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과 관음, 그 사이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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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일러 권일용은 다수의 매체에서 N번방 사건 주범 조주빈이 연쇄살인범의 진화형태라고 설명한 바 있다. 어떤 범죄들은 그 시대 사회의 음습한 틈새를 자양분 삼는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2000년대 이래 우리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이미지 기반의 범죄가 사회 전반에 등장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지 기반의 범죄는 ‘본다’라는 행위와 필연적으로 연관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이 ‘보는 행위’가 사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이루어진다는 걸 미루어 짐작하게 만든다. 과연 그 말대로 우리는 이미지의 홍수에 살고 있다. 발달된 기계를 통해 어디서나 무언가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심지어 영화 안에서만 재현되는 줄 알았던 살해의 현장마저도.

그런 측면에서 <고양이는 건드리지 마라 : 인터넷 킬러 사냥꾼>(이하 <고양이>)은 의미심장하다. 현대의 범죄 뒤에 숨어있는 인간의 속성을 말하기도 하고, 앞서 썼듯이 필연적으로 결부될 수밖에 없는 ‘본다’라는 행위에 대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먼저 보이는 건 <고양이>를 둘러싼 반응이다. ‘전형적인 미국 다큐멘터리’(이 표현도 언젠가 다른 곳에서 생각을 밝혀둘 예정이다)라는, 조롱 섞인 어조로 사용되는 이 장르에는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무엇들이 있을 것이다. 흥미롭고 자극적인 소재, 극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리듬, 분명한 목적성 같은 것들 말이다. <고양이>는 정확히 이 ‘미국 다큐멘터리’의 컨벤션을 따르면서 실제 살해 현장의 이미지를 얹는다. 그러니 윤리적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지적이 그렇게 터무니 없지도 않다. 비록 많이 축소를 했다지만 범행이 실행되는 영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문제와, 범인 어머니를 이용하는 방식의 문제, 무엇보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원초적 본능>과 병치시키며 일종의 반전처럼 제시되는 결말과 비장한 훈계 등을 볼 때 <고양이>가 이런 논란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더 살펴볼 것은, <고양이>는 자신이 받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그 비판의 지점마저도 시리즈의 동력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시리즈의 목적은 분명하다. 그리고 보여주고자 하는 바도 그렇다. <고양이>는 새로운 살인의 유형과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에 대하여 강변한다. 물론 자기과시형 살인마들은 시대와 상관없이 있어왔다. 그러나 <고양이>의 루카 매카티노와 이전의 시대와 다른 점은 관심을 끄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전의 살인자들은 살인 그 자체에 쾌락을 느끼거나 대중이나 미디어의 관심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인정욕, 과시 등)을 채우곤 했다. 그런데 루카 매카티노를 비롯한 현대의 범죄자들은 자신의 채널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 피관음의 대상이 됨으로써 자신이 꿈꿔왔던 대상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루카 매카티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명성을 가지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이내 실패하고, 결국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루카 매카티노의 범행이 아니다. 그의 범행을 둘러싼 일련의 군상과 그에게 범행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존재에 더 집중해야 한다. <고양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SNS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우리는 이제 손쉽게 노출의 주체이자 관음의 객체가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 누구라도 타인을 볼 수 있고 보여줄 수 있게 된 세상 말이다. 시리즈는 바로 그 지점을 주목한다. 미디어 매체를 보는 건 기본적으로 관음의 행위다. 그리고 관음은 일종의 권력적 행위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루카 매카티노의 범죄는 (의도치 않았지만) 그 경계를 무너뜨린다. 우리는 그의 범죄를 보고만 있게 됨으로써, 무엇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낀다. 보고 보여주는 관계, 관음과 피관음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어떻게 ‘보아야’ 햐는가. 우리는 주인공들처럼 어떤 행동이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측면에서 <고양이>가 취하는 태도는 영악하다. 시리즈는 ‘루카 매카티노’라는 공동의 적을 설정하긴 하지만, 범인을 잡는 과정(공교롭게도 이들 역시 부제를 통해 ‘사냥꾼’이라는 칭호를 부여받는다)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 더 나아가 이걸 보는 우리들과도 경계를 흐리는 방식을 취한다. 이를테면 그런 식이다. 루카 매카티노는 관심을 받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다. 그런데 그를 잡겠다고 움직이는 이들은 과연 거기에 자유로운지 되묻는다. 시리즈는 1화부터 그걸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SNS 시대의 순기능이라 할 수 있는 집단지성으로 기존의 사법기관이 해내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해내지만, 이내 자신의 한계 역시 드러낸다. 영상에 있는 부족한 정보를 가지고 저마다의 추측을 하며 게시물을 올리는 행위 역시 그와 본질적으로 별다르지 않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잘못 지목된 범인이다. 범인을 잡고자하는 이들의 선의는 결국 비극으로 (비록 확실한 인과관계가 없다고 부연설명을 하지만) 끝맺는다. 그 과정에서의 광기는 범인이 했던 바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본질로 확실히 연결된다. 이는 3화에서의 어줍잖은 훈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관심을 원하는 뒤틀린 이들에게 관심을 주지마라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며 범인과 시리즈 밖의 모든 이들을 엮으려는 시도는 다분히 오만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와 같은 훈계를 완성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고양이>를 비판(비판도 관심이라고 한다면)하며 던지는 우리의 ‘관심’이 아닌가. 마치 SNS의 폐해를 논하는 글을 SNS에 작성하는 행위와 같다고나 할까. 시리즈는 이처럼 벗어날 수 없는 모순을 함정으로 깔고는 스스로를 마중물로 삼으며 시리즈를 향해 날아오는 비판을 무화시키려 한다. 이런 태도에 찬성을 하던 반대를 하던 하나 분명한 건, 시리즈가 이러한 모순점을 갖고 자신의 메시지를 완성하는 동력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현대의 범죄를 감각하게 된다.

<마인드헌터>의 시대 속 범죄는 ‘누가 범인일지 모른다’가 문제였다면, 지금의 범죄는 ‘누구나 범행에 동참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고양이>는 그 극단에 ‘루카 매카티노’를 세워놓고는 현대인에게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를 직면하게 만든다. 그건 다시 말해 윤리의 반복적인 ‘실패’다.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실패하고 만다. 이 실패는 <마인드헌터>의 주인공들이 겪는 실패와 비교된다. 그들 역시 답(프로파일링)을 알고도 실패하는 운명을 지닌 인물들이지만 오롯이 외력에 의한 실패였다면, <고양이>의 실패는 자기 내면에 의한 실패다. 그래서인지 이 21세기 인터넷 사냥꾼들은 <마인드헌터>의 사냥꾼들과 정반대의 기법으로 범인을 잡으려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과거의 사냥꾼들이 알 수 없는 인간의 보이지 않는 내면을 파헤쳐서 잡으려 한다면, 현대의 사냥꾼들은 드러나는 대로 보이는 모든 외면을 조각조각 분석하여 범인의 정체를 밝히려 한다. 그 과정에서 범행 영상을 수없이 돌려보게 되는데, 그건 일종의 재현이 아닌가. 그 어떤 재현도 필요 없었던 이들과 끊임없이 재현이 필요한 이들 사이의 간극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두려운 건, 모두가 알고 있는 그들의 또 다른 얼굴을, 나는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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