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와 오판, 오작동의 오락

Squid Game

0.

아직도 그 그로테스크한 가스펠이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지겨울만도 하건만 여전히 TV와 유튜브에선 “이러다 다 죽어”와 “깐부잖아”를 패러디하고, 그것도 모자라 몇몇 대형 유튜버들은 게임 자체를 재현하기도 한다. 사소한 사례들을 나열했지만 <오징어 게임>(2021)에 쏟아진 이런 압도적인 관심과 거기서 파생된 코스튬, 놀이문화, 관광 등 2차 창작의 연쇄는 다소 유행이 지난 지금 돌이켜봐도 센세이셔널한 사건이다. 아즈마 히로키가 라이트 노벨의 세계를 파헤치며 소비자와 창작자의 영토가 무한히 뒤엉키는 문화적 양상을 ‘동물화하는 포스트 모던’이라고 이름 붙인지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대자본이 순환하는 넷플릭스 시장에서, 그것도 B급 장르의 불모지였던 한국의 작품이 이 같은 현상을 일으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물론 뒤늦게 <오징어 게임>의 화제성을 열거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이 공개됐을 당시에도, 이후 열풍을 일으켰던 태풍의 한 가운데에서도, 그리고 변화무쌍한 트렌드의 바람에 금세 생명이 꺼져가는 듯한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의구심이 남아있다. 작품의 안과 밖의 사이에서, 그에 대해 짧게 말해보려 한다.

1.

과장을 보태 말하자면 2021년 9월과 10월의 지구는 ‘깐부’라는 옛말과 세모네모 같은 기호, 456이란 숫자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키워드를 빼놓고는 오롯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넷플릭스가 시청통계를 공개하지 않기에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파생상품들, 영문도 모른채 매출이 급상승한 ‘깐부 치킨’, 아마존과 이베이는 물론, 동남아와 중남미의 전통시장에까지 깔려있는 코스튬 등은 그 영향력을 방증한다. 물론 이는 분명 놀랄만한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기현상은 아니다. 선풍적 인기를 구가한 콘텐츠가 각종 파생상품으로 몸집을 불리거나 외형을 바꾸는 것은 시장에서 생명을 이어나가기위한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90년이 넘는 시간동안 세계 곳곳의 디즈니랜드에서 인형과 인형탈, 갖가지 캐릭터 상품과 기념품으로 끝없이 변신하는 미키마우스를 보고 있지 않나. 그러니 여기서 문제는 현상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 이상한 것은 그 현상을 낳은 작품이 바로 <오징어 게임>이라는 점이다. 말장난 같겠지만 정말로 그게 이상하다. 방금 전 미키마우스를 언급했지만, <오징어 게임>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해리포터>시리즈와는 전혀 다르다. 혹은 <오징어 게임>은 마블의 작품과도 다르고, 무엇보다 애초에 그들처럼 되길 바라지도 않는다. 말인즉슨 <오징어 게임>은 판타지로서 환상적 세계관을 전시하는데 유별난 관심을 지닌 작품도 아니고, 범지구적 질서와 윤리를 웅변하며 정의와 보편을 수호하려는 작품도 아니란 얘기다. 그보다 <오징어 게임>은 오히려 그 반대편에서 그런 작태들을 비웃고 싶어하는 쪽에 가깝다. <오징어 게임>은 사회적 부조리와 계급적 아이러니를 장르로 내면화해 그 냉소적인 은유를(그것의 만듦새나 성공여부와는 별개로) 보는 이에게 전하려 애쓰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오징어 게임>은 할로윈데이 어린이의 코스튬 대상으로 삼기엔 너무 날서있고, 너무 반사회적이며, 결정적으로 작품 스스로가 그렇게 소비되길 원치 않는다. 그런데 모종의 보편성을 표방하지 않을뿐더러 되레 그것을 냉소하는 <오징어 게임>이 도대체 어떤 이유로 대중 일반에게 그토록 압도적 지지를 얻고, 온갖 방식으로 재전유되고 있는 걸까? 예컨대 기이한 핑크색 차림새로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총을 난사하는 진행요원과, 그들을 기상천외하게 모방하고 희화화하는 사람들의 감상 사이에서, 이 ‘괴랄한’ 접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2.

<오징어 게임>과 그 바깥의 괴리. 그러니까 당신과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멀어진걸까? 뜬금없는 말이지만 이게 바로 <오징어 게임>과 우리 사이에 자리한 딜레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자. 성기훈(이정재)이 (명백히 쌍용을 암시하는)자동차회사 해고노동자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1-2화에서 그가 왜 철부지처럼 자기 자신과 주변을 돌보지 못하고 삶이 망가졌는지가 어느 정도 납득되면서 성기훈이란 인물이 입체화되기 시작한다. 아니 그보다 더 이전, 2화에서 알리(아누팜 트리파티)와 새벽(정호연) 등 주요 참가자들이 처한 현실적 곤경이 묘사되는 순간, <오징어 게임>은 피 튀기는 슬래셔 액션의 외투를 벗고 우리가 발디디고 선 현실과의 접점을 마련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자. 정말 그런가? <오징어 게임>의 직접적이다 못해 투명할 지경인 이 직유들이 정말 세계의 거울로 기능하는가? 물론 영화와 현실 사이의 징검다리 속엔 복합적 요인들이 엉켜있기에 단순히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아무리 성기훈의 지난 역사를 알게된들, 그의 순진하고 무책임한 성격과 거기서 비롯된 무작위적이며 우연적인 행동들이, 즉 성기훈이란 인물의 총체가 도저히 사회적 알레고리로 읽히진 않는다. 요컨대 인물과 세계의 부정교합. 그러니 다시 묻게 된다. 당신과 나는 어디서부터 멀어진걸까? 앞서 <오징어 게임>이 사회적 부조리와 계급적 아이러니를 장르로 내면화하고자 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작품은 그런 알레고리 생성에 명백히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오징어 게임>의 아스트랄한 살인 게임과 거기에 설치된 몇몇 현실의 조각들 사이에서 되레 그 틈새가 다 들여다보이는 얼기설기한 봉합을 목격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진짜 문제는 만듦새에 대한 판단이 아니다. 그보다 정말 이상한 것은 장르와 현실의 괴리가 빤히 보임에도 놀랍도록 그에 무심한 사람들의 열광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오징어 게임>이 유려한 만듦새로 진중한 메시지를 던지든, 속을 빤히 내비치며 구태의연한 말을 늘어놓든, 그런 건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달고나’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열광한다. 문제는 이 열광 속에 작품이 의도했던 사회적 은유들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오로지 유희적 소비의 매트릭스만이 무한증식한다는 점이다. 즉 사람들은 <오징어 게임>에 무심하면서 역설적으로 그에 열광한다.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오해한걸까? 작품과 작품을 본 사람들은 언제부터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3.

여기에 답하기 위해 잠시 돌아가보자. 나는 <오징어 게임>을 처음 보고 이상한 향수를 느꼈는데, 마치 실패하고 철지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는 느낌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트랜스포머> 시리즈 이후의 마이클 베이를 보는 것 같은 기분. 무지막지한 파편화와 서사 분해. 그 속에서 메세지는 외투 하나 걸치지 않은 날것의 상태로 내던져지고, 이미지와 내외하는 것만 같은 어색한 모양새를 이룬다. 또 대중 일반을 겨냥하며 이미지와 매끄럽게 결합해야할 내러티브는 덩그러니 멀뚱한 상태여서 오히려 보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한다. 말하자면 장르와 이야기, 그리고 어떤 세계를 담고 있는 총체여야할 ‘이미지’의 역량을 믿기보다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신봉하는 양 모든 시각적 감흥을 나노분해해서 부품화하는 모습. 궁극적으로 말초적 자극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전하지 않고 싶어하는 것 같은 결연함 말이다.(오해 없길 바란다. 다소 자극적으로 썼지만 나는 마이클 베이의 이 앞뒤 없는 태도에 서린 시각적 난장을 즐기는 편이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은 이 이미지의 카니발리즘과 현실적 발디딤의 사이에서 길을 잃고 미로에 갇힌 것 같다. 성기훈을 비롯한 각 인물들은 (슬래셔 판타지라는)장르와 (경쟁과 승리라는)이야기, 그리고 (계급이라는)정치적 메타포의 사이에서, 그 접촉면을 횡단하기보다 마치 계량컵에 담긴 재료처럼 정해진 영역을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하여 <오징어 게임>은 사회적 은유가 되고자 무던히 애를 쓰지만, 역설적으로 그럴 수록 그 표면은 더 위악적으로 변하고, 더 우스꽝스러워지며, 점점 더 게임적 자극만을 강화하는 매트릭스에 갇힌다. 결국 우리는 잔혹하기 그지 없는 ‘달고나’와 ‘구슬따기’를 보며 암투와 술책이 난무하는 세상의 축소판을 떠올리기보다, (마치 오일남(오영수)이 그랬던 것 처럼)잊고 있었던 유년기의 놀이에 순도높게 빨려드는 이상한 향수에 빠지는 것이다. 즉 리얼해지고 싶지만 그럴 수록 모종의 과잉만 강해지는 이상한 세계. 이 세계에서 한미녀(김주령)와 장덕수(허성태)는 분명 소름돋는 사기꾼과 카리스마 풍기는 조폭이어야 하건만, 대놓고 ‘나 조폭이오’하듯 초록색 유니폼 위로 슬쩍 올라온 뱀 문신, 매번 경악스러운 뭔가라도 본듯 눈을 한껏 치켜 뜨고 소리를 지르는 표정 등, 그들에게 서린 과장의 아드레날린은 악역인 둘을 기이한 희화화의 지옥에 가둬놓는다. 그리고 그 결과 인물들에게 서려있는 정치적 함의는 분명 눈에 보임에도 보이지 않는 것만 같은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말그대로 정말 이상한 일이다. 탈북자와 불법이주노동자, 조폭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라는, 사회적 함의가 가득하다 못해 넘치는 인물들이 너나할 것 없이 생존난장을 펼치는 걸 보면서도 우리는 거기서 별다른 현실적 자극을 받지 못한다. 그보다 우리는 성기훈이 줄다리기 끝에 떨어졌는지 아닌지가 발생시키는 말초적 감흥에 더 빠져든다. 현실과 장르 사이의 이율배반. 게임으로 현실을 환유하려다 도리어 게임에 중독돼버린, 웃긴데 웃지못할 상황.

4.

비유컨대 <오징어 게임>은 마치 찰리 채플린이 우화적으로 날카로운 정치성을 드러냈지만 지금은 되레 대중 일반에게 콧수염 붙인 얼굴과 슬랩스틱 코미디로만 기억되는 주객전도의 역사를, 괴상한 방식으로 작품 안에서 이뤄내버린다. 채플린에겐 100년이 가까운 시간 속에 쌓인 오해와 망각이 있었지만 <오징어 게임>은 그저 작품안에서 현실을 말했다가, 작품안에서 그것을 삭제시켜 버린다. 자기가 자신을 오해하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외면하는 자가당착의 뫼비우스. 그 결과 우리에겐 표면, 그것도 아주 얇디얇아서 의미가 전혀 담기지 않는 표면의 표면만이 남았고, 우리는 그 표면의 놀이만 끊임없이 소비하며 즐기는 중이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오작동 한걸까. 아니면 어느 쪽이 오해한걸까? <오징어 게임>이 애초부터 철저히 유희만을 염두에 두고 거기에 사회적 알레고리를 더하려다 어색해진 건지, 아니면 그 반대를 의도했지만 철저히 실패한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건 이 유희와 풍자의 교차 속에서 유희가 기형적으로 비대해진 반면 풍자는 너무 초라한 형태로 매듭지어졌다는 점이다. 운동장의 정글짐 처럼 엉성하고 아슬한 놀이의 왕국 꼭대기에 서서 짐짓 모른체하며 현실에 곁눈질 하고 있는 <오징어 게임>을 보고 있으면 웃지도 울지도 못할 괴리가 스며든다. 혹여라도 지금 누군가 구슬따기를 하며 세상의 일그러진 계급구조를 연상하는 이가 있을까? 아니면 혹시 나도 456억을 얻게될지도 모른다고 망상하며 게임을 즐기고 있을까. 물론 양쪽 모두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고, 혹은 둘 다 없을 수 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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