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갱생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러한 불안과 기대를 안고 〈퀸스 갬빗The Queen’s Gambit〉(2020)을 지켜보았다. 내심 중독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우리는 약물, 혹은 술에 의지한 삶을 권장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안다. 그것이 비도덕적이거나 비윤리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상태에서 건강한 삶을 누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중독은 술이나 약물 등 중독 대상에 의존하는 일이자 그것에 완전히 굴복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화나 TV드라마 속 주인공이 중독에 빠져 있다면 그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어떻게든 극복하거나, 반대로 중독에 의해 완전히 망가진다. 이는 그저 장르적 관습에만 기반한 전개만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희망하거나, 우려하는 결말이다.
〈퀸스 갬빗〉의 결말도 우리의 기대에서 비롯하는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부터 안정제에 의지했던 베스는 시리즈의 마지막 승부에 이르러서야 모든 약을 변기에 버리고 자신의 능력으로 승리를 쟁취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이러한 변화가 생각보다 늦게 찾아왔으며, 그 변화의 과정도 기존의 관습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예상했던 첫 번째 변화 시점은 어린 베스가 안정제로 가득찬 커다란 유리병을 끌어안은 채 다량의 알약을 몰래 삼키다가 보육원 바닥에 고꾸라지는 야단법석한 장면이었다. 나는 보육원으로부터 약물을 비롯하여 체스까지 금지당한 뒤에는 당연히 한동안 금단 현상 때문에 고생하더라도 어떻게든 상황을 극복하고 성장하여 그 다음 이야기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안정제에 중독된 베스의 모습은 그 뒤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중독 증세는 베스뿐만 아니라 베스를 입양한 양모에게서도 보였다. 양모는 언제나 술을 가까이에 두던 사람이었으며, 베스는 그런 양모를 유심히 지켜본다. 하지만 양모가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이 시리즈는 중독을 특별히 도덕적 잣대로 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의미심장한 점은, 양모의 죽음이 중독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 베스의 변화 또한 중독 그 자체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모의 죽음을 중독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베스의 변화가 중독은 잘못이라는 ‘깨달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생각은 시리즈 자체에서 비롯한 판단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일상적 삶을 바탕으로 기대하는 것에서 비롯하는 판단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퀸스 갬빗〉은 중독이라는 우려스러운 삶의 양태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을까? 이 시리즈에서 중독이라는 행위가 반복적으로 제시되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나는 이 질문을 통해 〈퀸스 갬빗〉을 들여다보려 한다.
베스는 라이프지와의 인터뷰 자리에서 자신이 체스를 두는 이유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체스판을 자신이 “주도하고 통제할 수 있으며 예측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곤궁한 상황에 처한 친모 밑에서, 아비 없이 자란 베스에게 삶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베스가 통제하고 주도할 수 있는 삶, ‘64칸으로 이뤄진 체스라는 세계’에 이끌렸다는 점은 마치 필연처럼 보인다. 하지만 베스의 중독 상태는 체스 게임의 통제 가능한 속성에 아이러니를 부여한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약물에 의존한다는 것과 체스판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통제 욕망과 의존성이 서로 연결된 심리 상태라는 점을 느끼게 된다. 베스가 먹는 약이 안정제였고 그것이 불안을 달랜다면, 통제 욕망과 의존성의 모순된 결합 또한 통제력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필요해지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베스가 처음으로 환각 상태에서 체스판을 상상하는 장면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베스가 원래 바라본 것은 체스판이 아니라 보육원 침실 천장에 비친 나무 그림자들이었다. 이 그림자들은 고정될 수 없는 유동적 형상으로서 베스의 시각장을 지배한다. 하지만 베스는 안정제 복용 후 그곳을 다른 장소로 변형시킨다. 불안을 야기하는 유동적 형상이 부동적 형상으로 변모하여 안정되는, 체스판과 체스말들의 장소 - 나는 특별히 여기를 공간space이 아니라 장소place라 칭하고 싶다 - 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변형은 마치 베스의 삶을 은유하는 듯하다. 그렇게 부동의 형상으로 나타난 체스판과 체스말은 중력 또한 거스른다. 아니, 정확히 말해 베스가 거주하는 현실 세계의 중력과는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중력의 세계가 그곳에 자리한다. 다시 한번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베스가 견뎌야 하는 삶의 중력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중력이 천장 표면을 경유해 상상되고 작용한다.
그래서 베스는 안정제 유리병과 함께 바닥에 쓰러져야만 했던 것일까? 이 장면은 시리즈의 창작자들이 만들어 낸 최고의 순간 중 하나라고 나는 힘주어 말하고 싶다. 베스가 아무리 전복된 중력을 상상한들,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현실 세계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상된 세계의 중력보다 현실 세계의 중력은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베스의 몸을 바닥으로 끌어당길 것이다.
체스판이 뒤집힌 중력의 장소라면, 베스에게 체스가 어떤 의미인지 독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체스는 베스에게 주어진 유일한 탈출구였다. 보육원 원장의 통제와 구속에서 벗어나는 탈출구이자, 자신을 두고 세상을 떠난 친모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출구였다. 하지만 약물과 체스의 관계처럼 보육원과 친모에 대한 경험과 기억은 서로 모순된다. 한쪽이 통제로부터의 탈출이라면, 다른 한쪽은 자신이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어떤 사태에 대한 기억으로부터의 탈출이다. 다시 말해, 전자가 통제에서 통제 불가로 가는 길이라면, 후자는 통제 불가에서 통제로 가는 길이다. 베스는 바로 이런 모순된 길 위에서 체스말을 옮긴다.
그러므로 체스는 그저 단순한 탈출구가 아니다. 우리는 베스의 침대 위에 새겨지는 체스말의 그림자를 통해 체스가 단순한 탈출구 이상이라는 점을 감각한다. 어린 시절을 지나 청소년기에 한참 접어든 베스는 양모와 양부에게 입양되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 그리고 보육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잠이 들기 전에 천장에서 체스판과 말을 상상한다. 그런데 여기서 체스말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시각화된다. 이전에는 카메라가 체스말과 체스판을 올려다보는 형태로 찍음으로써 그것을 상상하는 베스의 위치에 가깝게 놓여있었다면, 여기서 카메라는 베스를 내려다본다. 체스말의 그림자가 베스를 덮치는 형태로 보여줌으로써 베스의 상상을 재현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림자가 베스를 덮친다’는 표현을 썼다. 사실, 이것은 해석이 아니라 그저 현상에 대한 기술일 뿐이다. 천장에 떠오른 체스말의 그림자가 베스에게 밀어닥친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남근 형상과 흡사한 인상을 준다. 체스말이 남근의 대리적 형상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를 좀더 확장하여 의미화해본다면, 베스에게 체스판 위의 체스말을 통제하는 일은 남근, 혹은 남근에 대한 불안, 남근의 권력, 남자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통제하는 일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이유에서 〈퀸스 갬빗〉은 그저 체스 게임을 극화한 시리즈가 아니다. 우리는 이 시리즈 내내 베스가 각각의 남성들과 특별한 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베스의 첫 번째 남자는 타운스였다. 아니다. 잘못 말했다. 베스의 첫 번째 남자는 친모를 내팽개친, 친부라고 추정되는 어떤 남자였다. 그리고 두 번째 남자가 베스에게 체스를 가르쳐 준, 보육원 관리인 샤이벌이었다. 타운스는 그의 세 번째 남자였다. 우리는 타운스를 시작으로 베스가 본격적으로 이성애적 관계를 맺을 것으로 기대하게 되고, 그 기대감은 해리, 베니로 이어진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체스 그랜드 마스터 보르고프가 베스의 마지막 남자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엔드게임에 이르러 베스는 자신의 첫 번째 남자에 대한 기억으로 되돌아가고, 자신이 그동안 의지했던 약물을 변기에 버린다. 그렇게 최종 승리를 확정 지은 후, 베스는 러시아의 공원에서 베스를 알아보고 환호하는, 아버지와 같은 노인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으로, 마침내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무언가를 벗어버린 듯이 홀가분한 모습으로 다시 체스판 앞에 앉는다. 그러므로 〈퀸스 갬빗〉의 체스판과 체스말, 약물 중독과 통제 욕망은 베스가 남근을 이해하고 통제하며 자기의 주도권을 쥐려는 의식, 그런 집착과도 같은 의식으로부터 마침내 자유로워지는 것과 결정적으로 관련된다. 즉, 그것이야말로 ‘퀸스 갬빗’, 여왕의 책략이다.
하지만 〈퀸스 갬빗〉에서 게임의 맞수는 그저 남자들만이 아니다. 이 시리즈는 베스와 남자들 간의 관계만큼 여성들 간의 관계 또한 비슷한 무게로 다룬다. 그 여성들은 때로 베스를 중독으로 안내하거나 베스에게 좌절을 안기거나, 베스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정작 베스는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는 존재이거나, 베스를 구원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나는 베스가 여성들과 마주한 여정을 다시금 짚으며 이 시리즈의 의미를 되돌아보려 한다. 그 여정 와중에 발생하는 여성들과의 조우를, 특히 졸린과의 조우를 되짚어볼 것이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에 나왔던 유명한 대사만큼 졸린과 베스의 관계를 잘 대변해주는 말은 없을 듯하다. 졸린은 그야말로 베스의 인생을 망친 사람이자 베스를 구원한 사람이다. 그는 베스에게 안정제 복용의 쾌락을 가르쳐 주었고, 베스를 중독으로 이끌었다. 물론 그는 너무 많이 먹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다. 그리고 베스의 중독은 졸린때문이 아니라 여러 주변 상황(가정사, 사회적 분위기)의 탓이었을 것이다. 졸린을 중독의 결정적 책임자로 결코 지목한다면 그것은 졸린에게 너무도 부당한 일이다. 하지만 중독으로 가는 길을 졸린이 (의도치 않게) 고무해버렸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 당시 베스에게 안정제는 딱 필요한 것이었고, 졸린은 중독되기 너무도 쉬웠던 베스의 상태를 활성화하는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베스를 중독으로 안내했다. 그런 그가 시리즈 중반부에 완전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마치 때를 맞추어 나타나길 기다린 것처럼, 베스가 자포자기에 빠졌던 그 순간에 베스를 구하러 온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졸린의 등장으로 안심하게 된다. 이제 베스는 다시 힘을 얻어 보르고프를 상대할 것이다. 그런데 〈퀸스 갬빗〉은 우리의 그런 기대감을 잘 아는 듯이 졸린의 입을 통해 뜻밖의 말을 전한다. “난 네 수호천사도 아니고, 널 구해주러 온 것도 아니야.”
바로 그 뒤로 졸린은 “너한테 내가 필요하니까 여기 있는 거야….. 언젠가는 나도 네가 필요할 거야”하고 말한다. 이 말은 시리즈의 창작자들이 졸린을 구원자로 놓기보다 졸린과 베스의 상호 의존 관계를 강조하려는 듯이 배치된다. 우리가 이것을 시리즈의 후반부 전언이라고 이해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와 경험은 서로 다른 층위에서 벌어진다. 우리가 졸린의 말, 그리고 그 말을 들려주는 창작자의 의도를 수용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졸린은 시리즈의 전개상 구원자라는 위상으로 우리에게 경험된다. 그것은 졸린의 말과는 달리 졸린이 베스로부터 어떤 위안을 얻었는지 재현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졸린의 의도치 않은 제안으로 인해 중독된 베스, 졸린에 의해 구원된 베스를 그동안 지켜보았을 뿐 베스가 보육원을 나온 이후에는 졸린의 이야기를 전혀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인물의 발화에 대한 수용과 믿음, 의미화가 중요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체현된 경험을 올곧이 대변하거나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시리즈에 대한 우리의 체험적 측면에서 어쨌든 졸린은 구원자이면서, 베스의 중독에 (적어도 조금은) 책임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퀸스 갬빗〉은 한 사람이 타인과 맺는 관계적 위상, 그리고 디제시스 내부의 존재론적 위상으로부터 모순성을 드러내고, 그 모순성을 극의 동력으로 삼아 우리를 서사에 몰입하게 한다. 그리고 그 모순성은 베스가 남성들과 맺는 관계가 아니라, 베스 그 자신의 중독과 여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는 단지 이 시리즈를 ‘여성들의 연대’와 같은 것으로 확정짓기 힘들게 하는 동시에, 그 연대의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하는 주요한 지점이 된다. 양모로부터의 영향으로 알코올 중독을 경험했지만 양모가 베스의 중요한 동반자였다는 점, 오랜만에 만난 학교 친구가 여전히 렉싱턴에 머물러 살며 평범한 가정주부가 되었지만 그것 자체가 관습적 통속극에서처럼 어떤 ‘전락’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 베스의 첫 체스 대회 상대 애넷이 베스와 재회한 것에 반가움을 드러냈지만 베스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이 시리즈가 거기서 더 관계를 진전시키지는 않는다는 점과 같은 장면은, 연대의 현실화보다 연대의 양가성 및 가능성만을 슬며시 남긴다. 결국 그러한 양가성과 가능성이라는 것은 베스의 현재와 미래를 확정된 상태가 아니라 유예된 상태에 둔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유예야말로 통제 욕망의 반대편에서 우리가 수용하고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된다. 그래서 〈퀸스 갬빗〉의 마지막 장면은 러시아 남자 노인들과의 체스 게임 직전이라는 유예된 시공간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