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쉽게 자족하지 말 것

Moxie

여전히 페미니즘은 이 시대를 관통하는 메인 토픽이다. 이 물결에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몸을 맡기려 할 때면 예기치 못한 질문들이 너울처럼 급습해온다. 매일 꾸준한 업데이트가 요청되고, 그만큼 수시로 의심하고 확인해야 할 주장도 늘어난다. 이 문제question 앞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해야 할 것이다.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은 기성 작가가 아닌 일반 개개인이 여성주의나 질병을 비롯한 다양한 문제를 발화하는 성장 서사가 범람하는 현재를 진단하며 이들이 ‘쉬운 책’으로 그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밝힌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하다 보면, 타인과 고통을 경쟁하기 쉽고 자기도취의 유혹도 찾아온다”고 말한다. 여기에 그는 김현미의 통찰을 덧붙인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이나 ‘여성의 경험’만이 진실이고 독점적인 피해라고 기술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피해 경험과 맥락도 해석, 비판, 개입이 필요한 영역이고, 해석, 비판, 개입의 과정에서 자신이 못 봤던 것, 용인했던 것, 남용했던 것을 알아가는 성찰적 과정이 필요하다.” 사실 이러한 통찰은 우리 삶의 지침으로서 더욱 폭넓게 요구되어야겠지만, 앞서 정희진이 자전적 에세이의 경향에 관해 말한 대로 영화의 영역에도 꽤 적용할 만하다. 이것은 내가 〈걸스 오브 막시Girls of Moxie〉(2021)라는 다소 평이하고 몰개성적인 작품을 왜 선정했는지에 관한 변론이기도 한데, 이 영화는 (보수적인 장르로서) 하이틴이라는 외피를 지닌 채 작금의 가장 전복적인 의제인 페미니즘을 테마로 채택했기 때문이다. 여성의 연대 하나만을 달성하기 위해 목적론적인 전개를 펼쳐나가는 이 영화의 맹점을 최근의 고민과 함께 접합해볼 수 있는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걸스 오브 막시〉의 감독은 에이미 폴러다. 〈퀸카로 살아남는 방법〉(2004)에서 전교생의 선망과 질시를 동시에 받는 레지나의 다소 독특한 엄마로 등장했던 에이미 폴러는 오랫동안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발언해온 배우이다. 그러니 자신의 두 번째 연출작의 주요 소재로 페미니즘을 가져온 것은 그동안 그의 행보와 현재의 기류가 적당히 맞아떨어진 결과로 보인다. 에이미 폴러는 아마도 이 프로젝트를 통해 2020년대의 ‘mean girls’를 재창조하려 한 것 같다. 외모를 한껏 치장하고, 지식과 도덕이 결여된, 게다가 남자 때문에 싸우는 〈퀸카로 살아남는 방법〉의 여자 청소년들이 있었다면, 지금의 그들은 이전과 같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 분기점에 페미니즘이 있다. 그러나, 그래서 영화는 하이틴이라는 장르를 벗어나지 않는다.

간혹 〈주노〉와 〈월플라워〉, 〈북스마트〉처럼 약간의 방향을 튼 영화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하이틴은 할리우드의 해피엔딩이 정점으로 소화될 수 있는 장르일 것이다. 〈걸스 오브 막시〉 또한 하이틴이라는 컨벤션이 단단한 방패막으로 작용하기에 이 영화를 비판하는 건 한편으론 허공에 주먹질을 하듯 난감한 일이다. 영화는 오프닝에서부터 정체성을 여실히 드러내며 자신을 소개한다. 캠퍼스 앞에 주차된 스포츠카와 셔틀버스,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남학생들, 사물함이 일렬로 놓인 복도에서 시끌벅적하게 수다를 떠는 여학생들이 트래킹 숏으로 담기는 익숙한 장면들. 〈걸스 오브 막시〉는 새 학기의 풍경을 알리는 관습적인 이미지를 통해 하이틴 무비의 전형을 관객에게 선명하게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걸스 오브 막시〉는 하이틴이라는 표면을 걸치고도 페미니즘이라는 테마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가? 이 질문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선 일차원적인 목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연대를 고무하기 위해 많은 매체에서 취하는 간편한 태도가 〈걸스 오브 막시〉에도 의심 없이 반복된다. 〈걸스 오브 막시〉는 소위 임파워링empowering에 유용한 방식을 채택하여 극을 진행한다. 영화는 현 시대의 여성주의와 관련해 가장 대중적이고 잘 알려진 이슈들을 거론하면서, 그로부터 예상되는 논쟁에 따를 명확한 정답을 마련해두고 이를 다급하게 나열할 따름이다. 예컨대 여성의 노출을 성범죄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복장 규제에 관한 이슈를 하나의 일화로 삽입하고, 흑인 여성의 신체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언어를 전복하는 대사들을 몽타주 시퀀스를 통해 유려하게 등장시키며,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아시안 소녀가 모범적인 학교생활에 집착하는 이유 같은 것을 꼬박꼬박 플래그로 표시해둔다. 이러한 재현이 나쁘다기보다는 이를 모두 지지부진하게 훑고 지나갈 뿐이라는 점이 실망스럽다. 마치 투두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나가듯 차례차례 처리해나가는 형국인 셈이다. BLMBlack Lives Matter과 퀴어 이슈를 계산하며 다양성을 ‘노출’시키는 데 골몰하다 영화가 도리어 빈약해진 사례이다(심지어 기후위기 이슈까지 고려해 ‘지속 가능성’이라는 문구까지 대사에 적용한다). 이것도 저것도 넣었으니 웬만큼 했어! 그리하여 하이틴이 지닌 최적의 조건으로서 학교라는 장소는, 그리고 그 안에서 대면할 수 있는 다양성이라는 아이디어는 제대로 의미화되기는커녕 오히려 희석되고 만다(이 점에서 주홍글씨라는 소재 하나만으로 극을 이끌어간 〈이지 A〉의 선택이 더 참신해 보인다).

‘막시(moxie, 용기)’라는 페미니스트 클럽이 창단된 계기 또한 충동적으로 보인다. 그 첫 지점에는 주인공이 처음부터 파워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게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순종적인 성향의 모범생이라는 전제가 자리한다. 비비안은 미첼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전학생 루시에게 조언을 하러 다가갔다가 예상치 못하게 당당한 답변을 듣고는 당황한다. 그는 아직 교내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문제들에 별다른 견해가 없거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레 체육관을 박차고 나와 막시 팸플릿을 만드는 데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것이 아무리 여학생들을 줄 세우는 부박한 리스트 때문이라 하더라도 매우 헐겁고 작위적으로 이뤄진다. 비비안은 그 리스트의 존재를 일찌감치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영화는 비비안이 이 결단을 이행하는 개연적인 기제는 생략한 채, 앞서 언급한 대로 목록화된 활동들을 화려하게 진열하기 위해 훌쩍 앞서 나간다.

무엇보다 〈걸스 오브 막시〉를 구성하는 가장 큰 준칙은 의아할 정도로 순진한 믿음 위에 서 있다. 적어도 같은 여성이라면 손을 맞잡고 연대할 거라는 무구한 근본주의가 기저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영화가 인물 간의 갈등이나 불협화음을 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비비안은 막시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은 절친 클로디아와 소원해지고, 홧김에 내뱉은 말 한마디로 루시와도 어색해진다. 설상가상, 켜켜이 쌓인 문제로 인해 엄마와도 언쟁을 벌인다. 물론 교내의 모든 여학생과 교장 선생과의 대결 구도도 있다. 하지만 결국 영화는 모든 문제를 하이틴 플롯에서 쉽게 겪을 법한 것으로 격하시키고 인물들을 연대라는 하나의 중심으로 포섭해버린다(딱히 제대로 된 결말이 주어지지 않은 교장 선생과의 일화는 다양한 맥락을 위해 남겨진 게 아니라 끝내 어떻게 봉합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유야무야된 사례로 보인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동원되는 지지대가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동일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 난점이다. 그 점에서 여자 화장실이 막시 활동을 발아하게 만든 장소라는 점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화장실에서 뒷담화를 엿듣는다거나 은밀한 정보가 교환된다는 등의 설정은 하이틴에서 무수하게 등장해온 컨벤션이라는 보호를 받고, 그렇게 영화는 동일성에 기반해 여성이라는 개념을 역설하면서 도리어 남성이라는 대립항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아이러니를 발생시킨다. 〈걸스 오브 막시〉는 여성을 (남성에 대한) 피해자의 자리로 수렴시키는 자가당착에 오랜 시간을 할애하느라 여성주의적 반격을 시도할지언정 궁극적인 사유의 전환을 일궈내지는 못한다.

미첼의 성폭력 전력이 드러나는 결말부는 영화에서 제일 미심쩍은 대목이다. 미첼은 완벽한 괴물로 규정되고, 이를 폭로하기 위해 동원된 엠마라는 인물은 서사 내에서 거의 등한시된다. 지극히 대단한 용기를 보여준 엠마의 행위는 극 내부에서 공동의 환희를 위해 희생될 뿐이며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는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교장 선생이 교실로 달려와 미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전부인가?). 이는 ‘우리’의 승리를 더욱 명징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고, 그 뒤편에 피해자가 직접 얼굴을 보이는 당사자의 발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끔 만든다. 그래서일까, 〈걸스 오브 막시〉는 손쉬운 자족으로 똘똘 뭉쳐 있는 듯하다. 역전을 위한 역전, 가시화를 위한 가시화는 타당할까. 함께 고무되길 기대했지만 마뜩잖은 질문들만 늘어나 찜찜함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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