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좀비zombie. 오로지 식욕만 남은 시체들. 이들의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은 오로지 인간들을 물었을 때다. 당연히 좀비 장르가 발생시키는 공포 역시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감을 선사하며 인물에게 좀비들이 다가올 때, 혹은 다가오기 직전의 그 긴장감에서 나온다. 물론 〈월드워Z〉(2013)나 〈부산행〉(2016)처럼, 대규모의 좀비들이 군집을 이루며 다가오는(이는 앞으로 다룰 〈킹덤〉 시즌2 초반 상주에서도 실현된다) 경관 역시 등장하긴 하나, 공포가 실현될 때는 결국 좀비들이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다. 그리고 대체로 현대의 시공 안에서 벌어지는 좀비물의 특성상 이에 대항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총, 다시 말해 원거리 공격을 염두에 둔다. 그러니 좀비물은 인간과 좀비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느냐 넓어지느냐로 긴장감이 형성되는 장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 측면에서 〈킹덤〉은 칼을 쓰는 시대로 관객을 데리고 가면서 기존의 좀비물과는 다른 종류의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나는 지금부터 이것을 ‘거리의 긴장감’이라고 부를 것이다. 거리의 긴장감은 또한 〈킹덤〉에서 ‘거리’라는 존재를 부각시킴으로써 특유의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대한 나름의 실마리를 풀어보고자 한다.
1.
〈킹덤〉에서 이와 같은 ‘거리의 긴장감’이 가장 돋보이는 장면은 단연 시즌2의 1화라고 할 수 있겠다. 마치 공성전처럼(이 시퀀스는 전쟁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진행되는 상주 시퀀스는 멀리서 달려오는 좀비 군집이 방어진으로 다가옴에 따라 드러나는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갑작스레 등장한 좀비들을 보여주는 망원 샷에서부터 물이나 피가 화면으로 튀는 카메라의 수사까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원거리 무기와 단거리 무기가 가지고 오는 효과의 차이다. 앞의 시퀀스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이 장면에서 시시각각 달라지는 거리에 따라 사용하는 무기(활, 화포)는 강력할지언정, 결코 긴장을 해소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저항하는 좀비물의 클리셰를 답습한다. 그러나 극 중 덕성(진선규)이 잡히려는 찰나에 발동되는 함정의 존재는 긴장의 일시적인 해방을 불러오며 원거리 무기의 무력함과는 상반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물론 함정 역시 좀비 무리를 일소하지 못한 채로 자신의 역할을 마무리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무기의 존재감은 알고 있는 적을 앞에 두고 발사하는 장거리 무기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여기서의 단거리 무기는 오로지 좀비와 근접한 긴장 상태에서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장치인 셈이다. 이처럼 〈킹덤〉에서의 단거리 무기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보통 좀비 장르에서 좀비와의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결국 그 즉시 사망 혹은 감염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러나 〈킹덤〉에서는 단거리에서 살상능력을 갖춘 무기들을 항시 소지하게 만듦으로써, 긴장을 일시적으로 해소하거나 인물들에게 또다른 기회를 부여한다. 이는 전술한 시퀀스와 같이 시리즈 여러 곳에서 반복되지만 특히 탁월한 장면은 시즌1의 4화에 등장한다. (누가 봐도 웨스턴 장르의 변용이 확실한) 수레를 이끌고 안전지대로 들어가야 하는 주인공 일행을 보여주는 시퀀스에서, 영신(김성규)의 총포가 고장나자 위기를 해결하는 것은 김무영(김상호)의 칼이다. 그러나 단거리 무기가 갖는 가장 큰 본질은 면대면으로 생사역, 즉 좀비를 바라본다는 점이다. 〈킹덤〉의 인물들은 좀비를 상대하며 좀비의 얼굴을 본다. ‘응시’는 문제의 본질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게 만든다. 단거리 무기로 인한 긴장의 일시적 해소는 달리 말하면 긴장감의 지연 상태나 다름없다. 결국 문제의 본질이 해결되어야지만 이 긴장감은 비로소 해소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작중의 인물들은 칼을 사용하며 느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킹덤〉은 인물들의 단순 생존보다 이 사태의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대면’은 이창(주지훈)의 서사를 이루는 핵심 요소다. 그는 세자임에도 ‘살기 위해’ 궁궐 밖으로 나가 동래로 직접 향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좀비들이 다가올 때도 결코 피하지 않고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니 해원 조씨 일가가 물러난 이후에도 그는 왕이 되어선 안 된다. 생사역을 대면한 이상, 그리고 민초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그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인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킹덤〉은 그 외에도 거리의 긴장감을 수시로 활용하는데, 재밌는 건 시리즈가 공포심을 조성하기 위해 거리를 활용하기도 하지만,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킬 때도 거리감을 적절히 이용한다는 점이다. 역시 시즌1의 4화로 가보자. 자기 살기 급급한 동래지역 이방(유승목)과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종교처럼 믿고 따르는 노마님(허진)으로 대표되는, 백성들을 책임지지 않는 관료들이나 고루한 가치를 부여잡고 현실 감각을 잊어버린 이들을 풍자하고자 삽입된 것이 분명한 이 시퀀스는 거리의 감각을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분명한 예다. 예정된 파멸을 보여주는 이 씬은 그 자체로만 떼어놓고 보면 꽤나 진부한 클리셰이지만, 그 이전까지의 〈킹덤〉이 활용한 거리나 좀비 장르의 관습에 비추어볼 때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우리는 앞의 씬들을 통해 선체에서 좀비가 튀어나올 것임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카메라는 좀비가 배의 바깥으로 튀어나오자마자 멀찍이 떨어지거나 아예 드론샷으로 아수라장이 되는 배를 바라본다. 여기서의 거리는 결코 〈킹덤〉에서 자주 활용되는 단거리의 공포가 아니라 오히려 거리를 떨어뜨려 좀비에게 물어뜯기는 인물들이 피해자가 아닌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도록 만든다. 더욱 흥미로운건 주인공의 시점이 정반대가 되는 〈킹덤: 아신전〉(이하 <아신전>)에서는 거리의 긴장감 역시 정반대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극 초반 갈대밭에서 민치록(박병은)의 부대와 파저위 전사들의 대치 상황에서 등장하는 장거리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후반부에는 좀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숨어있는 인간들이 아신(전지현)이 쏜 화살에 의해 죽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 들어오는 화살은 인물들에게 그 자체로 공포의 존재다. 이처럼 시즌1, 2에서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획득되었던 안도감은 〈아신전〉에서 반대로 파괴된다. 반면에 시리즈에서 공포나 긴장감을 선사했던 단거리는 이곳에서 복수극을 완성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로써 카타르시스를 수행하게 만든다.
거리를 이용해 코미디를 유발하는 장면도 있다. 시즌1의 3화에서 한 개의 칼(죄수를 구속하기 위해 썼던 목재 도구)을 뒤집어쓴 두 죄수 중 한 명이 좀비로 변하면서 벌어지는 소동극은 일정 부분 거리를 확보할 수만 있다면 위기의 순간마저 웃길 수 있는 곳이 바로 〈킹덤〉의 세계임을 주지시킨다. 그런데 이 장면이 인상적인 건 좀비의 얼굴을 비추는 시점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로 좀비의 얼굴을 정면으로, 그렇게 가까이, 또 그 정도로 오랫동안 쳐다본 적이 있었나?(이뿐만 아니라 〈킹덤〉은 유독 좀비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이 잦다) 좀비 영화의 주인공은 그야말로 좀비임에도 우리는 그들을 대량학살의 쾌감이나, 공포나 혐오, 혹은 이따금씩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클로즈업은, 원래 주인공이었던 인물이 좀비에 감염되어버린 극적인 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추어지지 않는다. 〈웜바디스〉(2013)와 같이 극히 드문 작품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이 역시도 결국 우리가 그들을 직시할 수 있을 때는 혐오나 공포의 감정을 걷어낸 이후라는 걸 넌지시 알려줄 뿐이다. 〈킹덤〉 역시 이 명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앞서 말한 장면 또한 좀비는 코미디의 부산물로 잠깐 등장할 뿐이다. 그럼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그동안 공포나 혐오에 휩싸여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좀비를 직면하고 드라마 속 인물들의 시점으로 ‘좀비’라는 개체를 다시 보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킹덤〉에서의 좀비, 즉 생사역은 복합적인 존재로 기능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조선이라는 나라에 떨어진 좀비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그들 사이의 거리는 좀비라는 역할에 있어 핵심을 차지한다.
2.
앞서 말했듯 거리의 긴장감은 곧 시리즈 내에서 ‘거리’라는 존재를 생각하게끔 만든다. 거리의 속성은 〈킹덤〉의 서사 내외부에서 작용하여 사소한 부분까지도 관여한다. 이를테면 누구도 정확한 방향을 정하지 않았음에도 시리즈의 서사는 왜 동래에서 시작하여 상주-한양으로 이어지는 (〈아신전〉은 북방에서 내려오는 하향 방식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상향 방식으로 장소가 움직이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거리의 긴장감’, 다시 말하면 거리의 문제 때문이다. 그러니까 프라로타고니스트protagonist든 안타고니스트antagonist든 목표를 한양으로 설정해놓고 주인공 일행이나 좀비 군집이 한양으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극이 진행되고 인물의 위기감이나 카타르시스가 달성된다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지역적 위계 구조를 거리라는 존재가 추동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의 거리는 그 자체로 권력으로 기능한다. 다가올 파국은 거리로 인해 지연(결국엔 궁궐도 파국을 맞이하지만)되고, 극의 모든 목적은 한양에서 이루어진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북까지 영토가 있음에도 시리즈의 마지막은 한양에서 마무리되는 것을 생각해보라. 〈아신전〉 역시 프리퀄로써 북방에서 다시 시작될 뿐이다. 권력은 도시와 도시 사이의 물리적 거리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조선을 결정하고 있는, 그야말로 신분 계급의 거리는 어떤가. 모두가 알다시피 조선시대에서는 양반과 평민, 왕과 신하의 거리는 철저히 지켜져야만 했다. 얼굴을 함부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반면 좀비는 거리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혁명적 존재다. 살아있는 시체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계급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유지되었던 거리는 좁혀지며 경멸은 이제 공포로 변하게 된다. 그들은 기어코 왕좌까지 도달한다. 이성이 있는 자들에게는 비합리적 규범이 존재하고, 이성이 없는 자들은 오히려 평등하게 서로를 대하는, 이 역설적 문제 뒤에는 가장 멸시받았던 존재 중 하나인 아신이 자리잡고 있다. 그녀는 세계의 파국을 원하는 염세적 인간이고, 거리는 그런 아신의 내면을 반영하는 장치로 쓰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영화의 종반 군졸8(김현목)의 손을 굳이 활로 쏘는 이유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만든 인간들 모두와 접촉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소산이자 경멸의 수사다. 다른 이들은 아신 스스로가 멀어지려 하는 존재라면, 생사역이 되어버린 부족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아신이 떨어져야만 하는 존재다. 아신은 이제 그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없게 된다. 〈아신전〉이 시리즈 내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된 섬처럼 혼자 단편으로 떨어져 나온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아신이 〈킹덤〉 세계의 기원이라는 점을 비추어볼 때, 그녀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는 ‘거리’의 존재가 그야말로 시리즈의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건 〈킹덤〉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거리감은 결국 우리에게까지 다다른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아비규환을 바라보고 있는 당신, 즉 〈킹덤〉의 세계로부터 무한의 거리로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 그 거리를 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모니터 밖의 관객들을 수식할 뿐만 아니라 모니터 안의 인물들 역시도 수식한다는 점에서 핵심적이다. 시리즈가 품고 있는 거리의 감각은 상상된 역사 속에 던져지고, 이 세계는 아무것도 아닌 허구라는 사실을 〈킹덤〉은 태어난 시점부터 폭로하고 있다. 그러니 이미 지나쳐온 과거,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생겨날 수 없는 존재를 데리고 옴으로써 관객들은 이미 일정한 거리를 확보한 셈이다. 관객의 거리 확보는 〈킹덤〉의 인물에게도 영향을 준다. 시리즈의 인물들이 좀비 사태로 인한 공포감을 생생히 체험하면서도 일부 장면에서는 대량학살의 쾌감을, 심지어 코미디의 감정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모니터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을 의식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그건 창작물이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는 특성이긴 하지만, 〈킹덤〉은 매체 안과 매체 밖이 떨어져 있는 거리 그 자체를 감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요컨대 앞서 설명한 코미디 장면에서의 시점, 그러니까 결박된 채 좀비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인물의 공포와 모니터 밖 세계에서 통용되는 코미디와의 괴리라던가, 오직 생존만이 우선인 파국(이미 민초들에겐 똑같은 세상이지만) 속에서도 미스터리를 갈구하며 임무를 부여받은 서비(배두나)를 따라가는 시선과의 괴리, 세상을 무너뜨리며 비극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존재임에도 계급을 해체하는 혁명적 존재로 좀비를 의미 지으며 글을 쓰고 있는 나와의 괴리, 더 나아가 제목 ‘킹덤’(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영어 단어라는 점에서)이 주는 괴리감 같은 것들 말이다.
3.
이 글은 새삼스레 카메라의 거리가 가지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지적 혹은 고백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적어도 〈킹덤〉은 결코 비장하게 관객들에게 훈계하는 드라마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모니터 밖의 우리들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안온함을 준엄하게 꾸짖고자 쓴 글도 아니다. 그러기에는 우리 사회가 그렇게 안전하지도, 호락호락하지도 않다는 걸 나 역시 잘 안다. 우리는 〈킹덤〉의 인물들보다 그저 ‘조금 더’ 안전하고 평이한 상태이지 않은가. 그러니 나는 다만 좀비 장르에서 촉발될 수밖에 없고 강점을 가질 수 있기에 부각되었던 거리감이 은연중에 가리키고 있는 위치를 말할 뿐이다. 카메라와 좀비는 서로를 마주 보며 끊임없이 다가가려 하지만 결코 가닿지 못하고, 외려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작동방식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식할 수 있는 상태를 증언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감각할 수 있어서 어쩌면 필연적이기까지 하다.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도 이와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가까이 다가가 생생히 체험하며 문제를 직면하기도 하지만, 문제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본질에 대해 고찰하기도 한다. 이 모순적 상황과 양가적인 태도가 〈킹덤〉이라는 세계가 지닌 물성이다. 그러니 서사의 인물들은 지금 누구와 어디쯤에 서 있는지, 좀비는 어디에 서 있는지, 그걸 바라보는 우리는 또한 어디에 서 있는지가 중요해진다. 그리고 이는 결국 거리의 문제라는 걸, 〈킹덤〉은 ‘거리’라는 핵심적인 장치를 빌어 우회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