감염된 신체 부위를 물에 담그면 촌충이 빠져나가 좀비 변이를 막을 수 있다’는 전례 없는 치유법의 발견은, 생사초를 갈아 인당혈에 침을 꽂자 되살아난 시체의 경우, 감염된 신체를 가열한 국을 먹고 감염된 자들의 경우와 여전히 대치를 빚고 있는 형국이다. 아직 생사초와 관련한 비밀은 베일에 가려져 있고, <킹덤 2>의 종결 이후로도 이 미스터리는 지속되고 있다. 시즌을 거듭하며 의녀 서비의 역할은 점차 중요해질 것이다.
4.
<킹덤>은 좀비 역병이 창궐한 조선의 재난 서사에 두 가지 부가적인(실은 본체에 해당할) 서사를 밀도 있게 진행 시키며 몰입을 불러왔다. 그렇다면 이제 다른 물음을 던질 차례다. 장르에 있어 ‘속도’를 규정하는 것은 단지 좀비의 신체인가. 그러나 아무리 우리 내면에 폐허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이 잠재한다고 하더라도, 관객이 좀비의 편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좀비와 인간의 대결에서 결국 관객은 인간이 승리하는 결말을 목도하며 끝내 안도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비가 그럴듯한 공격력을 갖추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왜 우리는 실망하게 되는가. 사실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 우리는 좀비물에 구현된 그들의 ‘속도’에 매혹된 것이 아니라, 속도를 지연시키는 ‘무엇’에 매혹된다. 재난의 기본 전제를 따르는 좀비 사태에서 관객의 흥분감을 부추기는 것은 시각적인 극한이라기보다는 육박해오는 공포감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재난의 정교함, 위기의 극대화에 달려 있다. 감정 이입의 대상인 프로타고니스트의 입지가 경각에 달할수록, 그 위기는 성공적인 장치로 군림한다. 이는 다시 말해 속도를 늦추는 전략이자, 프로타고니스트의 영웅적 면모에 거듭된 미끄러짐을 제안하는 방식이다. 이 전략들 사이에서의 밀고 당기기로 인해 쾌감의 수위가 결정된다. 속도의 쾌감이 아니라 위기를 더 극한의 위기로 몰아넣음으로써 유발되는 쾌감이다. <킹덤>의 프로타고니스트 세자 이창은 여러 층위의 ‘배반’을 경험하며 미끄러짐의 연속에 놓인다. 안타고니스트 조학주 대감이 시종 그의 턱 끝을 겨누고 추격해오는 일차 구도의 바깥에서, ‘무영(김상호)’의 존재가 이창의 든든한 오른팔로 활약하며 버디 무비의 미덕을 실현해 갔다. 그러나 시즌 2에 이르러 무영이 조학주 대감의 끄나풀로 이중 첩자 역할을 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세자는 더한 위기에 봉착한다. 그의 주변을 지키던 인물들에게서 더 이상 안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상당한 수준으로 단련된 무공을 자랑하지만 출신이 불분명한 인물 영신(김성규)의 정체에 관한 질문이 우리의 편안함을 방해하고, 세자의 편에 서 있는 듯하지만 좀비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는(뭔가 알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의뭉스러운 안현대감(허준호) 역시 안심할 수 없는 존재로 표현되면서 우리가 세자 일행을 단단한 아군으로 느끼면서 안도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지 않는다. 이 불분명한 주변의 단서들이 얼마간 선명해지는 과정은 모두 <킹덤 2>의 촘촘한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마찬가지로 세자를 잉태한 계비(김혜준)의 존재는 단지 해원 조씨 가문이 세력을 유지할 도구에 불과했으나, <킹덤 2>에 이르자 계비의 서사는 조학주 대감의 계략과는 별개의 길을 개척하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조학주와 세자 일행의 대결로 정신없는 와중, 한양에서 발견된 산모와 신생아들의 사체로 인해 그간 유명무실했던 계비가 중심이 된 새 서사가 가지를 뻗는다. 이는 중전이라는 당시로써는 여성에게 부여된 최고의 지위에 해당할 인물마저 출산의 도구 역할을 넘어설 수 없었던 조선의 뿌리깊은 남아 선호를 고발하는 서사로 작동하거니와, 이 복잡하게 물린 사태는 세자 일행을 혼란의 늪에 빠뜨리는 역할은 물론이고 조학주 대감의 입지마저도 곤란케 할 새로운 서사의 동력으로써 대두된다. 이렇게 겹겹이 설계된 위기가 프로타고니스트 세자 일행의 발목을 끊임없이 붙잡는다. 미끄러짐과 반격, 희미함과 선명함이 앞서거나 뒤서는 서사가 빼곡하게 전시된 <킹덤 2>에서 관객들은 속도의 쾌감과 가까워지는 듯한 착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안현대감과 조학주 대감의 대결에서 우리가 다소 다른 측면의 긴장을 경험하게 된 이유를 되짚어 보고 싶다. 일찍이 <킹덤 1>의 좀비 사태가 발생하기 전부터 생사초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조학주와 안현대감의 긴장 관계로부터 촉발되는 대목이다. 따라서 좀비가 된 안현대감은 이성적 사고가 불가능한, 오직 식욕만이 남은 개체임에도 불구하고 먹잇감으로써 조학주 대감의 얼굴을 정확하게 조준한다. 아마 그는 좀비로 변모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조학주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다소의 서사상 구멍이 될 수도 있는 지점이나, 더 중요한 것은 이때 관객은 조학주 대감에 응징을 가할 안현대감을 응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공격의 주체인 안현대감은 좀비이고, 조학주 대감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이는 더 이상 인간과 괴수의 대결이 아닌, 인간과 인간의 대결이 되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이처럼 <킹덤>에 도사린 긴장감에 있어 좀비의 속도는 의외로 부차적이다. <킹덤 2>에 이르러 많은 장르 관객이 만족감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갈래로 동시 진행되며 정서적인 압박을 가해오는 ‘지연’의 효과에 좀비의 ‘속도감’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좀 더 솔직해져 본다면 우리 관객이 서사에 속도의 문제를 제기하는 양상은 단지 <킹덤> 하나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매 순간 새 작품을 홍보하기에 여념이 없는 OTT 플랫폼에서 거의 모든 시리즈는 이 ‘속도감’에 발목이 잡히고 있다. 장르와 속도는 서로 연관성이 크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독 OTT 플랫폼의 대두 이후 지루함과의 대결이 더욱 팽배해졌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깜깜한 극장의 지정된 좌석에 앉아 스크린의 일방향적 투사에 두 시간의 몰입을 허용하던 극장 관객과 넷플릭스의 관객은 본질적으로 판이한 관람 환경을 갖고 있다. 해를 거듭한 팬데믹 상황은 이 관람환경의 변화를 더욱 빠른 속도로 도모하게 되었고, PC 화면을 통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은 채로 시리즈를 관람하는 우리는 시선을 낚아채 줄 자극을 원하도록 변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시리즈의 창작자는 시청자의 재핑(zapping)을 피할 방편으로 자극의 다양한 형태를 골몰한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21세기에 이르러, 장르는 더 이상 일차원적인 속도감과 과시적인 이미지라는 따분한 방편에 종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영화와 드라마가 시각 매체의 본질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며 개인의 의견을 표출할 창구가 넓어진 이 시대의 관객은 누구나 비평적 태도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점프스케어를 반기는 호러영화의 관객이나, 과격한 괴수의 이미지에 매혹되는 크리처 영화의 관객, 도저히 당해내지 못할 공격력으로 무장한 좀비의 존재에 쾌감을 느끼는 관객은 이제 많지 않다. 쾌감과 재미를 선사하는 장르의 감흥은 보다 은밀하게, 전방위적으로 우리를 육박해오고야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