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바보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고 싶다. <킹덤: 아신전>(2021, 이하 <아신전>)은 대체 뭘 위해 만들어진 작품일까? 90분을 조금 넘는 러닝타임 이후 가장 처음 든, 그리고 가장 굵직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오해를 피하고자 서둘러 부연하건대, 나는 지금 <아신전>의 만듦새나 제작 의도를 조롱하고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읽혀야 한다; 이런 경우가 지난 역사에 얼마나 있었던가? <킹덤> 시즌 2(2019) 마지막 시퀀스에 깜짝 등장해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었던 전지현-아신의 전사(前史)를 보여주는 이 ‘스페셜 에피소드’는, 자신이 속한 위치로 인해 유독 이질적으로 보인다. 물론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킹덤>의 외전-프리퀄이라는 위치. 극영화나 드라마 같은 허구적 서사 영상 양식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통상적인 외전-프리퀄이란 독자적인 팬덤이 크게 생길 만큼 인기가 많은 캐릭터를 중심으로 만들어진다는 걸 알 것이다. (당연하지만 여기엔 부가 상품의 논리가 배경으로 깔려있다) 한데 아신이 그런 정도의 캐릭터인가?
앞서 말했듯 <킹덤> 본편에서 아신은 그저 깜짝 등장해 주목을 끌었을 뿐 아직 구체적인 캐릭터성을 부여받지 못했다. 아니, 곧바로 이어진 <아신전>을 염두에 두면 부여받지 않았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게다. 더군다나 아신의 어린 시절이 꽤 오래 제시되어 러닝타임의 절반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가 아는 전지현-아신을 만나게 되기에 <아신전>이 오로지 전지현이라는 스타를 위해 기획되고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워지는 것이다. <아신전>은 마치 한참 진행되던 <킹덤>의 플롯을 갑자기 중단시키고서 펼쳐지는 비인칭적 플래시백처럼 느껴진다. 달리 말해, 이 ‘스페셜 에피소드’는 우리가 아는 게 없는 캐릭터인 아신을 갑자기, 최대한 세세하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아신전>에 대한 중앙일보의 기사를 보면 “낯선 배경과 인물에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별도로 이야기를 구성했”다는 제작진의 말을 볼 수 있다) 그래, “갑자기”라는 말이 중요하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렇게 친절한 프리퀄을 본 기억이 없다. 대체 <아신전>은 뭘 위해 만들어진 작품일까? 약간 서둘러 본론을 말하자면, 원전으로서의 본편과 파생작 사이의 관계에 있어 기존의 모델들의 작동 방식이 어떤 흐름으로 인해 뒤틀린 결과가 <아신전>이라는 게 나의 의심이다. 그렇다면 이 의심을 구체적으로 풀기 전에, 혹은 풀기 위하여 “기존의 모델들”이랄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테다.
TV적 스토리텔링의 도식을 제공한 데이빗 아우어바흐의 「연속극 텔레비전의 우주론(The Cosmology of Serialized Television)」을 약간 베껴, 드라마/TVA 같은 원전과 극장판/OVA/게임 같은 파생작 사이의 관계에 내러티브의 성질을 주조하는 어떤 모델들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다만 여기서의 모델은 어떤 형식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구체적인 장르들의 분류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현행화되는 힘의 모델인데, 후자의 방법을 취해야지만 개별 작품의 의미를 과하게 축소/일반화시키는 오류에 빠지지 않으면서 작품들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원전과 파생작 사이의 관계성을 ‘하여튼’ 연결로 규정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그리고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1996)을 기준으로 예를 들자면), 수축 연결, 확장 연결, 평행 연결로 도식을 세우고 싶다. 수축 연결은 원전의 설정 및 요소들을 축약하거나 더 이상의 진행이 불가하도록 결론을 짓는 등 이야기의 연쇄가 갖는 복잡한 가능성을 정리해 하나의 소실점으로 수렴시키려는 힘으로, 수축 연결의 목적은 무엇보다 관객의 ‘결말에 대한 의식’, 즉 갈등의 효과적인 종결 ―『픽션의 형태(The Shapes Of Fiction: Open and Closed)』의 저자들이 말하듯 이 말은 ‘해결’만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는 데에 있다. 여기서 총집편, 하이라이트, 최종장 등의 개념들은 수축 연결의 서로 다른 세기의 결과물이 된다. (팬들을 위한 총집편이라는 점에서 <사도신생>(1997)은 수축 연결로서의 방향이 크다)
‘결말에 대한 의식’의 반대에 놓여있는, 가능한 오랫동안 픽션을 향유하고자 하는 ‘지속에 대한 의식’을 충족시키는 데에 목적을 둔 확장 연결은 설정 및 요소들을 원전의 상태가 ‘직접’ 연장되는 와중에 변주를 가하거나 다른 요소들을 덧붙임으로서 서사의 새로운 연쇄 상태를 구축하려는 힘이다. 우리네 시간선에서 해당 파생작이 원전의 공개 이후 우리 앞에 등장했으며, 또 원전과 같은 세계관을 갖고 있다면, 파생작의 시간적 배경이 원전에 대해 이전이든 이후이든 큰 상관은 없다. 고로 공식적인 시퀄뿐만 아니라 외전과 프리퀄 역시 확장 연결의 강도가 높아진 결과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직접적인 후속편이란 점에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은 확장 연결로서의 방향이 크다) 한편 평행 연결은 “이야기의 새로운 연쇄 상태를 구축”하고자 하는 점에선 확장 연결과 유사하나, 원전의 요소 및 설정에 내포된 가능성을 새로운 배경 속에서 재활성화하기-즉 다른 방식으로 향유되도록 하기를 목적으로 삼는 유연한 힘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가지며, 주로 리부트나 스핀오프, TVA에 기반을 둔 극장판 같은 개념에서 그 강도가 높아진다. 직접적인 연결성은 낮지만 매드 무비나 동인지같은 팬들의 2차 창작도 함께 거론하는 게 가능할 터이다. (코믹스(19942013)와 신극장판(20072021)은 기본적인 캐릭터와 설정만 공유하는 평행 연결의 방향이 크다)
앞서 말했듯 여기서 제안한 모델들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고, 웬만한 속편들이 확장이면서 수축이기도 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 하나 혹은 복수의 작품 속에서 서로 교착하고 대결하며 내러티브의 성질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가장 성공한 프리퀄 기획 중 하나인 ‘엑스멘 비기닝 시리즈’를 떠올려보자. 원래 새로운 시리즈를 위한 리부트였던 <엑스멘: 퍼스트 클래스>(2011)가 후속작의 감독 브라이언 싱어의 아집 때문에 온갖 모순에도 불구하고 ‘사후적으로’ 모든 엑스멘 시리즈의 프리퀄이 되었을 때, 그리고 싱어가 그 후속작인 <엑스멘: 다가올 과거의 나날>(2014)에서 프리퀄과 시퀄의 성질을 통약가능한 것으로 뒤섞고 작품을 모종의 최종장으로 만들었을 때 이 모델들은 자신의 유동성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증명한다. 이 예시가 너무 과하고 소수만의 것으로 느껴진다면 좀 더 복합적인 대상들을 열거할 수도 있다. 오시이 마모루의 <시끌별 녀석들 2: 뷰티풀 드리머>(1984)는 원전인 만화/TVA <시끌별 녀석들>의 평행 연결로서의 극장판을 표방하고 있으나 (자기-)비판적 태도를 전면화해 원전을 간접 결산 지으려 한다는 점에서 수축 연결의 방향을 은연중에 가진다(TVA의 총감독이기도 했던 오시이 마모루는 <뷰티풀 드리머>의 개봉으로부터 불과 약 한 달 이후 TVA의 총감독직을 내버렸다). 영국의 저 유명한 <닥터 후>(1963~)처럼 몇 세대를 관통할 만큼 오랜 기간 시리즈를 이어온 작품이라면, 팬심으로 자기만의 설정을 짜고 팬덤 안에서 소규모로 유통시키던 이들이 훗날 공식적인 원전의 작업에 참여해 평행 연결을 확장 연결로 변이시킬 수도 있다.
<신 의리없는 전쟁>(19741976)이나 <매드 맥스>(1979) 시리즈는 매 후속작마다 세계관의 리부트를 거듭하는, 사실상 별개의 작품 간의 느슨한 묶음이지만 종종 (주로 팬서비스를 위한) 전작에 대한 기시감을 연출함으로서 작품들에 확장 연결의 방향을 부여하곤 한다. 여기서 확장 연결의 방향이 더 커진다면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인간희극부터 오버플로우의 토마루 월드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이르는, 개별 작품들을 포괄하는 모종의 세계관을 구축하려는 시리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 대다수는 캐릭터들 사이의 크로스오버 정도로만 성립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흔하디흔한 설정 충돌을 생각해보라) 한편 이런 힘의 모델들의 연계를 급진적으로 사유하고 활용한 사례로는 단연 데이빗 린치의 <트윈 픽스: 귀환>(2017)을 들 수 있어, 이때 트윈 픽스라는 허구적 장소는 세 가지 모델이 동시에 비슷한 세기로 작동하며 서로 다른 시간성이 그 어느 때보다 무차별적으로 교차하고 중첩되는 장이자, 동시에 그것의 자제 없는 자율성의 인상이 억제하던 통약불가능성이 전면화되어 주체에 무한한 혼란을 가하는 장으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아신전>은 어떤가? 여기에선 이전의 메인 플롯과 다가올 메인 플롯에 직접 긴밀히 접속되는 프리퀄로서 확장 연결의 방향과, 우리가 아는 <킹덤>의 배경에선 생경한 맥락을 다루는 스핀오프로서 평행 연결의 방향이 팽팽하게 대결한다. 당연히 프리퀄과 스핀오프가 온전히 한몸일 수는 없(지만 그런 역설은 앞선 <엑스멘>의 비유에서처럼 무수히 일어나)고, <아신전> 역시 ‘하여튼’ 프리퀄이긴 하나, <아신전>을 프리퀄로 봐야 할지 스핀오프로 봐야 할지 헷갈린다는 시청자들의 반응은 여전히 쉽게 찾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문제는 ‘갑자기’라는 시점에서 아신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타이밍에 있다. 그 타이밍이 평행 연결의 방향을 소진시키는 대신 유지시켜 작품의 위상이 뒤틀리고 애매해진다. (충무로에서 사람들의 입과 귀를 오가는 어떤 소문이 있다는 건 나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온전히 그것에 기반해 작품을 설명하려 들어선 안 될 터이다) <아신전>의 내러티브의 성질에 대해 정확히 알기 위해선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더 넓은 생태계 속에, 보다 정확히 오늘날의 웹소설의 흐름과 <아신전>을 대질해보면 어떨까?
사실 <아신전>에 있어 친절하다는 수사는 다른 면에도 적용할 수 있다. <킹덤>의, 나아가 장르로서의 좀비물의 선행된 맥락을 아는 이에게 <아신전>이 좀비의 설정을 이용하고 시청자에게 제시하는 방식은 매우 익숙하면서 설명적으로 비춰질 터이며 <아신전> 역시 스스로가 그렇게 인식되길 바란다(어린 아신이 생사초를 발견할 때 절로 긴장하게 되는 우리). 세상에 대한 아신의 원한을 축적시킬 요소들은 아신과 너무나 절묘한 순간과 장소에서 착실하게 마주친다(지난 세월 동안 몇 번을 오갔을 파저위의 본거지를 다시 한 번 염탐하다 ‘하필’ 그 타이밍에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를 만나는 아신). 조선에 대한 아신의 첫 복수는 아주 완벽하게 실현되어, 아신이 마치 초월적인 존재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아신은 단 한 순간도 당황하지 않고 느긋하게 살육을 감행한다). 그러면서 좀비라는 설정은 여기서 아신의 복수, 아니 복수하는 아신을 구축하기 위한 담보물이 되어간다. <아신전>과 오늘날의 웹소설을 한 손에 담을 수 있다면 이 다면적인 친절함이 그 이유일 것이다. 장르와 내용을 분간할 수 있는 요소들이 직설적으로 명시된 제목, 단순화된 플롯과 묘사, 높은 밀도의 대리만족, 종종 당황스러울 만큼 전면화된 채 다뤄지는 클리셰들, 못해도 독자만은 알게끔 하는 서사 내적인 정보 통제는 웹소설의 주된 전략이 된 지 오래다.
다만 이 친절함이 모두에게 온전히 열려있는 건 아닌데, 예컨대 <내 최애는 악영영애>,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 <데뷔 못 하면 죽는 병에 걸림> 등 장르화된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 코드의 인기작들이 이 장르의 클리셰들에 대한 숙지를 독자 앞에 문턱으로 세우는 것을 떠올려보자. 이 문턱은 이전에 ‘소설’이나 ‘영화’ 앞에 붙던 접두사 ‘장르’의 그것보다 더 높아, RPG 게임 이후의 판타지 소설에 대한 리터러시가 부족한 독자가 ‘상태창 UI는 대체 누구로부터 주어지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순간 어떤 대화도 진전될 수 없게끔 만든다. 세계관, 전생을 하게 된 연유, 행위의 개연성에 대해서도 당연히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이런 정도의 문턱이 어째서 충분히 허용되는가? 세세한 설명은 이 이전의 문화에서 다 해놓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문화적 생산물이 데이터베이스에 과도할 만큼 방대하게 축적되어있고 몇 개의 링크만 거치면 그것들(에 대한 요약)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작품 안에서 설정에 대해 굳이 더 설명하고 또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는가? 소위 ‘사이다’(답답한 전개 끝에는 반드시 일거에 해소해야하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웹소설 특유의 장르 구조) ‘히전죽’(‘히로인 되기전에 죽입시다’의 준말. 주인공의 행보에 방해가 될만한 히로인을 사전에 차단하여 감정이나 인간관계의 요소를 최대한 줄이는 웹소설 문법)등 대리만족의 과도한 추구에서만 (‘회방환’ 코드에서 과시적으로 육화되는) 오늘날의 웹소설의 특징을 찾는 게 글러먹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어, ―애초에 대리만족의 추구가 주가 아닌 이야기 문화가 인류에게 얼마나 있었나?― ‘회빙환’ 코드에는 세계관 설정과 개연성에 대한 설명을 축약하(면서 조금씩 변주할 수 있)는 유용성과, 코드에 대한 선행된 숙지와 이해라는 대가성이 공존한다. 작품 바깥의 서사와 맥락을 가시적으로 전제하고 암시하고 거기에 의존하기. 앞서 제기한 모델들을 다시 끌어와 말하자면, 이러한 웹소설들은 기존에 축적된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평행 연결이자 확장 연결로서의 파생작이기를 자임한다. 물론 이때의 데이터베이스는 (모더니즘 문학이 신화와 고대 문학을 패러디했던 것처럼) 지식과 비판의 조건이 아닌,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한 패스티쉬의 조건으로서 작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대로 물어보자. 오늘날의 웹소설의 조건이자 동시에 웹소설이 승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듭 말하건대) ‘사이다’이기 이전에 주어진 형식에 대한 불신일 것이다. 상품과 정보가 과포화의 수준으로 쌓인 데이터베이스, 그것을 다루는 (히토 슈타이얼이 리모트 컨트롤-응시라 부른) ‘전지적’인 수준의 자율적 정보 취합 방식은, 픽션을 구축하는 형식이 주어진 그 자체로 설득력을 갖고 성립될 수 있다는 고지식한 믿음이 보편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한데 문제는 오늘날의 거의 모든 웹소설이 믿음의 불가능에 대처하는 데 있어 지식이 특권화했던 윤리, 자신의 눈앞과 발 밑에 있는 ‘실재’의 상태를 직면하는 방법을 개발하려 애쓰는 윤리를 추구하는 대신 (창작자든 소비자든 간에) 데이터베이스를 자연화하고 거기에 몰두함으로써 믿음의 불가능을 대체하려는 지극히 세속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제 성질을 갖춘다는 데 있어 ―<소설 속 엑스트라>처럼 소설/만화/게임 등 극중극의 엑스트라를 주인공으로 삼는 웹소설들을 떠올려보자― , 여기서 우리는 ”‘형식’에 대한 과소몰입을 하나의 증상으로 마주하”며 이 증상을 겪는 작품들은 ”형식에 대한 지독한 불신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형식 속에서 거주하고 있다.”(민경환, 「세모나 네모로 얼룩을 번역하시오」) 요컨대, 웹소설로 넘어왔을 때 우리는 (켄달 L. 월튼의 저 유명한 책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 ‘믿는 체하기’가 더 이상 고스란히 성립될 수 없는 환경에서도 ‘믿는 체하기’를 실행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곧 풀어헤쳐진 현실감각의 주조라는 난관. “장르와 내용을 분간할 수 있는 요소들이 직설적으로 명시된 제목, 단순화된 플롯과 묘사, 높은 밀도의 대리만족, 종종 당황스러울 만큼 전면화된 채 다뤄지는 클리셰들, 못해도 독자만은 알게끔 하는 서사 내적인 정보 통제”, 곧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평행 연결이자 확장 연결이기를 자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시장친화적인) 세속적 대답이다.
“<아신전>과 오늘날의 웹소설을 한 손에 담을 수 있다”는 말을 이쯤에서 다시 고려해보자. 당대에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평행 연결이자 확장 연결이기를 자임”하는 것은 웹소설만의 문제는 아니며 ―정확히는 웹소설이 이 문제를 가장 즉각적이고도 가시적으로 겪고 있는 양식일 것이다― 이와 연동하는 일이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물론 “일종의 거대한 블랙홀, 혹은 ‘쓰레기 하차장’과 같은 위상을 부여받고 부상한” 개념어로서의 ‘콘텐츠’.(곽영빈, 「먼지와 기념비 사이의 ‘콘텐츠’: 오디오비주얼 이미지의 진동」) 혹은 캔슬 컬쳐나 역할 바꾸기같은 정치적 올바름의 전략들은 방법론이기 이전에 하나의 징후라 해야할 게다. 이 안에서 <아신전>의 친절함, 특히 ‘갑자기’ 아신을 완전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킹덤>의 재난의 근원도 다 알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의식, 소위 유기적인 연결이 아니라 애매하고 뒤틀린 위치를 감수하고서라도 그 정보를 제공해 <킹덤>에 대해 평행 연결과 확장 연결의 방향 모두를 갖는 <아신전>의 ‘조급한’ 친절한 의식은, 허구적 서사 영상 양식에서도 정확히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가 된다. 돌이켜보면 초기 영화의 큰 줄기는 (짧은 필름 길이와 수동으로 돌려야 작동하는 시네마토그라프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안데르센 동화나 성경의 일화처럼 관객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에 대한 시각적 프리젠테이션의 성질을 띤 바 있어, 오늘날 “‘형식’에 대한 과소몰입”을 겪는 영상 및 ‘콘텐츠’들은 19세기 말에서 건너온 형식의 어떤 가능성의 ‘반복’으로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다만 오늘날엔 자원이 너무 적기 때문이 아니라 자원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취한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