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과 상상

Atlanta’s Missing and Murdered: The Lost Children

0.

비로소 여기에 도달한 당신은 아마도 비옽2호의 중심작인 넷플릭스 시리즈 <마인드헌터>를 (일부라도) 보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글의 대상을 <마인드헌터>를 거쳐온 독자로 상정하고 쓴다. 혹시라도 오직 <애틀랜타의 실종과 살인>만을 다루는 글을 찾아오셨다면, 죄송한 말이지만 뒤로가기를 누르거나 <마인드헌터>와 비옽2호의 1부를 먼저 보시길 권한다. 그렇다고 내가 역사와 픽션 사이에서 유달리 새로운 매체적 논의를 하려는 건 아니다. 이 글은 실화와 기록에 대한 역사적 고찰도, 그렇다고 오롯이 픽션에만 눈을 고정한 영화비평도 아니다. 다만 그 틈새와 간격을 오가며, 얼마간 사족처럼, 역사와 다큐멘터리와 픽션이라는 묘한 삼각관계가 안겨주는 감흥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1.

1979년에서 1981년 사이의 미국. 지미 카터의 재선 실패와 로널드 레이건의 화려한 데뷔 사이. 그때 애틀랜타에선 끔찍한 ‘흑인 아동 연쇄 실종 및 살인사건’(이하 애틀랜타 사건)이 발생한다. 총 29명의 피해자가 발생한 이 사건은 40년이 넘게 지난 현재까지도 진범을 잡지 못한 상태로 해결되지 않은 미제 사건이기도 하다. <애틀랜타의 실종과 살인>은 이 미스테리하고 잔혹한 사건을 다각도로 조망하며 그 안팎을 둘러싸고 있는 정황과 사회적 분위기를 그린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지역 경찰과 FBI 요원, 애틀랜타 주민과 기자, 변호사, 피해자의 유족 등,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무수한 사람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이 다큐멘터리는 그들의 회고와 견해를 바탕으로 영상 푸티지와 언론 보도 등을 오가며 사건의 과거와 현재를 담아낸다.

그리고 <마인드헌터>는 알다시피 홀든과 빌이라는 ‘픽션’ 속 FBI 요원들이 ‘실존’했던 연쇄살인마들과 만나 그들을 프로파일링하고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이 서사의 골자다. 시즌2의 중반부, 애틀랜타에 방문한 홀든은 우연히 ‘애틀랜타 사건’을 접하게 되고 이후 이 사건은 시즌이 끝나기 직전까지 홀든과 FBI 요원들을 괴롭힌다. 결국 이 프로파일러들은 웨인 윌리엄스라는 용의자를 검거해내지만 모든 살인 혐의를 완벽히 밝히지는 못한 상태에서 발을 빼게 되고, 그렇게 사건이 미결된 상태로 시리즈는 끝을 맺는다.

즉 실제 ‘애틀랜타 사건’과 <애틀랜타의 실종과 살인> 사이에는 40년이라는 시차와 불완전한 진술, 불충분한 기억, 연루된 이들 저마다의 입장 차가 자리하고 있으며, <애틀랜타의 실종과 살인>과 <마인드헌터>의 사이에는 실존 인물들과 홀든과 빌이라는 픽션적 인물 및 서사가 자리하고 있다. 요컨대 어떤 비극, 그리고 그에 대한 기억과 기록,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상상과 이야기가 이 매체적 간극을 횡단하고 있다. 그런데 기묘한 점은 잔혹한 사건에서 출발한 이 다종다양한 얼굴과 말들을 마주하면서, 오히려 사건의 진실이 점점 더 모호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29명의 사람이 살해당했고 용의자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표면상으로 완결된 듯 보이는 ‘정의’는 언제나 복잡한 이면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2.

웨인 윌리엄스는 정말 잔혹한 사이코패스 살인마일까? 나는 이상하게도 흉악한 연쇄살인 용의자를 등장시키는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보면서도 그에게서 괴물 같은 인상보다 오히려 미묘한 차분함을 느꼈다. 물론 이 글에서 판사라도 된 양 범인을 가려내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인드헌터>와 <애틀랜타의 실종과 살인>을 거친 후 이 딜레마를 떠안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각각의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지나면 ‘애틀랜타 사건’을 둘러싼 모든 것은 확실하지 않고 안개로 가득 찬다. 여기엔 당시 애틀랜타라는 도시가 가진 산업적인 발전 가능성, KKK의 의혹, 인종에 대한 선입견, 어딘가 애매하고 불충분한 증거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애틀랜타의 실종과 살인>은 이 문제를 가능한 세밀하게 나누고 개별적으로 검토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현재의 판결은 의문스러워진다. <마인드헌터>는 사건의 이런 다면성을 서사적 차원으로 확장시켜 작품 스스로가 지니고 있던 장르적 성질에 균열을 가한다. 요컨대 이 기록과 픽션을 통과하며 우리에게 점점 강렬히 감각되는 것은 모종의 불투명함이다. 도저히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 것만 같은 흐릿함. 끝없는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은 느낌.

<마인드헌터>의 홀든은 그간의 경험에 입각해 범인이 흑인이며 경찰을 조롱하고 언론으로부터 주목받길 원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범인을 수면 위로 이끌어내기 위해 피해자 유족들이 참여한 시위에서 퍼포먼스를 시도하지만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한다. 또한 앤서니 카터라는 아이의 수사를 맡은 실제 FBI 요원 마이크 맥커머스는 <애틀랜타의 실종과 살인>에서 앤서니를 살해한 범인이 앤서니의 어머니일 가능성이 높다며 가족범죄의 가능성을 진술한다. 그런 한편 웨인 윌리엄스의 항소 변호를 맡은 론 커비는 웨인 윌리엄스가 혐의를 받았던 루비 지터라는 아이를 살해한 진범이 KKK 간부 중 한 명임을 주장하고 실제로 유효한 증언을 제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듣고 어디에 눈을 두어야할까? 이렇게 범인에 대한 세 가지 상반된 주장—웨인 윌리엄스/피해자의 가족/KKK 단원—을 나열했지만 이외에도 수상한 인물과 정황은 무수하며, 이들은 모두 다른 이야길 내놓는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오가는 이 추측과 추리의 향연 속엔 설득력 있는 주장도 있지만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섞여 있다. 이제 여기에 이르면 진범이 누구인지 찾고자 하는 진실에의 갈망보다 내가 보고 들은 것, 확신하고 있던 것이 모조리 무화되는 혼란스러움이 우리 곁을 더 자욱하게 감싼다. (물론 실제론 범인을 밝히는 일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만) 여기서 범인의 존재보다 중요한 건, 사건을 직시하면서도 그로부터 멀어지는 역설에 갇힌 우리 자신이 된다.

사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대상이 흐려지고 점점 불투명함이 짙어지는 아이러니. 이 아이러니 속에는 복잡한 문제가 관여하고 있다. 애틀랜타는 1970년대부터 흑인들의 사회활동이 확장된 도시였지만, 흑인들 사이에도 경제적 계급이 존재했고 사건의 피해자는 모두 사회의 가장 밑바닥 출신이었다는 점. 사건을 담당하는 경찰은 대부분 백인들이었고 심지어 최초 특별수사본부의 책임자는 한 번도 살인사건을 맡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지역 경찰들 중 많은 이가 KKK 단원이기도 했다는 점. <마인드헌터> 속 홀든은 천의무봉한 탐정처럼 느껴지지만, 실상 당시의 프로파일링은 직관과 직감에 의존하는 추리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 이외에도 우리는 ‘애틀랜타 사건’에 가까워질수록 이전의 추리를 뒤집거나 무용지물로 만드는 무수한 면면과 마주한다.

3.

즉 여태 완결되지 않았고 손쉽게 해결될 수도 없는 사건 앞에서 우리는 분명 눈을 뜨고 있으나 무엇도 뚜렷이 볼 수 없는 인지적 고립에 처한다. 그리고 ‘애틀랜타 사건’을 다루는 이 두 작품은 그 인지적 고립을 스스로 형식적 근간으로 삼으며 불확실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언제나 차분히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애틀랜타의 실종과 살인>을 보든, <마인드헌터>를 보든 어느 쪽을 봐도 용의자인 웨인 윌리엄스는 수상쩍은 분위기를 풍긴다. 게다가 피해자에게서 나온 섬유조직이 그의 집 카펫과 동일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이 확실한 정황증거다. 하지만 누군가를 악마로 매도하는 것은 사건의 정황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나는 여기에 이르러서야 <마인드헌터> 시즌2의 후반부, 홀든이 웨인 윌리엄스를 검거하고 나서도 왜 이전의 범인을 잡았을 때처럼 장르적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악마의 소행으로 단정짓고 결론을 내리면 일은 그만큼 쉬워지겠지만, 동시에 그 속에 서린 복잡다단한 이면을 모두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마인드헌터>와 <애틀랜타의 실종과 살인>은 각자 자신의 형식을 통해 사건에 다가갈 수 있는 최대한으로 나아가지만, 도저히 더 이상 피해갈 수 없는 혼란 앞에 당도하자 카메라를 들기보다 차라리 기록과 이야기를 멈추는 쪽을 택한다. 그렇게 사건에 다가설수록 사건은 점점 더 흐릿해진다. 동시에 우리는 사건으로부터 벗어나거나 외면할 수도 없는 뫼비우스의 띠 속에 갇힌다.

4.

김민우는 이 책의 1부에서 데이빗 핀처가 “흔들리고 있는 세계를 그 자체로 놔두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어떤 면에선 프로파일러의 실패를 세밀히 묘사하는 <마인드헌터>를 보면 동의할 수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어쩌면 핀처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기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마인드헌터>와 <애틀랜타의 실종과 살인>은 우리를 ‘흔들리고 있는 세계’로 초대하고, 우리는 바로 거기서 혼란스럽지만 날조되지 않은, 진실의 작디작은 조각을 발견한다. 그 조각으로 범인을 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어쩌면 아닐 수도 있기에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핀처와 홀든이,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과 우리가 매번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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