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켜진 현실의 문제

Evil Genius

결국, 영화는 현실을 초과하지 못한다. 아무리 빼어난 통찰을 품은 영화가 있다고 해도 영화가 현실의 레이어보다 다채로울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이 영화의 한계도 아니다. 영화는 늘 어떤 식으로든 현실을 반영해 왔고, 현실에 관한 지각 없이 영화는 생성되지 않는다. 간혹 스크린 밖의 현실을 다시 주시하게 만드는 영화들을 만난다. 아마 다큐멘터리는 가장 그에 직접적으로 부합하는 장르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다큐멘터리를 자주 따라다니는 ‘영화 같은 실화’라는 꼬리표는 매번 의문스럽다(‘현실적인 영화’라는 픽션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 관습적 수사 속에서, 우리는 현실과 영화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이블 지니어스: 누가 피자맨을 죽였나?Evil Genius: The True Story of America’s Most Diabolical Bank Heist>(이하 <이블 지니어스>)의 관람은 바로 그러한 관습적 수사 덕분에 이루어졌다. 흔히 자극적인 사건일수록 장르물의 소재로 발탁되기 쉽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우리가 몰랐던 놀라운 실화를 전제한 이야기의 유혹을 떨치기는 어렵다. <이블 지니어스>는 몸에 사제 폭탄을 달고 약 8천 달러를 갈취한 은행 강도 브라이언 웰스가 경찰과 대치 중에 폭탄이 터져 사망한 사건으로 시작한다. 평범한 피자 배달부였던 그가 죽고 배후는 미궁 속에 남겨졌다. 그 후 피자맨에게 폭탄을 설치한 주동자를 쫓는 10년간의 과정이 펼쳐진다.

그러나 4부작이 끝날 때까지 <이블 지니어스>의 부제 ‘누가 피자맨을 죽였나?‘에 대한 답은 내려지지 않았다. ‘거의’ 확실시된 심증은 있지만 확정할만한 법적 증거는 없다. 한 수사관은 거의 10년째 미결로 남은 해당 사건을 회고하며 “아는 것과 증명하는 것은 다르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이블 지니어스>는 유력한 배후 ‘마저리 딜-암스트롱’과 ‘빌 로스틴’을 사건의 범인으로 적시하지 못했고, 대가를 치르지 않은 용의자는 ‘이블 지니어스’로 남아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된다.

실제 용의자의 음성/영상 기록과 담당 수사관의 증언이 나열된 시리즈의 추적은 꽤 믿음직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다. 관련자들의 음성과 행동이 담긴 진술은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현실 그 자체다. 여기에 많은 거짓이 섞여 있다고 한들 그조차도 어떤 식의 주요한 단서가 될 수 있기에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한 <이블 지니어스>의 전개는 시종일관 눈을 떼기 어렵다. 시리즈의 제작자이자 화자인 트레이 보질리에리는 풍부한 현실의 조각을 동력 삼아 수사관에 버금가는 추적을 이어간다. 게다가 피자맨의 공범 여부를 파악하는 데 매우 핵심적인 증언을 확보하면서 마무리한 <이블 지니어스>의 성과는 실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피자맨을 죽인 범인보다 궁금해지는 것은 결국 <이블 지니어스>가 무엇을 보여주려 했느냐에 있다. 웬만한 잔혹 서사에 제법 단련된 줄 알았던 나는 마저리의 얼굴이 등장할 때마다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다. 넷플릭스에서 제공한 썸네일은 마저리의 웃는 얼굴과 무표정한 얼굴을 절반씩 합쳐, 무표정한 모습 쪽에 검붉은 필터를 씌워 두었다. 젊고 아름다우며 총명했던 과거, 그리고 희대의 살인마로 지목된 시점의 얼굴을 병치했다. 게다가 마저리의 웃음으로부터 무표정의 재소자로 오버랩되는 장면은 오프닝의 끝마다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마치 공포 영화의 포스터처럼 보이는 이 섬찟한 편집 사진은 다큐멘터리 <이블 지니어스>의 장르적 지향을 단박에 요약하고 있다.

어쩌면 <이블 지니어스>에 담긴 ‘영화 같은 현실’을 아무래도 ‘영화가 된 현실’로 고쳐 말해야 할 것 같다. 다큐멘터리는 현실의 조각을 재료로 삼는다 해도(또는 그로 인하여) 그 조각들의 진실성과 무관하게 특정한 함의를 가진 패치워크로 봉합될 우려가 있다. ‘영화 같은 현실’이라는 롤러코스터를 체험한 이들의 탄복은 다분히 열광적이다. 얼핏 이 말은 작품에 보내는 찬사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이 찬사는 현실을 향하고 있다. 정확히는 (극의 구조를 닮은) 현실이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를 모방하지 않으며, 영화를 모방한 현실의 패치워크는 현실을 평탄한 장르의 어휘로 정리하기 쉽다. 이는 ‘1부: 희대의 범죄’, ‘2부: 냉동고의 시신’, ‘3부: 용의자들’, ‘4부: 자백’으로 정리된 각 파트의 성격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깔끔하게 유리된 구성은 서론, 설명, 증명, 결론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며 장르에 삼켜진 현실이라는 혐의에 복무하고 있다.

좀 더 노골적인 증거도 있다. ‘1부: 희대의 범죄’에 가장 먼저 제시된 정보는 ‘절대 평범하지 않은/never what you would call normal’ 마저리의 유년기와 청년기의 요약이다. 한 여성의 독특한 출생과 희대의 범죄를 엮는 손쉬운 결합은 미디어에서 행해지는 전형적인 악마화의 시도다. 이후 은행 강도 사건이 담긴 푸티지 필름이 생생히 펼쳐지고, 폭발물로 인해 가슴이 터져 사망한 브라이언 웰스의 처참한 순간이 드러난다. 푸티지는 폭발물이 터지기 직전에 블랙 아웃된 버전으로 한 번 더 등장한다. 천재적인 악마가 등장하는 스릴러물을 만들고 싶었던 시리즈의 욕망은 결론을 맺는 방식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획득한 모든 단서가 공개된 이후, 폭발 푸티지와 훼손된 시신을 찍은 근접 사진을 기어이 다시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맞붙은 영상은 마저리의 웃는 얼굴에서 무표정의 살인마로 오버랩되는 바로 그 장면이다.

지나치기 힘든 보여주기의 문제를 뒤로하고서라도 <이블 지니어스>에 비친 위악적 인상을 지우기는 어렵다. 웰스의 죽음으로부터 공범의 누명을 다소간 벗게 했다는 본작의 결론에 붙들린 채, 마저리는 ‘이블(evil)‘과 ‘지니어스(genius)‘로 결합된 선연한 캐릭터성을 획득해 간다. 제작자의 집요한 질문으로 얻은 단서들이 충분히 신뢰할만하다는 점에서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고 있다는 진단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블 지니어스>에는 99퍼센트의 심증과 1퍼센트의 물증 사이의 괴리를 메우지 못한 수사의 실패가 마치 마저리를 천재적인 악마로 상정한 다음에야 보기 좋게 봉합되리라고 여기고 있는 작심한 구조가 엿보인다. 그로 인해 끝끝내 혐의를 부정하다 죽음을 맞은 마저리의 최후로부터 촉발된 찝찝함은 4부작의 구조 속에서 얼마간 휘발되어 버린다. 결국 <이블 지니어스>는 수사관도 풀지 못한 웰스의 억울함을 다소간 풀어주었다는 자족적 선량함과, 악마(마저리)의 몽타주를 전시하는 목표를 달성하고서 막을 내린다. 그 과정에서 다큐멘터리는 어느새 빌 로스틴의 혐의에는 관심을 잃은 듯 보인다.

서두에 밝혀 두었던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영화 같은 현실’은 가능한 명제일까. 적어도 이 문장은 영화를 현실의 상위의 심급에 두고 있다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장 속의 ‘현실’을 신뢰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다큐멘터리에서 극적 현실을 목격했다면 감흥의 진원을 재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미 현실은 일일이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혼잡하고 방대한 텍스트다. 현실의 조각이나마 온전히 응시할 수 있을 때, 다큐멘터리의 책임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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