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이 세계는 왜 이렇게

kingdom

〈킹덤〉의 시즌1과 2는 한 몸인 듯 엮여 있다. 마블 히어로 영화를 말할 때 자주 들었던 ‘페이즈phase(단계)’와 같다고 할까. 〈킹덤〉은 이제 페이즈1을 지나 페이즈2로 넘어간다. 〈킹덤: 아신전〉(이하 〈아신전〉)은 둘 사이를 연결하는 징검다리와 같다. 〈아신전〉을 딛고 나타날 페이즈2는 배경과 인물 구도에서 현격한 변화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한양과 경상 땅을 오갔던 배경은 압록강 주변이 될 듯하고, 해원 조씨와 세자 이창의 2항적 대결 구도는 이창(조선)-아신-아이다간(여진족)이라는 3항 구도로 옮겨갈 듯하다. 아마도 이 시리즈를 모두 쫓아온 관객이라면 전지현이라는 지구 대스타의 시리즈 진입을 보며 이창과 아신의 갈등과 협력을 예상하게 될 것이다. 〈킹덤〉 제작진은 엄청난 구매력을 끌어내는 CF 스타이자 한류 스타인 전지현을 결코 악당으로 자리매김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아신전〉은 어떻게든 우리가 아신의 상황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작품 내부에서 ‘좀비’가 지칭되진 않지만 〈킹덤〉은 분명 좀비물이다. 이 작품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으로부터 시작한 장르적 전통의 자장 안에서 〈28일 후〉(2002), 〈새벽의 저주〉(2004)의 성공을 발판으로 삼아 현재 〈워킹 데드〉 시리즈, 〈월드워Z〉로 나아간 장르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앞서 페이즈1과 2를 말하면서 나는 ‘좀비’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이 시리즈 내부에서 쓰였던 ‘역병’이라는 말도 쓰지 않았다. ‘좀비’나 ‘역병’이라는 말없이 〈킹덤〉의 서사적 구도를 말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사적 구도의 큰 그림은 충분히 서술한 듯하다. 좀비가(혹은 역병이) 이 시리즈의 주요 갈등을 형성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우선하는 갈등은 인간의 권력 관계와 위계, 지리-정치학적 요소와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이는 〈킹덤〉이 좀비물이면서도 좀비에 ‘대한’ 인간의 대항보다, 그것을 ‘경유한’ 인간 사이의 아귀다툼을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많은 좀비 아포칼립스가 취하는 방식이지만, 〈킹덤〉에서는 기존의 좀비물에서 만나지 못한 또 다른 특성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킹덤〉의 장르적 성격을 규정하면서도 그것을 좀비물에 한정하지 않고 들여다보려 한다. 〈킹덤〉의 장르적 지형을 파악하면서도 그 속에서 좀비물이라는 설정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필 것이다.

페이즈1의 서사를 총체화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무엇일까? 나는 ‘왕좌의 게임’이라고 말하고 싶다. HBO의 〈왕좌의 게임〉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맞다. 〈킹덤〉은 세자 이창과 해원 조씨 가문이 왕위를 놓고 다투는 게임이다. 하지만 〈왕좌의 게임〉과는 결정적인 지점에서 차별화된다. 〈왕좌의 게임〉을 이끌어가는 서사적 힘은 ‘과연 누가’에 있다. 〈왕좌의 게임〉은 시즌1에서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서사의 방향을 급격하게 틀기로 유명했다. 시리즈의 주요 변곡점이었던 시즌1 마지막 에피소드, 시즌3 피의 결혼식은 7왕국의 왕좌를 그 누구도 쉽게 차지하지 못할 것이란 점을 강렬하면서도 잔혹하게 묘사했다. 누구든 왕좌를 차지할 수 있을 것 같고, 누구든 죽임을 당할 수 있을 것 같다. ‘불’과 ‘얼음’으로 자리했던 대너리스와 존이 왕좌를 차지할 것이라는 기대는 크지만, 누가 그 자리에 앉게 될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킹덤〉의 서사적 힘은 다르다. 〈킹덤〉에서는 ‘과연 어떻게’가 서사를 이끈다. 세자 이창이 해원 조씨를 물리칠 것이라는 점은 캐릭터 형성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이창은 〈왕좌의 게임〉의 존 스노우보다 결단력 있고 그 혈통부터 조선 왕실의 정통성을 따른다. 대너리스가 가문의 회복이라는 사사로움에 이끌려 왕위를 되찾으려 한다면, 이창은 조선의 백성들을 위한다는 공적 명분으로 왕권을 회복하려 한다. 불법적 지위에 있는 자들이 합법적 지위에 올라서려 애쓰거나 그럴 것으로 예측되는 요소들이 〈왕좌의 게임〉의 게임이라면, 원래 합법적 지위에 있던 이가 불법적 지위로 밀려나면서 그것을 어떻게 다시 회복할지가 〈킹덤〉의 주된 게임이다. 정의로운 이창 곁에는 정의로운 동료인 서비와 영신이 따르고, 그들 또한 철저히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다. 〈왕좌의 게임〉에서 대너리스 또한 억압당한 민중을 해방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왕위 찬탈을 추구했다면, 〈킹덤〉은 애초부터 민중을 수단화하지 않는 인물을 설정함으로써 이 시리즈를 보는 이가 이창 일행에게 감정적 지지를 보내도록 유도한다. 만약 창작자들이 그것을 반대로 뒤집으려 했다면 시리즈 애청자들의 분노를 야기했을 것이 분명하다. 정의로운 주인공의 존재와 승리는 장르물이 제공할 수 있는 기본적 카타르시스다(주인공이 최후에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악당의 최후가 있고 난 뒤, 혹은 그와 동시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분명 거기에는 주인공을 뒤이을 인물, 즉 후계자 또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설정에 대한 배반은 보는 이나 만드는 이에게 모두 부담스러운 일이다.

〈킹덤〉 시즌1, 2는 애초에 이창이 해원 조씨를 이길 수밖에 없게끔 서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중전의 출산 기점에 어떻게든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운명을 제시한다. 이렇게 왕좌를 두고 다투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측면을 보이면서도 그 기본 설정에서 큰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역사를 어떻게 변주하느냐에 좌우된다. 〈왕좌의 게임〉은 『반지의 제왕』을 저술한 J.R.R. 톨킨 부류의 판타지 세계를 기반으로 한다. 물론 그 세계의 이미지가 중세 유럽을 기반으로 하기에, 우리가 그로부터 중세 유럽의 어지러운 역사를 읽어내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작품 내부로 한정한다면 우선적으로 그곳은 우리의 일상 세계와는 동떨어진 ‘이차 세계Another World’이다. 즉 그 자체만으로도 완결된 세계이다. 하지만 〈킹덤〉은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작품의 배경은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연장된 시공간인 ‘조선’이다. 우리는 이씨 조선이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무너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킹덤〉은 그러한 우리의 인식을 깨뜨리지 않는 선에서 허구를 구축한다. 이는 우리에게 매우 중대한 질문을 남긴다. 왜 한국의 허구적 상상력은 실제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자체로 완결된 세계를 구축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조선과 같은 실제 역사의 봉건적 국가체를 허구에서도 필요로 하는가? 물론 톨킨 류의 판타지도 중세 유럽에 대해 이미 구축된 지식이나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평행 우주적 세계로 이해되는 것이지 실제 역사로부터 연장된 세계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허구적 상상력은 그 연장성을 끊어 내지 못하는가? 아마도 이와 같은 질문을 다루는 것은 좀 더 진지한 사회-역사학을 요청할 것이다. 실제 국가체의 연장성 안에서 상상력이 발휘된다는 점은 지금 대한민국의 역사적 토대인 조선을 어떻게 변형하려 하고, 그 변형에는 어떠한 소망이 담겨 있는지 독해하도록 이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러한 독해를 깊게 다룰 역사학적/사회학적 역량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위 질문을 본격적으로 다루기보다 허구적으로 구축된 조선 안에서 장르적 장치들이 과연 어떤 식으로 변주되고 있는지 살피려 한다.

이창은 역병과 마주하고 이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일종의 파티party를 형성한다. 그의 파티는 좀비라는 역병에 대항하면서도 해원 조씨에게 유린당한 조선 땅을 구하기 위해 집결되었다. 이러한 파티원을 장르 서사 안에 구축할 때 중요한 것은 각 구성원에게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는 일이다. 도식적으로 연결한다면 세자 이창은 파티의 리더이자 ‘기사’이고, 그런 만큼 전술과 병기를 다룰 때 제너럴리스트의 면모를 보인다. 이는 민중이 한 국가의 지도자에게 투사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정의로운 제너럴리스트가 특정 분야에서 특출난 인재를 모아 제너럴리스트이기에 부족할 수밖에 없는 측면을 보완하여 나라를 강성하게 이끌어 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부여되는 것이다. 그런 이창의 곁에는 (비록 배신자로 밝혀지긴 했지만) 무예에 출중한 호위무사 무영이 있고, 왕족으로서 ‘옥체’를 보전해야만 하는 이창을 대신해 근접 전투에 나서는 영신이 있다. 조선 땅에서 천민 출신인 영신이 ‘탱커tanker’ 역할을 맡는 것은 역사적 맥락에서도 매우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 이유로 영신이란 인물이 더욱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킹덤〉의 창작자들은 영신에게 탱커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저격수의 역할마저 부여함으로써 전장의 선봉과 후봉을 모두 오가는 홍길동과 같은 인물로 만든다. 영신의 저항적 성격은 단지 그 표정이나 말투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탱커와 저격수를 모두 수행하는 그의 괴물 같은 신체에서도 드러난다.

서비는 의술에 능한 만큼 파티에서 치료사의 역할을 맡는다. ‘힐러’는 파티의 중심이 되기보다는 주요 캐릭터를 지원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수행한다. 하지만 파티 구성의 화룡점정과도 같이 빠져서는 안 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전통적 롤플레잉 게임에서는 주로 엘프라는 종족이 힐러가 된다. 특히 엘프 중에서도 여성 엘프가 파티의 치료사를 겸한다. 여성과 치료사는 오래전부터 깊게 연관되었다. 톨킨 류의 판타지 서사가 중세 유럽을 모티프로 하기에 여성과 치료사의 관계도 중세 유럽과 무관하지 않다. 그 당시 치료사는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다시 말해, 돌봄 노동의 수행자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일종의 어머니와도 같은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치료사는 중세 유럽에서 ‘마녀’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는 어머니이자 돌봄 노동의 수행자로서 치료사의 존재가 자연과 더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성’적인 인간의 문화와 달리, 자연적이면서도 마법적인 힘과 연결된 존재였다. 즉, 서비가 치료사이면서도 생사초의 비밀을 찾기 위해 숲을 뒤진다는 설정은 여성에 대한 관습적 상상과 무관하지 않다(서비를 향한 범팔의 연정도 서비의 돌봄 노동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어머니-치료사의 존재는 판타지 서사에서 ‘힐러’로 상상되었고, 공포영화에서는 ‘마녀’로 상상되었다. 둘 다 모두 ‘이성’과 ‘문화’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남성들의 타자로서 나타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킹덤〉의 서비는 단순히 남근적 문화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부산물로 한정된 듯이 보이지 않는다. 영신과 같이 서비에게도 치료 이외의 또 다른 능력이 부과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비는 치료사이면서도 탐정이다. 〈킹덤〉을 여타의 좀비물과 완전히 달라지게 만드는 독특한 지점이 있다면 살아 움직이는 시체가 되는 과정과 해결이 서사에서 중요하다는 점이다. 기존의 좀비물에서 중요한 것은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펼쳐지는 잔혹한 학살의 쾌감과 전염의 공포였다. 좀비가 되는 과정과 치료가 그 중심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레지던트 이블〉은 처음에는 과학적 상상력으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학살과 규모의 전시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 〈워킹 데드〉 초반부에서는 치료의 가능성이 언뜻 언급되었지만, 시리즈가 거듭되며 치료 탐구의 동력은 소실되어 갔다. 학살과 규모의 전시는 좀비물이 가장 손쉽게 제공하는 쾌락이었고, 많은 좀비물 작품들이 그 쾌락에 의지했다. 물론 〈킹덤〉 또한 학살의 쾌감과 전염의 공포를 작동시킨다. 하지만 그러한 시각적 스펙터클과 함께 ‘대체 어쩌다 이런 일이?’라는 물음을 추적하는 추리 서사가 할당된다. 그 할당량은 무시하기 힘들 만큼 상당하다. 이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킹덤〉이 조선 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무너진 조선은 〈킹덤〉의 서사 내부에서 멸망할 수 없는 국가 체제로 이미 지정되어 있고, 역병은 어떻게든 치료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물론 나는 이 시리즈의 끝에 역병의 재발병 가능성이 암시될 것으로 예상한다. ‘배고픈 민중’과 관련한 알레고리적 측면을 고려한다면 역병을 만들어내는 생사초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채로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지 않을까).

탐정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해 서비는 SF물에서 등장할 법한 과학자에 가깝다. 그는 현상을 귀납적으로 해석하고, 가설을 세워 문제를 연역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서비를 과학자로 본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에이드리언 마틴은 “확산 중인 역병에 관한 전문가의 의학적, 과학적 관찰”이 등장한다면서 서비를 과학자와 비슷한 위치에서 다룬다. 하지만 에이드리언 마틴은 이에 대해 슬쩍 언급하기만 할 뿐 더 이상 논의를 밀고 나아가지는 않는다. 나는 서비의 성격화가 시리즈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기능이 〈킹덤〉 시리즈를 단순히 좀비물로 한정 짓지 않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킹덤〉의 각본을 쓴 김은희는 종종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을 만든다는 것, 좀비물을 만든다는 것에 관해 말하며 사람을 마음껏 죽일 수 있어서 좋다고 농반진반으로 말하곤 한다. 마치 죄의식 없는 학살의 무대를 오매불망 기다려온 사람처럼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실현된 작품은 학살의 쾌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게다가 안현대감의 부하 덕성이 죽는 장면을 보면 우리는 김은희가 마냥 좀비물의 클리셰를 따르지 않고 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수많은 좀비물에서 주요 등장인물과 가까운 이가 좀비가 되는 일은 흔하다. 좀비가 된 이를 아꼈던 사람은 그 사실에 슬퍼하고, 직접 최후의 결단을 내린다. 좀비물들은 그러한 결단의 순간으로부터 비극적 페이소스를 만든다. 하지만 〈킹덤〉에서 좀비가 된 덕성을 처리하는 것은 안현대감이 아니라 영신이다. 이 작품은 안현대감에게 그러한 결단의 책임을 짊어지게 하지 않음으로써 비극적 페이소스의 수준을 한 단계 낮추고, 영신에게 그 역할을 맡김으로써 안현대감과 그 부하들이 저질렀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심판을 직접 종결짓게 한다. 이는 〈킹덤〉의 세부 서사를 추동하는 힘이 좀비물이라는 장르에 빚지고 있다기보다는 역사적 의식에 더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을 추론케 한다.

이와 더불어, 영신이 덕성을 ‘처리’하는 것은 신파성에 대한 의도적인 거부처럼 읽히기도 한다. 신파성의 핵심은 ‘어쩔 수 없다’라는 체념적 정서다. 신파가 이데올로기 작동과 긴밀하게 연관되는 것도 그러한 체념을 바탕으로 가능해진다. 세계의 본질을 고통으로 두면서 지배 체제로부터 전가되는 고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 고통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만약 안현대감이 덕성을 처리했다면, 덕성의 희생과 그 처리는 철저히 군신 관계에 예속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단의 주체가 영신이 되면서 군신 관계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은 옅어지고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면서 발생하는 신파성 또한 흐릿해진다. 이는 〈킹덤〉의 세계관이 조선시대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이데올로기적 도덕은 조선시대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측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제껏 살펴보았듯이 〈킹덤〉은 역사에 대한 그만의 태도를 바탕으로 판타지, SF, 추리물과 같은 다양한 장르가 변주되어 만들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장르 혼종성은 다층적 쾌감을 만들어내며 〈킹덤〉을 단순한 좀비물로서 보기 힘들게 한다. 그렇다면 역사성과 혼종성은 그 자체로 충만해지는 목표 지점인 것일까? 그것으로부터 상업적 야심을 성취하는 일만이 이 시리즈의 관심일까?

김은희 작가의 〈싸인〉이나 〈시그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자기가 축조한 세계에서 작동하는 특정한 논리성을 조직하면서도 그 논리성을 스펙터클의 요소로만 활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대신 논리성의 정체와 역할에 주목한다. 또한 논리성은 역사적/동시대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게 구성된다. 즉, 세계의 작동 방식 및 논리성 그 자체를 미스터리로 놓고 그것을 파헤쳐 가는 쾌감을 전하는 것이다. 〈아신전〉에서 아신이 마주해야 했던 것은 단지 자기 마을 사람들에 대한 조선의 배신이 아니었다. 그의 앞에는 ‘대체 왜 이 세계는 이렇게 굴러가는 것일까’라는 미스터리, 자기들이 생각한 논리와 불일치하는 권력의 지도들, 그리고 그 불가해성에 대한 좌절과 울분이 자리한다. 그러므로 〈킹덤〉은 좀비의 무대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확장된 세계를 장르화한다. 자기만의 역할을 이행하는 인물들이 있고, 그들은 세계의 불가해성 앞에서 마주한다. 〈킹덤〉은 그 충돌이 재현되는 무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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