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같지 않은 자들의 이상한 인간성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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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르륵, 타닥 타닥, 우지끈, 와르르.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촉 끝에 붙어있던 불씨가 나무기둥에 옮겨붙고 이내 활활 타오른다. 불길은 금세 건물 전체로 퍼져 서까래가 내려앉고 대들보가 무너진다. 혹은 바싹 메마른 갈대밭에 불을 질러 사방을 따가운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사람들의 옷에도 옮겨 붙는다. 한편 궁 내에 습격이 일어나 근정전 안까지 유혈이 낭자한 소란이 벌어지고, 서비(배두나)는 불타는 겉옷을 몸에 감싸 가까스로 탈출한다. 이 불(들)의 뜨거움과 밝음과 급박함, 그리고 피아를 가리지 않는 파괴성은 특유의 색감과 슬로모션 등으로 강조되어 모니터 너머까지 전해진다. 그런가하면 나무로 만든 투박한 마차는 아슬하고 긴박한 카체이싱(?)을 선보이며 마치 <벤허>(1959)의 조선 버전같은 장면을 만들어내고, 안현대감(허준호)과 그의 제자들은 상복차림으로 덤블링을 하거나 마샬아츠 같은 액션을 구사하며 흡사 닌자같은 무협적 존재감을 드러낸다. 한편 관청에 하옥된 채 목에 칼(枷)을 차고 있던 두 사내들 중 한 명이 역병에 전염되지만, 목에 찬 칼 탓에 도망가지도, 그렇다고 잡히지도 못하고 빙글빙글 돌며 가련하고도 소름돋는 슬랩스틱을 보여준다. 별안간 웬 불과 나무, 마차와 칼 타령인가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킹덤>시즌1과 2(이하 <킹덤>) 그리고 <킹덤: 아신전>(이하 <아신전>)을 따라오며 다른 무엇보다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작품의 이야기와 그 속에 서려있는 다기한 쟁점들 보다, 이 좀비액션물이 조선이라는 봉건적 풍경과 결합하며 빚어낸 뜨겁거나 밝은, 투박하거나 화려한 시각적, 촉각적 심상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런 인상을 심어준 장면 중 몇 가지를 나열해 보았다. 이 속엔 사극 서사라는 배경과 조선이 가지는 풍경 이미지, 그리고 좀비와 액션드라마 장르의 관습체계가 뒤엉키며 만들어낸 복합적인 상관관계가 있고, 이 혼종성이 구현하는 어떤 효과가 <킹덤>시리즈의 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그 인상적 면면들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2.

조금 에둘러 시작해보자. 김은희 작가는 좀비물을 기획하면서 왜 굳이 조선을 배경으로 삼았을까? 물론 그가 사극을 택한 것이 그 자체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의 작품들이 그간 다양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결국 사회적 문제를 알레고리화하는 정치드라마를 이야기의 중핵으로 삼아왔고, <킹덤>과 <아신전> 또한 좀비와 별개로 권력암투를 통해 서사적 서스펜스를 이끌어내는 정치사극이라는 점에서 그의 작가적 맥락과 친연성을 맺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반대로 해보자. 김은희는 정통 정치사극을 구상하면서, 왜 굳이 ‘좀비’라는 비현실적 소재를 섞으려 했을까? 이 질문은 조금 복잡한 답을 요한다. 물론 좀비가 그 자체로 훌륭한 정치드라마적 소재이긴하다. 좀비라는 유사-인간/괴물은 그 외형과 광인적 면모, 식인성 등의 존재적 특성을 통해 현대 사회의 계급구조를 우화적으로 은유하고 있으며, 또한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누가 살아남고 살아남지 못하는지를 통해 사회적 부조리를 환유하는 방식은 이 장르의 발원지인 조지 A. 로메로부터 이어져 숱하게 차용된 레토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킹덤>과 <아신전>은 분명 이런 좀비 세계관에서 반복-변주되어온 주제를 계승하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대답만으론 어딘가 석연찮다. 그러니까 김은희의 작품이 사회드라마를 표방하고, 좀비라는 장르적 소재가 그에 부합한다고 하더라도, 왜 굳이 ‘사극’, 정확히는 ‘사극 속 좀비’여야 했을까? 생소한 장르조합의 신선함 때문에? 혹은 판타지와 실제역사를 혼합해 깊은 차원의 정치적 은유를 꾀하려고? 물론 이 글에서 ‘쌩뚱맞게’ 작가의 기획의도를 추리하려는 건 아니다. 그가 어떤 생각이었던 간에 중요한 건 결과적으로 좀비라는 소재가 조선이라는 배경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빚어냈는가 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에 대해 말해보자.

3.

이미 많은 평자들이 <킹덤>시리즈의 좀비가 권력암투의 서사속에서 어떤 정치적 함의를 지니는지 다양하게 해석한 바 있지만, 의외로 이 시리즈의 좀비들이 기왕의 좀비들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는듯 하다. 단순히 이 좀비들이 기생충에 의해 전염되며, 물과 불, 따뜻한 온도를 두려워한다는 설정상의 차이를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보다 좀비라는 비현실적 존재가 조선이라는 아날로그한 세계에 속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독특한 감흥과 운동,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효과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예를 들어, (당연한 얘기지만)<킹덤>의 좀비들은 모두 한복을 입고 있다. 좀비와 한복. 이 무슨 파스타와 김치같은 조합인가 싶지만, 여하튼 인종과 국적이 다양해 옷차림과 헤어스타일, 피부색도 제각각인 서구권의 현대판 좀비들과 달리 이들은 모두 좀비가 되어서도 하나의 의복양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단순하면서도 커다란 이 차이는, 시즌2 후반부 궁 내에 감염이 퍼졌을 때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주기도 한다. 왕의 죽음으로 새하얀 상복을 입고 있던 모든 궁인들이 대거 좀비로 변해 피 튀기는 참혹한 소란을 일으킨다. 좀비들은 모두 상복의 하얀 옷감 위에 새빨간 핏물이 스며들어 은은한 핑크빛을 띠는 차림새로 살아있는 인간들을 향해 매섭게 달려간다. 각자 업종과 직책에 따라 조금씩 형태가 다르긴하지만, 좀비가 된 군중이 모두 엇비슷한 형태의 엇비슷한 색감의 옷을 입고 한 곳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형상이 주는 기이한 감각은 분명 기존의 현대인 좀비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니폼을 입은 좀비랄까. 어쩌면 하나도 빠짐없이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고, 또 마치 유니폼을 입은 듯 똑같은 행색인 좀비들을 보면서 노동자의 형상을 유추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다른 사례로, 시즌2가 공개됐을 때 좀비들의 핑크색 차림새가 당시 미래통합당의 정당컬러와 유사하다며 미래통합당의 당원들을 비유한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실제로 SNS상에서 떠돌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좀비의 형상에 내재된 메타적 의미가 무엇인지 판별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흥미로운 건 작품이 한복과 피, 좀비의 외형이라는 이미지의 조합을 통해 그 자체가 이런 저런 은유로 읽힐 수 있는 해석의 경로를 열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이 ‘핑크핑크’한 좀비들은 대관절 누구이며 무엇인가? 가련한 희생자들인가? 포악한 살육자들인가? 아니면 단순한 괴수인가? 물론 그들은 답을 주지않고 성실히(?) 살육과 식인을 행할 뿐이다. <킹덤>은 이런 방식으로 조선이라는 과거와 좀비라는 판타지 사이에서 은연중에 우리의 현실과 다리를 놓는다.

이처럼 <킹덤>에서 조선이라는 환경은 좀비의 군집적이고 무지성적 특성과 결합하며 작지만 의외의 효과들을 낳는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서두에 언급한 장면 중 하나인 시즌1의 초반부, 관청에 하옥돼 2인용 칼을 목에 차고 있던 두 사내를 떠올려 보라. 여기서 한 사내가 창살 틈새로 좀비에게 감염되지만, 목에 찬 칼 탓에 둘은 붙어있지도, 떨어지지도 못하는 인간과 좀비 듀오가 된다. 이 장면에서 좀비는 잡으려하고 인간은 도망치려하지만, 둘 모두 잡을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아이러니에 처한다. 그리고 작품은 이 아이러니를 극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전진하는 좀비의 힘을 회전력으로 전환해 빙글빙글 돌게하고, 칼의 중간에 카메라를 놓아 계속해서 돌고 도는 남자와 좀비의 시점 숏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그런데 이 장면은 다소 기묘한 복합성을 지닌다. 여기엔 감옥 밖에 몰려온 좀비들과, 목에 찬 칼의 저편에서 좀비가 달려드는 일촉즉발의, 하지만 칼과 창살이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로인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는 아슬한 상황이 있다. 즉 이 장면엔 극한의 긴장감이 조성될 조건이 모두 갖춰져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서 생성되는 것은 오히려 예의 그 아이러니에서 발생하는 웃음이다. 춘향이도 아닌데 난데없이 칼을 찬 좀비와, 그와 함께 칼을 찬 탓에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사내의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공포. 저릿하고 극적인 긴장감과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서 촉발된 코미디가 사이 좋게 동거하고 있는 기묘한 상황. 아이러니에서 발생한 아이러니가 여기 있다. 그런데 실없이 웃기면서도 소름 돋는 이 장면의 독특한 점은, 비단 그 감정적 복합성에만 있지 않다. 생각해보면 이 장면이 구태여 여기서 코미디를 유발해야 할 서사적 당위가 딱히 없다는 점에서 이 칼을 찬 ‘조선-슬랩스틱’ 듀오는 얼마간 잉여적이다. 바로 뒤에 좀비로 변해버린 한 엄마가 자식을 해하고, 그것을 또 다른 자식이 목격함으로써, 좀비의 잔혹성과 비극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직전의 우스꽝스럽고도 무서운 잉여적 코미디는 이 에피소드 속에서 더욱 묘한 위치를 점유하게 된다. 애초에 관습을 비틀어 풍자를 목적으로 하는 B급 장르가 아니고서야 좀비를 코미디적으로 전유할 하등의 이유가 없고, 그것이 중심서사의 전개에 복무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그렇다. 더군다나 안현대감과 중전, 이승희의원 등 살아있을 때 단역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고 좀비가 된 인물들을 제외하면, 이름조차 부여 받지 못한 좀비가 이토록 단독적인 존재감을 발산한 경우가 있었던가? 요컨대 칼을 찬 좀비는 <킹덤>시리즈에서 장르적으로 돌출적일 뿐 아니라 서사적으로도 독특한 존재성을 가지고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진다. 대관절 이 칼 찬 슬랩스틱 듀오는 무엇일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목에 칼을 차고 머리를 산발로 풀어헤친 좀비는 괴성을 지르고 빙글빙글 돌며 기괴한 유머를 내뿜는다. 그런데 이 사소한 잉여성은 좀비라는 존재가 지닌 익명성과 군중성을 목에 찬 칼과 그 칼의 회전, 그리고 유머라는 독특하면서도 단순한 방법론으로 극복한다. 즉 이 무명의 좀비는 <킹덤>2부에서 안현대감이 좀비가 됨으로서 반전서사의 중핵인 좀비가 되는 것과 정확히 반대의 방식으로 같은 일을 이뤄내는 것이다. 즉 그는 끝까지 이름이나 가족관계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지만, 서사 내부의 다른 어떤 인물들보다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이 작고도 기이한 유머는 은연 중에 ‘좀비’라는 익명적 존재가 지녔던 서사적 한계를 스리슬쩍 뒤흔든다.

요컨대 <킹덤>의 좀비들은 옷차림만으로 모종의 캐릭터성을 생성하고, 목에 찬 칼을 통해 기묘한 웃음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익명성을 극복하는 <킹덤>의 좀비들은 ‘좀비’라는 장르적 설정을 전혀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조선’이라는 서사적 토대이자 이미지적 풍경 속에서 독특한 존재성을 점유하게 된다. 그리고 장르적 변주 없이도 기이하게 변주되는 좀비의 존재감을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또 하나의 좀비는 바로 왕이 된 좀비, 혹은 좀비가 된 왕(윤세웅)이다. 세자 이창(주지훈)의 사려깊은 아버지이자 일국의 왕이었으나 이제는 일말의 지성마저 잃은 채 인육을 탐하기만하는 좀비. 그러나 여전히 곤룡포를 두르고 강녕전(경복궁 내 왕의 침전)에 머물며 궐 내 병사들의 호위를 받는 조선의 지엄한 국왕. 이 존재적 모순이 어떻게 한 인물에게 부여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 국왕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끔찍한 모습의 좀비가 되어서도 살아생전 지니고 있던 지위와 권력을 여전히 유지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전에도 좀비로 변한 이에게 살아있을 당시에 지녔던 면모가 투영돼 캐릭터적 복합성을 띤 사례가 없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드라마<워킹데드>(2010~2021)의 시즌3에서 생존자 마을을 구축하고 있던 가버너(데이비드 모리시)가 자신의 딸이 좀비로 변했음에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듯 가둬놓고 키우며 머리를 빗어주고 대화를 시도하던 장면을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킹덤>에서 좀비로 변한 안현대감이 조학주(류승룡)에게 달려들어 볼을 물어뜯으며, 일평생 보여줬던 강직한 지략가의 면모를 좀비가 되어서도 유지하는 것 역시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국왕은 이들과는 다르다. <킹덤>의 왕은 단순히 인간일 때 지녔던 캐릭터성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킹덤>에서 국왕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살아있을 때도 해원 조씨 가문에게 휘둘리는 연약한 왕이었다는 사실 외에, 그가 어떤 성품을 지녔고 어떤 역사를 통과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건 그는 일국의 지아비인 국왕이기에, 그로부터 파생된 물질적이고도 상징적인 자본이 있다. <킹덤>의 독특한 점은 바로 그 왕의 권력과 지위를 좀비에게 부여해, 대사 한 마디 없이 괴성을 지르고 인육만을 탐하는 괴물에게 서사의 핵심적 역할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치료를 위해 찾아온 의원의 조수를 잡아먹거나 밤마다 궁녀를 잡아먹으며, 사슬을 목에 차고 침소를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국왕. 혹은 사지가 묶인 채 가마에 실려 상주까지 와서는 아들을 잡아먹으려 달려드는 국왕. 하지만 수많은 신하와 백성들이 고작 두창(천연두)에 걸린 것을 걱정하며 불철주야 염려하는 조선의 근엄한 아버지. 이렇게 <킹덤>에서 어떤 좀비는 여타의 좀비들과 하등 다를 것 없는 무지성적 괴수이면서도 동시에 존귀하고 지엄한 존재가 되기도한다. 다시 생각해보면 <킹덤>속 ‘킹덤kingdom’은 누구의 나라인가. 작품 속 국법에 따르자면 왕은 좀비가 되어서도 왕이니, 그 나라는 좀비가 다스리는 좀비의 나라가 아닌가? 어떤 좀비는 이 권력암투 속에서 왕이 되기도 한다.

4.

‘조선-슬랩스틱 좀비’와 ‘핑크 좀비’. 그리고 ‘로열 좀비’. 상술했듯 이들은 설정상으로는 기존의 현대인 좀비들과 큰 차이가 없다. 이들은 기왕의 좀비들과 마찬가지로 인육을 탐하고, 비이성적이며, 군집적이고 폭력적이다. 그러나 현대인 좀비를 다루는 작품들이 좀비의 서사적 존재감을 강화하기 위해 점차 좀비에게 인격과 지성, 언어등을 부여하는 식으로 장르적 변용을 꾀했던 것과 달리, <킹덤>은 좀비는 그대로 둔 채 조선이라는 배경을 적극 활용해 좀비의 존재적 변화를 꾀한다. 이 좀비들은 옷차림 만으로 모종의 알레고리가 되고, 죄수로서 받은 형벌 때문에 되려 오묘한 유머를 자아내기도 하며, 말 한 마디 못하고 인육만 탐하면서도 나라를 통치한다. 그리고 과거라는 배경은 이처럼 서사적 토대일 뿐 아니라 이미지적으로도 무궁한 변용성을 지닌 시각적 장소로서 복합적 기능을 한다. <킹덤>에서 ‘조선’이라는 시대, 공간과 환경, 즉 모종의 풍경은 ‘좀비’라는 장르적 관습들과 결합하면서 생소하고도 의미심장한 결과물로 변한다. 앞선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김은희 작가는 왜 정치사극을 구상하며 좀비를 끌어들였을까? 물론 여전히 그의 머릿속을 알 수는 없다. 또한 내가 지적한 사례들을 비롯해 <킹덤>과 <아신전>에 등장하는 독특한 ‘조선’ 좀비들이 주체적으로 정치사극의 중심 서사에 기여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킹덤>이 분명 명확한 주제를 내포한 사회드라마이고 또 시각적 쾌감을 선사하는 좀비물이면서도, 때때로 그 장르적 범주를 이탈하는 묘한 작품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좀비들이 누구이며, 어떤 옷을 입고, 어디에서 활동하는지가 그 저변에 영향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말 없이 인육만 뜯고 있는 좀비들은 어쩌면 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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