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어두운 그곳

Mindhunter

어둡다. 〈마인드헌터〉는 이상할 정도로 어둡다. 그렇다고 완전히 어둡지는 않다. 사물이 분간되지 않을 정도는 아닌데, 그렇다고 뚜렷이 보일 정도도 아니다. 이 시리즈가 누아르 장르에 가깝다고 생각해보면 ‘이상하게 어둡다’는 말 자체가 이상하기도 하다. ‘검은 영화’란 뜻의 필름 누아르는 그 시작부터 어두웠지 않은가. 하지만 필름 누아르는 단지 어두운 영화가 아니었다. 그 어둠은 밝음과 대비되는 어둠이었다. 흔히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고 말해지는 강렬한 명암 대비가 필름 누아르의 시각적 스타일로 대변되었다. 이는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밝음의 반대편으로 강조되던 어둠이었다. 그런데 〈마인드헌터〉는 그러한 시각적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차라리 이 작품은 그저 어둡다. 그것도 누아르같이 명암 대비가 강한 어둠이 아니라 명암 대비가 약한 어둠이다. 사진 촬영 용어로 말한다면 ‘적어도 한 스톱(stop) 정도는 어둡다’고 해야 할까(한 스톱 차이가 날수록 화면은 2배로 밝아지거나 1/2 정도로 어두워진다).

혹시 모르니 촬영감독 에릭 메서슈미트Erik Messerschmidt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초현실적 자연주의를 추구했습니다. 되도록 프랙티컬 조명을 쓰기를 원했어요. 특히 야간 실내 장면에서요. 사물들이 어둡거나 실루엣으로 보였으면 했습니다. (…) 우리는 ‘보기 좋은 명암 대비’나 ‘보기 좋은 미학’을 만들기 위해 속임수를 쓰고 싶지 않았어요. 그저 공간이 배우들을 밝히도록 했어요. 우리는 사람들이 보통 디지털로 작업할 때보다 더 카메라를 어둡게 했어요. (…) 실제로 어떤 규칙 같은 것은 없었어요. 어떤 지침이 어떤 결과로 이끌 순 있겠지만, 저는 젊은 영화 창작자들이 자신의 목소리와 기회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스토리를 뒷받침할 수 있다면 기꺼이 어둡게 가야죠.”1

이외에도 색보정 컬러리스트 에릭 바이트Eric Weidt는 70년대 후반의 연조low-contrast적 시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HDR 기술을 이용하여 명부를 끌어내렸다고 밝히기도 한다.2

촬영감독이 말한 ‘프랙티컬 조명이란 화면 내부에 실제로 노출되고 자리하는 빛을 뜻한다. 집 안 실내등이나 가로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이러한 프랙티컬 조명은 대체로 〈마인드헌터〉의 실내 장면에서 국부 조명으로 사용되었다. 물론 누아르 장르나 수사물에서 국부 조명은 자주 사용된다. 하지만 현실의 수사 공간에서 그런 조명을 사용했다간 곤란한 일이다. TV 예능 〈유퀴즈 온더 블록〉에 출연한 법의학자들은 미국의 〈CSI〉 시리즈처럼 국부 조명만으로 시체를 들여다보는 일은 결코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증거 자료를 세밀하게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공간을 훤히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의 ‘룩look’과 현실의 룩은 차이가 크다. 그렇다고 영화/드라마가 현실의 룩을 반드시 흉내 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수사’라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비일상적인 사건일 그 특별한 일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비현실적인 룩 또한 필요한 법이니까. 그런 만큼 〈마인드헌터〉도 흔한 수사물처럼 국부적인 조명을 사용하여 공간을 밝힌다. 하지만 〈마인드헌터〉의 룩과 〈CSI〉의 룩은 현저하게 다르다. 〈CSI〉의 경우, 국부적인 조명이 사용되긴 하지만 그 국부적 조명의 밝기가 강하여 화면 전체의 밝기 분포histogram가 균등해 보인다. 즉,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이 거의 비슷한 무게감으로 대조되고 배치된다. 화면 전체가 어두운 만큼 국부 조명의 광량을 강하게 하여 암부를 상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인드헌터〉의 국부적 조명은 화면의 암부에 대응할 수 있을 만큼 밝지 않다. 화면의 밝기 분포가 암부에, 그것도 완전히 아래쪽 암부가 아니라 중간 지점에서 슬그머니 발을 걸치는 암부에 더 치중된다. 그래서 마치 FBI가 심각한 전력난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인다(농담이다).

어두우면서도 또 그렇게 어둡지는 않은 어둠. 밝으면서도 또 그렇게 밝지는 않은 밝음. 〈마인드헌터〉의 화면은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애매한 지점에 걸쳐 있다. 전통적 필름 누아르가 강렬한 명암 대조를 통해 전후 사회의 도덕적 아노미를 드러내거나 도덕적 아노미에 직면하는 난감함을 드러내었다면, 〈마인드헌터〉는 그러한 도덕적 아노미가 이미 완전히 지배하여 아노미 바깥이 전혀 없는 듯이 보인다. 다시 말해, 전통적 필름 누아르에는 밝은 쪽과 어두운 쪽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주인공이 밝은 쪽으로 갈지 어두운 쪽으로 갈지 정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면, 〈마인드헌터〉는 밝은 쪽이 어디이고 어두운 쪽이 어디인지 애초에 분간하기 힘든 사태를 드러내는 것 같다.

〈마인드헌터〉의 밝기 분포를 이렇게 세계상에 대한 은유로 독해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기보다 다른 지점에 주목하고 싶다. 내가 정말 탐색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어두운 화면과 세부 요소의 모순적 작용이다. 이 시리즈의 주요 인물들은, 특히 홀든은, 세부 요소에 집요할 정도로 집착을 보인다. 대사에서도 여러 번 ‘세부’를 보아야 한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어두운 화면은 이상하게도 화면의 세부를 제대로 보기 어렵게 한다. 그러면서도 세부적 요소들이 화면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자신을 봐달라고 요구한다. 세부적 요소들로만 감각할 수 있는 것들로 인물의 성격을 형성하기도 한다. 명암 대조가 약하면서도 어두운 화면은 세부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면서, 어떠한 부분에 대한 세부 묘사는 분명하게 남겨놓는다. 이렇게 세부를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어두운 화면과, 세부 요소들로 구성되는 의미들이 중첩되어 이 시리즈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새겨진다.

내가 홀든처럼 세부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중심 서사에서 비켜나 있는 듯한 어느 장면에 있다. FBI의 자문으로 들어온 웬디의 주요한 사적 서사는 그녀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하지만 그러한 정체성 서사 바깥에 있는 듯한 한 장면이 눈길을 끈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거처 지하 세탁실에서 고양이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리고 매일 지하에 내려가 고양이 먹이를 두고 온다. 어느 날에는 먹이가 담긴 캔이 비어 있고, 어느 날에는 먹이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다 또 다른 어느 날에는 내용물이 그대로 담긴 캔 내부에 벌레가 우글거리면서 캔 바깥으로 기어 나온다. 웬디는 그 우글거리는 벌레를 보고 뒷걸음치듯 지하실을 벗어난다.

중심 서사로부터 벗어나 배치되는 잉여적이면서도 세부적인 이러한 장면은 무엇보다 웬디라는 인물을 성격화하는 역할을 한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과는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그에게서 또 다른 면모를 느끼게 하면서 차갑고 냉정하게만 느껴졌던 웬디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웬디의 그런 성격으로부터 실행되는 의도적 행위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맞이하고 만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의도’가 의도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사실, 의도가 전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빚는다는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철학자 스탠리 카벨은 『우리는 의도대로 말해야 하는가?Must We Mean What We Say?』에서 우리의 의도와 그 결과 사이의 불일치에 주목한다. 카벨의 주장은 복잡해 보이면서도 간결하다. 우리는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말하지만, 그 의도는 좀처럼 의도된 결과를 만들지 않는다. 예를 들면 더 이해하기 쉽겠다. 한국의 공교육을 받고 자란 이라면 누구든 학창 시절에 단소를 불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단소를 불기란 참 어렵지 않던가? 내 머리와 손가락은 ‘솔’을 의도하는데, 배출되는 음은 나의 의도를 전혀 표현하지 못한다. 우리는 의도와 효과의 불일치 사이를 메우기 위해 부단히 연습한다. 충분히 연습한 뒤에야 솔 음을 제대로 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우리가 보았던 웬디의 경험처럼, 이 시리즈에는 의도와 결과의 불일치 상태가 가득하다. 시리즈의 첫 시작부터 그런 상태였다. 홀든은 인질범을 흥분시키지 않을 의도로 인질범에게 접근하지만, 결국 인질범의 충동을 꺾지 못하고 눈앞에서 그가 죽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물론 이렇게 의도와 결과가 불일치하는 일은 인간사의 갈등을 만들어 내는 보편적인 지점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인물이 겪는 갈등의 개별적 요체로서 해당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제시된다는 점은 이런 상황을 단순히 평범한 설정으로 넘기기 힘들게 한다. 그리고 의도와 결과의 불일치가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세부 요소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들여다볼 여지를 남긴다.

홀든이 자기의 여자친구 데비를 술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 데비는 홀든에게 ‘일탈deviancy’이란 단어를 꺼낸다. 홀든은 그 단어가 익숙지 않아 “그게 뭔데요?”라고 묻는다. 그런데 나중에 초등학교에서 강연을 할 때, 홀든은 교장 선생에게 미리 제출한 강연록에 ‘일탈적deviant’이라는 말을 포함시킨다. 교장은 이 말을 아이들 앞에서 쓰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고, 홀든은 이 말을 꺼내지 않기 위해 애써 우회적 단어들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이렇게 복선처럼 우회하는 요소들이 이 시리즈의 곳곳에서 여러 차례 우리를 찾아와 인물의 내면 상태를 다시금 되짚을 수 있도록 한다. 여자친구가 언급했고 홀든이 어느샌가 사로잡혔던 ‘deviancy’란 단어는 다시금 홀든의 언어로 복귀한다. 이후 이 단어는 홀든이 교장에게 투사하게 되는 의식으로써 자리하다가, 죄인인지 아닌지 좀체 모를 교장의 얼굴과 몸짓을 경유하여 다시금 홀든에게 돌아간다. 즉, 우리로 하여금 홀든의 일탈적인deviant 상태를 보도록 한다. 이렇게 의도된 어떠한 발화는 최초의 의도성을 넘어서서 다른 과녁으로 향한다. 의도는 그렇게 다른 과녁을 향해 비껴가거나 어떤 과녁을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인물 주위를 뱅뱅 돈다.

의도와 결과의 불일치는 홀든의 동료 빌도 비켜갈 수 없다. 그가 마주하는 가장 사적인 난제는 바로 입양한 아들 브라이언이다. 빌과 그의 아내 낸시는 사랑을 주기 위해 브라이언을 입양했지만, 그런 의도는 의도치 않은 결과로 이어진다. 브라이언이 저질렀던 ‘실수’ 또한 의도와 결과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친구가 없어 보이는 브라이언은 아마도 자신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아무도 없는 집에 동네 친구들이 발을 들여놓게 했고, 죽은 아기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묶어 놓는 기이한 행동을 한다. 브라이언은 빌이나 낸시에게나 미궁과도 같은 존재이다. 낸시는 브라이언이 연거푸 잠자리에서 오줌을 지리자 자신의 지식 내부에서 브라이언의 행위를 해석하려 하지만, 어쩐지 그런 시도는 전혀 먹히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브라이언은 빌에게 범죄자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 되었다. 아니, 찰스 맨슨과 같은 범죄자보다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게 빌의 의도는 제대로 된 과녁에 맞지 못한 채 계속해서 빗나가는 중이다.

이러한 빌의 성격을 드러내는 가장 뚜렷한 세부 요소는 바로 ‘담배’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무는 골초 중 골초다. 물론 그 시대는 지금과 달리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행동이 허락되었고, 비행기 내 흡연도 가능했던 시절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서 빌만큼 담배를 피워대는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이상하게도 빌이 담배를 피울 때마다 곁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 빌은 언제나 그 혼자 담배를 문다. 저 멀리 누군가가 후경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긴 하지만, 거리 때문에 화면에서 그리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이 시리즈는 마치 이 세계에서 빌만이 담배에 미친 사람인 것처럼 장면을 묘사한다.

담배는 빌의 성격을 드러내는 분명한 기능을 한다. 무엇보다 흡연은 공적 공간을 사적 공간으로 전유한다. 다시 말해, 타인과 함께 있는 공간 내부에서 담배를 삐뚜름하게 입에 무는 순간 일시적이고 국부적으로 사적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빌은 자신의 개인적 공간을 수호하기 위해 무던히도 신경 쓰는 듯이 보인다. 자신의 부서가 외부로부터 인정받고 더 넓은 공간이 제공되자, 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동료와 거리를 두면서 더 넓어진 개인 공간으로 짐을 옮기는 행동이었다. (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집에서도 아들이 결코 출입할 수 없는 자기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빌은 홀든보다 사회성이 더 두터워 보이지만, 사적 공간에 대한 집착이 별로 없어 보이는 홀든에 비해 자신만의 공간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드러낸다. 이런 그가 수사라는 공적 행위와 양육이라는 사적 행위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은 〈마인드헌터〉에 사적/공적이라는 대립적 이항을 설정하도록 한다. 그 간극 사이에서 빌은 자신의 의도와 결과가 매번 빗나가는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게 된다.

웬디의 고양이 캔, 빌의 담배와 같이 홀든에게도 성격을 드러내는 세부 요소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단연코 넥타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빌이 담배에 집착하는 만큼 홀든은 정장에 집착한다. 시즌1 첫 에피소드에서 작전에 실패하고 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행동도 자신의 새하얀 셔츠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것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장 차림에 대한 타인의 언급을 몇 번이나 들으면서도 그 복장을 꿋꿋이 고수한다. 넥타이도 언제나 단정하게 목에 밀착되어 있다(빌의 넥타이는 슬쩍 풀어져 있다). 홀든의 넥타이는 자신이 FBI라는 정체성을 결코 숨길 생각이 없으며, 그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태도, 그러면서 집단의 규율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자신만의 규율에 집단을 끌어당기려 애쓰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웬디와 빌이 겪는 의도와 효과의 불일치가 사적으로 나타난다면, 홀든의 불일치는 그의 슈트만큼 공적으로 나타난다. 바로 ‘프로파일링’이라는 과제 완수가 의도와 효과의 불일치로 나타나는 것이다. 프로파일링으로 인해 홀든은 자신의 의도에 현상을 짜 맞추는 지경에 이르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훗날 프로파일링이 범죄 수사에 핵심적인 과정이 된다는 점을 미리 인지하고 〈마인드헌터〉를 보지만, 정작 이 시리즈에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프로파일링의 거대한 실패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시리즈가 완결되지 않았고 아직 범인도 잡히지 않았지만, 현재 진행되는 상황까지만 보자면 홀든의 프로파일링은 그의 집착과 연계되어 낭패로 이어진다.

세부에 대한 집착은 모든 것을 기호로 보게 하는 난감함을 안긴다. 극에 등장하는 하나하나가 독해 가능한 것, 판독 가능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쇄살인마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범죄의 근원을 밝히는 주요 근거와 신호가 될 것이고, 그 근거와 신호를 전달하는 세부 사항에 집착해야만 독해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웬디, 빌, 홀든의 그러한 시도들은 독해 가능성, 판독 가능성을 획득하기 위한 야심 찬 시도이지만, 이 시리즈는 그 시도를 칭송하거나 응원하기보다 오히려 그 시도의 실패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추는 듯이 보인다.

〈마인드헌터〉의 어둡고 명암 대조가 낮은 화면이 어떠한 의도를 가졌는지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설정이 독해와 판독 불가능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빚는다는 점이다. 빌이 아들의 마음을 알 수 없는 만큼, 웬디가 고양이의 마음을 얻지 못한 만큼, 홀든이 범죄자의 마음을 비롯하여 제 마음도 알지 못하는 만큼, 우리 또한 인물의 표정에서 많은 것을, 혹은 분명한 것을 독해하기 힘든 상태에 놓인다. 만약 ‘정신 사냥꾼(mind hunter)’이 누구를 가리키는 말이냐고 묻는다면 홀든, 빌, 웬디와 같은 프로파일러가 일차적으로 지목되겠지만, 어쩌면 그 세 사람의 마음을 독해하려 애쓰는 우리 또한 그 혐의(!)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마인드헌터〉 시즌2의 마지막 장면. 자신의 목을 조르며 자학적 쾌감을 느끼는 이를, 당신은 독해할 수 있는가?


  1. Hawkins Dubois,“Why David Fincher’s ‘Mindhunter’ DP Believes ‘There Are No Rules’ in Lighting”, 『No Film School』, 2017.10.13. ↩︎

  2. Calvin C. Choi, “Creating the unique look for Mindhunter”, 『Calvin C. Choi blog』, 2020.0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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