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는 어디에 있는가

landscapers

당연한 이야기 하나. ‘정원사들’로 부를 수 있는 <랜드스케이퍼스Landscapers>의 제목은 주인공인 수전(올리비아 콜맨)과 크리스토퍼 에드워즈(데이비드 슐츠) 부부를 가리킨다. 영어에서 2인 관계의 역할을 설명할 때 종종 쓰이는 비유이자 1화에서 두 경찰이 주고받는 대화에 등장하는 “부부 중 한 명은 정원사고 다른 한 명은 정원이다”라는 문장을 비틀어 에드워즈 부부를 하나의 복수형으로 지시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이 수전의 부모를 살해한 뒤 다른 곳도 아닌 부모가 살던 집 뒷마당에 묻었다는 점에서 에드워즈 부부가 정원을 조경하는(?) 일에 함께 가담한 동업자들이라는 의미도 자연스럽게 내비친다. ‘정원사들’이라는 제목은 끔찍한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범죄물이자 절절한 멜로까지 담고 있는 <랜드스케이퍼스>의 에드워즈 부부를 설명하기에 퍽 적절한 단어다. 그런데 이 시리즈가 살인 사건의 경위와 수사 과정을 전개하며 동원하는 시각적 형식을 따라가다 보면 ‘랜드스케이퍼스’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또 다른 존재를 상기하게 만드는데, 이는 단연 서부극의 환경이자 심상인 ‘랜드스케이프’다. <랜드스케이퍼스>가 내내 반복적으로 <하이 눈High Noon>을 비롯한 고전영화들의 목록을 언급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4화에서는 노골적으로 드라마/시리즈 내에 장대한 웨스턴의 이미지를 기입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는 사뭇 인상적인 지점이다. <랜드스케이퍼스>는 웨스턴을 모방/재현하기 위해 화면비까지 들쑥날쑥 바꿔가며 자기 내부에 영화의 모양을 가져오길 시도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말장난처럼 제목을 토대로 이 미니시리즈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느냐를 파악하기보다는, 이 작품이 안팎으로 지닌 이중적이고 중의적인 함의를 골몰해보는 것이다. 달리 말해 전체적인 모양새로는 드라마/시리즈의 품을 갖춘 이 작품이 내내 영화의 존재를 의식하며 자신의 ‘신분’을 이상한 방식으로 노출시키는 동시에 이탈하려 한다는 (무모한) 시도 말이다.

우선 이 질문은 잠시 멈춰 세운 뒤, <랜드스케이퍼스>가 시종 인용하는 프레드 진네만의 <하이 눈>을 먼저 떠올려보자. 1화에서 수전이 홀린 듯 감상하던 <하이 눈>은 갓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가 전보를 통해 사형수의 탈옥소식을 접한 뒤 사형수가 정오 기차로 도착하기까지 80여 분 남짓한 시간 동안 기다리며 긴박하게 대비하는 서사를 그린다. 이는 <랜드스케이퍼스>의 부부가 처한 상황과 꽤나 겹쳐봄직하게 보인다. 부부의 관계에 대한 전제, 그리고 그들이 공통적으로 매개되거나 연루된 특정한 사건이 있고 이를 전면적으로 마주하기 전의 불안에 주력하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두 서사는 유사점을 공유한다. <하이 눈>의 부부—물론 초점은 게리 쿠퍼에게 더 맞춰져 있기는 하지만—는 자신들에게 곧 닥칠 위험에 초조해하며 미래에 대비하려는 두 인물로서 <랜드스케이퍼스>에서는 일견 확연하게 에드워즈 부부로 대응된다.

하이 눈>이라는 레퍼런스를 확연히 인용하는 <랜드스케이퍼스>는 4화에 이르러 수전과 크리스토퍼를 웨스턴의 주인공으로 변모시키기까지 한다. 웨스턴은 그 배경과 설정의 제한적 조건으로 인해 타 장르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훨씬 ‘시네마’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되곤 했다. <랜드스케이퍼스>가 의존하는 웨스턴의 이미지와 분위기도 분명 우리가 보아온 서부극에서 기인했음이 자명해 보인다. 따라서 <랜드스케이퍼스>의 4화는 여태껏 스스로 언급해오던 웨스턴을 자기 내부로 확 끌고 온 것만 같은 감각을 선사한다.

그리하여 <하이 눈>에서 중요한 인서트로서 반복적으로 삽입되는 시계가 있었다면, <랜드스케이퍼스>의 인물들이 <하이 눈>의 게리 쿠퍼와 비슷한 구도로 위를 올려다 보는 곳에는 웬일인지 게리 쿠퍼의 얼굴이 크게 박힌 포스터가 있다. 1952년 영화 속에서 게리 쿠퍼가 시계를 바라보는 장면은 21세기의 드라마 속 인물이 (사물화된) 게리 쿠퍼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장면과 공명하며, 이는 <랜드스케이퍼스>가 드라마 내로 영화를 적극적으로 끌어와 이를 방만하게 배치하고 난삽하게 삽입한다는 점과 직결된다. 그런데 사실 TV 드라마/시리즈에서 자신들과 같은 처지의 드라마가 아니라 구태여 이복형제와도 같은 영화의 조각들을 소환하고 자신의 내부에 기입하려는 욕망의 시도는 수차례 반복되어 왔다. 이는 그 역逆사례의 빈도가 적고 효과도 대등하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호기심을 일으킨다. 거칠게 말해 영화가 영화대로 제 몫의 삶을 진행시킬 때 드라마/시리즈는 불순하게 이 선을 자꾸만 넘나들었다(수많은 ‘영화감독’들이 OTT와 손잡으며 시리즈의 기획에 활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작금의 유동적인 매체 환경을 곱씹어볼 수도 있겠으나 이 상황의 수요와 방향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돌아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마테리알》 5호에서 윤아랑은 드라마가 영화에 대해 지니는 르센티망에 근거해 특히 남한에서 드라마가 물적 외관을 부풀리며 영화를 닮아가는 사태를 묘파한다. 적어도 <랜드스케이퍼스>에서는 극대화된 외관의 요건이 서사적, 형식적으로 내통하며 적극적인 ‘드나들기’의 시도를 선보인다. 말하자면 <랜드스케이퍼스>는 이토록 어지럽게 흑백과 컬러를, TV와 웨스턴의 화면비를, 앞서 등장한 영화 장면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패스티쉬를 반복함으로써 컨셉 모방 이상으로 ‘영화’에 닿으려는 자기초과적 시도를 분방하게 일삼고 있다.

동일한 신분의 드라마/시리즈를 끌고 오는 것은 방송국의 이해관계에서 탈피할 수 있다는 시장의 편의와 더불어, 이제 드라마/시리즈에서도 소위 예술로 운위되는 영화의 비주얼이 어렵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그 경계선을 지우는 것도 가능하다는 듯 ‘시네마’를 포섭하려는 시도의 연장선상으로 보이기도 한다(물론 그것의 가능 여부를 떠나서 말이다). 더욱이 시리즈 내내 영화에서 기인한 환상과 두 부부의 현실이 서로 교차하다 4화에서는 아예 이전과 달리 현실이 흑백 화면으로, 그리고 우리가 흑백으로 봤던 <하이 눈>의 외전 격으로 보이는 장면들이 컬러로 형식화되면서 <랜드스케이퍼스>의 야심은 한층 선명해진다. 이 부부가 집착해오던 환상의 예술인 영화가 마치 이들을 이루는 현실의 기본값이 된 것처럼 보이고, 재판을 받는 현실이 흑백의 화면으로 변모하면서(색깔을 뺏긴 듯) 시제를 상실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불분명한 것은 <랜드스케이퍼스>가 이토록 영화에 천착하는 이유가 단순히 웨스턴의 이미지를 배열하면서 모종의 감각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려는 시도인지, 혹은 자신들이 이상적으로 상정한 정전과 닮아가려는 제스처인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답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저 오마주나 패러디 등으로 일컫기엔 이 작품의 시각적 수사학과 서사가 서로 어긋나면서 갈마든다는 점이 기묘하다. 실은 <랜드스케이퍼스>가 영화만을 끌고 온 작품이 아니라는 점도 함께 밝혀야 할 것이다.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끊임없이 당시 사건을 ‘연극적’으로 체현하려는 시도가 난무한다. 수전에게 따라오라고 말한 뒤 앞장서는 경찰의 발걸음을 따라가면 거기에는 사건 당시 현장을 옮겨놓은 세트와 배우—인물들이 막 조립 및 배치되고 있다(그리고 이 ‘재현의 연극’은 수전이 기억하는 바와는 거리가 있어 그녀는 “사실과 다르다고요(It didn’t happen like this).”라고 호소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푸티지 영상처럼 당대를 고증하는 저화질 화면을 이따금 삽입하는가 하면 화면을 짓이긴 듯한 고정된 이미지를 나열함으로써 사진적 존재론을 드러내는 대목들도 등장한다.

말하자면 이 시리즈는 전반적으로 영화라는 예술형식에 의존하고 이를 서사적으로도 활용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드라마/시리즈의 벽을 허물며 자신의 몸짓을 방대하게 확장하려 한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랜드스케이퍼스>를 주조하는 서사의 가장 큰 요소는 ‘이 부부에게는 서로 밖에 없다’라는 단순한 사실이다(1화의 중반을 지나면 이 작품이 일반적인 범죄물에 기대하는 바에 보답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음이 확실히 드러난다). <랜드스케이퍼스>의 이야기가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은 에드워즈 부부와 이 부부 바깥으로 나뉜다(수전의 변호사가 유일하게 이들에게 감화되지만 이 사태에 아무런 틈을 만들지는 못하고 퇴장한다). 달리 말해 <랜드스케이퍼스>는 형식적으로는 드라마 자체의 감각을 확장하고 발산시키는 반면 서사적으로는 시종 두 부부라는 가장 최소의 단위로 수렴하며 축소하기를 병행한다. 형식의 방만함을 곧장 급진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랜드스케이퍼스>는 기존의 드라마/시리즈에서 사용되는 ‘평서적’ 이미지들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부리는 등 형식적으로는 급진성을 띠는 반면 서사적으로는 굳건한 보수성을 띠는 작품이다.

물론 소수의 인물에게만 집중하거나 작은 단위로 수렴하는 서사가 반드시 보수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 <랜드스케이퍼스>가 줄곧 천착하며 보여주는 부분이 수전과 데이비드의 ‘부부 됨’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면 <하이 눈>에서 게리 쿠퍼가 마을 주민들을 찾아 한 가구씩 방문할 때 그들은 하나같이 전통적인 가정을 꾸린 2인 체제의 부부들이었다. 아직 남성과 여성의 결합만을 정상적인 관계로 승인하던 시기의 영화였다는 사실을 부득불 인정한 채로 돌이켜보건대 이에 기생하는 <랜드스케이퍼스>가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심상 또한 ‘순정’이라 일컬을 만한 에드워즈 부부의 맹목적인 애정과 신뢰다. 이쯤 되면 부부 중 누가 방아쇠를 당겼는지는 거의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이들은 사건에 공동으로 가담한 단일한 총체다. 남녀의 애정을 그린다는 이유만으로 온건함을 지적할 수는 없지만, 이들이 똑같이 25년형을 선고받았다는 사건의 이면이 명징하게 각인된다는 점에서 <랜드스케이퍼스>는 수전과 크리스토퍼를 개별적으로 고찰하기보다 부부라는 단일한 덩어리로서 분리하는 방식에 서사의 방점이 찍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절절한 멜로이기도 한 이 작품은 모두가 손가락질할 때 오로지 서로만이 전부인 부부를 그리면서 서사를 수축시키고, 한편 영화(를 비롯한 다른 예술의 형식들)를 어수선하게 취하려는 태도가 어떻게 불일치하며 실패하는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영화는 환상이라고 통용되는 해묵은 명제를 상기할 때) <랜드스케이퍼스>의 이 흐트러진 형식은 ‘환상에 갇힌’ 두 부부의 조건을 말하(는 데 불과하)며, 이는 무엇보다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 부부를 영화 촬영의 현장으로 몰아넣어 마지막까지 이들을 함께 말에 태운 채 달리는 서부극의 연인으로 위치시키는 데서 뚜렷해진다.

부부가 미소 지으며 어디론가 도주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 속에서만 이들이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이상으로 부부가 같은 시간 동안 서로를 절대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설정이야말로 진짜 감옥에 갇히게 된 것과 다를 바 없음을. 그리하여 이들을 영화라는 ‘환상’으로 굳게 봉인해주려는 드라마의 욕망을 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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