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마약을 파는 법

How to Sell Drugs Online (Fast)

Lesson 1. 맞춤법

<인터넷으로 마약을 파는 법>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넷플릭스의 독일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다. 장르는 코믹 범죄. 10대가 주인공인 성장물의 성격도 있는데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다. 흥미로운 건 지난 해 가장 즐겁게 봤던 이 드라마의 제목을 번번히 <인터넷’에서’ 마약을 파는 법>으로 착각한다는 사실이다. 영어 제목은 <How to sell drugs online (fast)>다. 그러니까 ‘으로’와 ‘에서’ 어느 쪽이든 큰 문제 없는 번역일 텐데(‘으로’가 조금 더 적절한 조사지만) 나는 왜 자꾸 ‘에서’로 착각하는 것일까.

국립국어원 국어대사전을 보자. 조사 ‘으로’에는 12가지 용례가 있다. 그중 위에 사용된 용례는 다음 2가지 정도다.

  1. 어떤 일의 수단, 도구를 나타내는 격 조사.
  2. 어떤 일의 방법이나 방식을 나타내는 격 조사.

반면 ‘에서’에는 6가지 용례가 있으며 그중에서 위에 적용될 만한 용례는 다음 2가지다.

  1. 앞말이 행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처소의 부사어임을 나타내는 격 조사.
  2. 앞말이 어떤 일의 출처임을 나타내는 격 조사.

‘으로’와 ‘에서’의 가장 큰 차이는 ‘으로’는 도구나 방법을 뜻하고 ‘에서’는 장소 또는 이유(출처)를 뜻한다는 점이다. ‘인터넷으로’는 인터넷을 사용하는 주체를 상정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모리츠와 같은 인물. 그가 주체가 되어 도구로써 인터넷을 사용하는 행위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라고 하면 주체는 인터넷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인터넷을 이용해서 마약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인터넷 그 자체다. 인터넷이라는 장소가 행위자로서 중요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시작부터 드라마의 내용이 아니라 제목의 조사 하나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해버렸는데, 어쩌면 이게 내가 하려는 이야기의 전부다. <인터넷으로 마약을 파는 법>은 실존 인물인 독일의 10대 청소년 막시밀리안 슈미트가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해 유럽 최대 규모로 마약을 거래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드라마는 실화와는 매우 다르지만, 기본 로그라인은 대동소이하다. 지질한 10대 청소년들이 어떻게 마약왕이 되는가, 인터넷으로(에서).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면 여기서 중요한 건 10대가 아니다. 이 드라마의 내부를 채우는 것은 영민하지만 자주 봐온 클리셰이고(<오티스의 비밀상담소>, <소셜 네트워크>, <실리콘밸리> 등등이 섞인) 이것은 재미 여부와 무관하게 맥거핀에 가깝다.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담고 있는 껍질이다. 바로 인터넷이라는 껍질. 그리고 이 껍질은 곧 이 드라마를 제작하고 방영한 넷플릭스를 상징한다.

Lesson 2. 정신분석

넷플릭스를 선물이라고 생각해보자. 한정된 영화만 상영하는 멀티플렉스나 터무니없이 불편한 IPTV의 유료 영화들과 달리 새로운 콘텐츠 사이를 무한히 유영할 수 있는 신개념 플랫폼. 넷플릭스와 넷플릭스의 영향 아래 우후죽순 생겨난 OTT 서비스가 아니었다면 코로나 시대의 삶은 피폐하고 삭막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캉에 의하면 선물은 언제나 위험하다.1 특히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은 더욱 그렇다. 라캉은 트로이의 목마를 비유로 든다. 그리스는 트로이에 목마를 선물한다. 그 자체로 텅 비어 있는 무의미한 장식물에 불과한 이 선물 안에는 알다시피 그리스의 병사들이 숨어있다. 트로이가 선물을 받음으로써 그리스 사람들은 그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트로이의 목마처럼 주어지는 선물은 뭘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언어다. “언어는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진다. 하지만 일단 언어를 받아들이면 언어는 우리를 식민화한다. 상징적 질서는 자신을 선물로 공표하기 위해 그 내용을 비워버린 어떤 선물 내지 증여에서 출현한다. 선물이 제공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선물을 받는 순간 준 자와 받은 자 사이에 성립되는 연관 관계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스트리밍 플랫폼이 처음 우리에게 건네는 제안을 생각해보라. 3개월 구독 무료. 플랫폼 계정은 언제든지 해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구독 해지는 가짜 제안이다. “상징적 교환의 가장 원초적인 차원은 거절되기를 요구하는 이른바 텅 빈 제스처다.” 선물은 선택의 자유를 가장한 제안을 통해 우리를 자신들의 질서에 종속시킨다. “한 사회에 속한다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강제되는 것을 자유롭게 수락하도록, 즉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 역설적인 지점을 내포한다.” 이제 당신은 가족, 친구들과 함께 스트리밍 플랫폼의 (비)자발적 구독자가 된다. 그렇지만 사태는 그렇게 우울하지 않을 수 있다. 플랫폼은 트로이의 목마처럼 텅 비었거나 병사들로 가득한 게 아니라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콘텐츠로 가득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극장이나 TV가 대세였던 시절보다 훨씬 더 많은 선택지를 맞이한 당신은 곧 그때보다 더 영화나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심지어 보고 난 뒤에도 보지 않은 것 같은 기분에, 볼 콘텐츠를 선택했지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에 빠진다. 어떻게 된 일일까. 과거에는 TV를 바보상자라고 불렀다. 방송사에서 송출하는 프로그램을 시청자는 수동적으로 보기만 했기 때문이다. 반면 인터넷-넷플릭스는 자신이 원하는 콘텐츠를 선택하는 인터랙티브한 매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젝은 이러한 능동성을 가짜라고 규정한다. 이 행위는 상호작용이 아니라 상호수동성이다. “대상 자체가 나 대신 수동성을 갖는 것, 내게서 수동성을 빼앗는 것, 그래서 대상 자체가 나 대신 쇼를 즐기고 자발적인 향락의 의무에서 해방시켜 주는 상황이다.” 실제로 콘텐츠를 선택하는 주체는 나를 대신하는 넷플릭스 알고리즘이며 심지어 시청도 넷플릭스가 대신한다. 현실의 나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작품을 찜할 뿐이다(또는 오프닝만 잠깐 본다). 찜한 작품이 수십 개, 수백 개가 되는 동안 넷플릭스는 찜한 목록을 정보 삼아 새로운 추천 목록을 제시하고 새로운 작품을 제작한다. 나는 또 다시 수많은 콘텐츠 사이를 방황하며 보고 싶은 작품을 찜하고…. 결국 우리는 소파에 앉아 안락한 수동성에 젖지도 못하고 능동적으로 영화를 보러 가는 것도 아닌, 뭘 해도 찝찝한, 본 것도 안 본 것도 아닌 것 같은 어정쩡한 스트리밍 지옥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Lesson 3. 실화

<인터넷으로 마약을 파는 법>은 주인공 모리츠가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인터넷으로 대량의 마약을 팔고 있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 하나 있어요. 낯선 이에게 그 얘길 하는 거요. 넷플릭스에서 여러분 얘기로 쇼를 만들고 싶다고 연락을 하지 않은 한은요.” 말을 끝낸 그는 웃으며 손동작과 함께 넷플릭스의 오프닝 사운드 ‘투둠tudum‘을 흉내낸다. 그리고 진짜 투둠 사운드와 함께 진짜 드라마가 시작된다.

이 첫 장면은 <인터넷으로 마약을 파는 법>이 실은 넷플릭스 자체를 보여주는 드라마라는 사실을, 인터넷에서 마약을 파는 법을 통해, 인터넷과 넷플릭스가 우리의 대타자이자 질서라는 사실을 예증한다. 매화 반복되는 드라마 속의 쇼에서 모리츠는 이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당신은 현실을 재현한 어떤 외재적인 콘텐츠를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이 형식 속에 나와 함께 (영원히) 구속되어 있다. 드라마의 완결인 시즌3 에피소드6에서 사건은 모두 종결되고 모리츠와 친구들은 마약 판매에서 손을 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모리츠가 다시 인터넷으로 마약을 팔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그때 그의 친구 레니의 음성이 들린다. “거기서 꺼내줄게.” 어디서 모리츠를 꺼내준다는 말일까. 레니의 말을 들은 모리츠는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쳐다본다. 그때 그의 얼굴에 미소가 스치고 지나간다. 이 미소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는 인터넷-넷플릭스-마약에서 벗어나길 원하는 걸까, 그렇지 않은 걸까. 실화의 주인공인 막시밀리안 슈미트는 2015년 검거됐고 7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4년 7개월을 복역하고 풀려났다. 그러나 2022년 현재, 그는 다시 인터넷으로 마약을 판매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슈미트의 범죄를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샤이니_플레이크스: 나는 십대에 마약왕이 됐다>에서 법정 정신의학자는 슈미트가 자신이 이뤄낸 것을 자랑스러워한다고 말했다. 슈미트에겐 죄책감이 없다. 그는 현재 제기되고 있는 혐의에 대해선 말하길 거부했다. 드라마/현실에서 모리츠/슈미트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어느 쪽이 됐건 우리는 그들이 이 중독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중독을 끊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중독은 이미 우리의 존재 여건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1.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박정수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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