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반적으로 행복하고 안락한 소년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히치콕은 살인으로부터 공포뿐 아니라 쾌락을, 아니면 그가 살인의 공포와 쾌감을 연결지어서 즐겨 표현했던 ’공포의 기쁨‘을 느끼면서, 살인에 매료되는 문화를 경험한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이었다. 여생 동안 히치콕은 실제 살인자에게 매혹됐고, 영화로 그들을 재현해내려고 노력했다.’1
뜬금없이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위의 인용문은 우리가 <마인드헌터>를 비롯해서 끔찍한 살인이 나오는 매체를 왜 만들고 즐겨보는지 정확히 묘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라는 환영 뒤에 숨어 은밀한 쾌락을 추구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게 피해자들에게 가해지는 말초적 쾌락이든(이 경우는 공포도 포함한다), 논리적인 추리로 살인마를 잡는 정신적 쾌락이든, 현실에선 결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을 둘러싸고 각기의 쾌락을 추구한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살인마가 등장하는 스릴러 장르가 추구하는 쾌락의 본질은 그 방향이 어디든 희생자를 죽이려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음’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알 수 없음’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매혹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정말로 살인자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미 드러난 범인은 왜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지, 정말로 미지의 세계 그 자체이니까.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저 ‘변태’나 ‘사이코’로 치부하고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은 위험하고 음습한 것에 더 마음이 끌리기 마련이다.
잠깐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 역시 <마인드헌터>처럼 강의 장면에서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전공 과목 내에서 잠깐 스쳐 지나가던 범죄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매혹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근현대 문명으로 와서야 처음 등장했다고 여겨지는 이 존재들을 알고 싶었으니까. 도무지 나로선 알 수 없는 세계를 이해하는 작업은, 비록 잔혹하고 끔찍할지언정 나를 궁금증으로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나와 그들의 강은 어디서부터 달라졌는지 그 줄기를 바라보며 무엇이 문제인지 답을 찾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시리즈의 주인공들과는 목적이 좀 다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들에 대해 놓은 것은, 결코 하나 혹은 몇 가지 문제로 이들을 환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개인이나 가족이 만들어낸 단면이자 사회가 만들어낸 복합면이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반사각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찾을 수 없는 답을 찾으려는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안온한 세계로 돌아왔다. 그러나 범죄자에 탐닉하던 나의 태도는 나에게 여전히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거칠게 말하면 그들을 이해하려 했던 과정은 어쩌면 영화를 보는 것과 비슷한 행위이지 않을까? 내가 이후 영화에 탐닉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마인드헌터>의 작동 방식이 내가 처음 범죄자들에게 매혹되었던 부분과 닮아있고 경계선을 긋는 방식이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나는 나를 빌어 <마인드헌터>라는 세계를 들여다볼까 한다.
2.
나는 왜 매혹되었을까? 물론 앞서 말한대로 알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한 호기심이 크긴 했지만 그건 어쩌면 모험을 꿈꾸는 태도와 닮아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일상에서 일어날 리 없는 살인과 그가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두려워하면서도 언젠가 그런 기회가 생기면 탐정의 입장이 되어서 그들을 잡는 모험을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어쩌면 망상에 가깝지만 우리가 공포/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은근히 내 주변에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하는 은밀한 쾌감말이다. 호기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게끔 만드는 쾌락적 감정이다. 비록 그 결과가 재앙일지라도 인간은 그 순간의 서스펜스나 모험을 즐기기 위해 기꺼이 뛰어든다. 이미 최초의 인간이라고 일컬어지는 자부터도 선악과의 호기심이 불러일으키는 서스펜스에 굴복하지 않았는가. 인간은 모르기 때문에 궁금해한다.
이제 시리즈로 들어가보도록 하자. 홀든 포드(조나단 그로프)는 우연히 보게 된 강연을 통해 아직 개념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여기서부터 잠깐 멈춰보자. 나는 방금 ‘우연히’ 보게 된 강의라고 했고, 이는 존 더글라스와 마크 올셰이커의 원작에도 거의 유사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과연 홀든의 시작이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그는 그들에게 이미 매혹된 상태는 아니었는지 묻고 싶다. 다시, <마인드헌터>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급할만한 시즌1 1화의 오프닝을 보자. 홀든은 인질협상팀으로 실패를 겪고 만다. 정신병을 지닌 인질협박범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는 자살해버린 것이다. 의미심장한 건 자살 이후 다른 시리즈나 영화라면 응당 있어야 할 홀든의 리액션이 삭제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실패에 괴로워했을까? 마지막 인질협박범에게 했던 말처럼 도움이 되고 싶었을까? 이는 후에 별다른 자책감을 보이지 않는 홀든의 태도를 볼 때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가 이때부터 이미 알 수 없는 인간들에게 매혹된 상태라고 주장하고 싶다. 알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그들의 마음 속을 예측하고 탐험하고 싶다는 모험심이 싹트기 시작한 순간부터 홀든은 호시탐탐 그런 기회를 노렸을터이다. 그런데 이는 시리즈를 보고 있는 나 역시 이미 매혹된 상태임을 넌지시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살인범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이미 매혹된 상태에서 <마인드헌터>의 세계에 진입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3.
<마인드헌터>는 미국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연쇄살인범들을 불러 세운다. 그리고 제목 그대로 그들의 ‘마음을 사냥한다’. 그런데 ‘사냥하러 간다’는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이 문장을 자주 말하는 이들이 살인범들이기 때문이다. ‘사냥한다’라는 말은 살인범들 입장에서 매우 적합한 언어다. 그들의 목적은 다양하지만, 피해자 즉(그들의 입장에서) 사냥감을 치밀하게 고른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을까 골머리를 앓기도 하며 심지어 자신의 작품처럼 생각하는 살인범도 있다. 그들은 살인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잡히지 않음으로써 더 큰 쾌락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면 왜 ‘마인드헌터’라는 수식어가 시리즈의 주인공들에게 명명되는 것일까. 시리즈 내내 끊임없이 반복되는 명제를 상기해보자.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건 사냥의 대상만 바꾼채 똑같은 행동을 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 순간 시리즈는 그들의 방식과 언어로 진행하는 게임이 된다.
인간(그것도 좀체 볼 수 없는)의 알 수 없는 심리를 파헤치기 위한 게임. 게임의 전장은 인터뷰 현장이며, 마치 핑퐁처럼 진행되는 대사의 리듬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 게임은 일종의 모험을 수행한다. 그런 측면에서 살해의 재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저 말이 진실인지, 저런 사고 방식을 가진 인간에겐 어떻게 대해야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낼수 있는지, 마치 시시각각 랜덤하게 변하는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마인드헌터>에 나오는 살인범들은 다양한 전략들로 등장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그 곳에서 자신만의 포지션을 잡는다. 어떤 인물에게 이입할수도 있고, 제3자의 입장에서 게임의 승패를 판정하기도 하며, 인간의 상식과 반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이들에게 분노나 혐오, 공포의 감정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포지션에서 인터뷰 장면을 보든 <마인드헌터>의 인터뷰 장면은 게임의 진행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쾌락적인 요소가 있다. 도무지 주변에서 볼 수 없는 인간들의 이야기는 원작과의 미묘한 거리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시리즈는 원작의 시시콜콜한 부분(등장인물의 사생활이나 홀든의 공황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시리즈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들은 전부 원작에 기술되어있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차용하고 있다. 심지어 시드니 루멧의 <뜨거운 오후>(1975)를 보는 것마저도)까지 차용하고 있음에도 정작 원작에서는 인터뷰에 대한 기술이 거의 빠져있다. 인터뷰 장면은 오로지 시리즈의 상상력과 연출로 공들여진 장면이다. 사람들은 미친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 미친 사람을 만나며 폭력을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두뇌싸움을 벌일 수 있다면 더 좋아한다. <마인드헌터>가 인터뷰를 대표적인 오브제로 삼는 것도, 우리가 혐오스럽고 공포스러워하면서도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데 <마인드헌터>가 꾀하는 지점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제까지 미지의 세계였던 범죄자들의 마음과 함껏 게임을 벌이던 시즌1은 후반부에 이르러서 느닷없이 윤리극으로 치닫는다. 홀든의 발언이 문제가 되고 그걸 덮는 과정에서 모두가 공모하게 되는 상황. 놀라운 건 이 상황마저 핀처의 자장 안에서는 서스펜스의 재료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제 완전히 행동과학부의 편이 되어버린 우리를 두고 핀처는 홀든을 인질 삼아 협상을 벌인다. 거기다 기막히게 속 터지는 캐릭터 둘(홀든, 그렉)을 양쪽에다 배치하여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낸다. 과연 당신들은 대의와 정의를 위해 과정의 불온함을 용인할 것인가 아닌가. 어떤 선택을 지지하던, 그렉 스미스(조 터틀)의 선택을 보게 되고, 매혹의 늪에 빠진 홀든을 보면서 시즌2는 이제 완전히 다른 시리즈가 될 것을 예감하게 된다.
4.
시즌1이 이제껏 미친 사람과의 인터뷰 게임으로 움직이는 시즌이었다면 시즌2는 시즌1에서 쌓아올렸던 전제들을 파괴하는 작업이자,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는 시즌이다. 심연에 빠져 허우적대는 홀든은 자연스럽게 시리즈에서 자리를 내주고 마찬가지로 시즌1의 종말을 알리듯 그의 연인 데비(한나 그로스)와 셰퍼드 국장(코터 스미스) 역시 물러난다. 시즌2의 주요 서사는 빌과 웬디를 중심으로 두고 이끌어가는데, 새로 부임한 국장 테드 건(마이클 세버리스)은 주목할 만 하다. 그는 마치 시즌2에 늦게 도착한 인물 같은데, 정치 싸움에 능수능란한 인물이지만 사실은 살인자와의 게임에 더 큰 흥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게임의 언어는 바뀌었건만 정작 시즌1의 세계에 흥미를 두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런데 달리 말하면 이 ‘어긋남’이야말로 시즌2를 표상하며 그런 측면에서 테드 건은 시즌2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가 원래 있던 세계는 정치의 언어를 가진 곳이다. 그리고 그가 가진 정치의 언어와 수완은 시즌2에서 많은 도움을 주는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정작 그가 관심을 가진 살인자들에 대한 탐구는 시즌2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 점은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시즌1에서 그들이 구축해놓은 세계는 여전히 유효하며 그것을 이용하려 하지만, 사실 이 게임은 다른 세계의 언어들이 뒤섞인 채 기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며, 시리즈는 그것을 폭로한다.
그러니 시즌2는 내내 프로파일링만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건 당연하다. 설령 그들의 과학이 맞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한다. 분명 그들은 사건을 해결해나가고 있지만 다른 영역이 주인공들이 구축해놓은 세계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말할 것도 없이 애틀랜타 흑인 아동 살인 사건일 것이다. 범인을 잡게 되기까지의 무수한 정치적 문제들. 그러니까 다른 영역의 문제인 인종 차별과 범인이 뒤섞여 혼란 그 자체를 만들어내는 세계의 모습은 이 문제가 결코 하나의 분야로 환원될 수 없음을 주지시킨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마무리다. 그들은 끝내 범인을 잡아내지만, 애틀랜타 흑인 ‘아동’ 살인 사건의 범인이 정작 성인 2명의 살인에 대해서만 기소당하는 역설적인 사실 앞에서 어딘가 모르게 찝찝해진다. 과연 그는 이 모든 살인 사건에서의 범인이 맞는 걸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의문 부호만 남긴 채 에피소드는 마무리된다. 잡히지 않은 데니스 레이더(소니 발리센티)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마치 시리즈와 전혀 상관없이 잠깐씩 등장하는 이 인물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프로파일링이 요술 방망이가 아니란 사실을 암시한다. 실제의 데니스 레이더, 이른바 BTK 살인마는 2005년도가 되어서야 잡히기 때문에 그는 <마인드 헌터>의 세계 속에서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운명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실패는 바로 빌과 웬디다. 빌은 수십 명의 연쇄살인범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봤지만 정작 아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마음을 ‘사냥’하는 사람이 사냥하면 안 되는 존재를 만났을 때, 그들의 능력은 무기력해지고 마는 것이다. 가정에서의 빌은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탐정 역할을 해야하는 건 사회복지사(에밀리 버글)인 것처럼. 웬디는 또 어떤가. 사족처럼 보이는 케이 만즈(로렌 글레이지어)와의 이야기는 결국 마음의 문제조차 계급과 젠더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 같은 태도는 <마인드 헌터>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지점이기도 하다. 시리즈의 주제이자 근원인줄 알았던 프로파일링의 세계를 스스로 뒤흔들고 있으니까.
5.
어쩌면 핀처는 이렇게 흔들리고 있는 세계 그 자체를 놔두고 싶은건지도 모르겠다. 무엇 하나 정의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을 감각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과연 누군가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비논리적인 우주에 놓인 논리적인 체계는 국소적인 부분에만 유효하다. 이 ‘알 수 없고 어긋난’ 상태의 사이에 악은 비집고 들어간다. 그리고 악의 방향은 어느 쪽으로도 기능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순간, ‘우리 주변에 전혀 볼 수 없었던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정말로 그들은 특별하게 다른 사람일까? 우리는 그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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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 패트릭 맥길리건 지음, 윤철희 옮김, 그책, 2016, 34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