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쳐지나가는 눈빛과 사소한 제스처, 순간적이고 미세한 표정과 목소리의 떨림, 그리고 그 속에서 거짓과 진실을 오가는 부정확한 진술과 기억들. 거기에 개개인이 다르게 선택하는 단어들, 각자의 사투리와 각자의 말투, 각자의 문법들. FBI 행동과학부 요원 홀든에게 이 같은 대화 속 미세한 흔적들은 모두 상대를 내면을 간파하는 주요한 힌트들이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간단한 대화를 나누곤 이 추상적인 징후들만으로 상대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트라우마와 욕망을 건져 올린다. 그리고 그 무심한 관찰 위에서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살인범을 가려내고, 누구보다 신속하게 사건을 해결한다.
<마인드헌터>는 분명 실화에 바탕한 시리즈지만, 작품의 주인공인 홀든의 능력은 현실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 비범한 사내는 지미 카터 시대의 필립 말로, 혹은 레이건 시대의 셜록 홈즈일까? 확실한 건 그가 사소한 대화만으로 너무 많은 걸 알아챈 단 것이다. 홀든은 형사도, 탐정도 아니지만 그가 지닌 놀라운 직관과 관찰력, 그리고 통찰력은 분명 평범한 경찰의 그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가 용의자 혹은 수감자와 나눈 대화는 언제나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의 이면을 드러내고, 이 과정 속에서 점차 그에겐 ‘탐정’이란 장르적 정체성이 새겨진다.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부터 그에게 모종의 해결과 그에 따른 카타르시스를 기대하기 시작한다. 즉 홀든 특유의 그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간단한 대화와 추리만으로 미스터리한 사건의 진위를 알아낼 것만 같은 기대를 안겨주는 것이다.
우리가 가깝게는 강호순과 유영철, 멀게는 찰스 맨슨과 에드 캠퍼와 같이 보편적 윤리관으론 도저히 설명이 불가한 인물들을 사이코패스 등의 용어로 타자화하며 이해불가능의 영역으로 미뤄둘 때, 홀든은 어떻게든 그들의 내면에 가닿기 위해 FBI의 내규를 어기면서까지 그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또 그는 현장일선에서 활동하는 형사가 아님에도 사건의 정황과 범인의 심리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진실을 파헤친다. 시즌1의 3화, 미궁에 빠졌던 캘리포니아 노인 폭행 및 살인사건을 해결하고 자축하는 자리에서 홀든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자신의 방법론과 수사방식을 발전시키면 “우린 깜깜한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을"거라며 다소 듣기 민망한 연설을 하고, 갑작스런 그의 자화자찬에 파티는 삽시간에 싸해진다. 파티분위기는 아랑곳않고 자신의 방법론에 이토록 확신하며, 범인과의 심리싸움에 이렇게나 진심인 남자를, 필름 누아르적 ‘탐정’이 아니면 달리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명백히 사립탐정은 아니니, 공립탐정이라 불러야 할까?
2.
그렇지만 홀든의 정체성을 단순히 장르적 탐정으로만 단정하기엔 난감한 면이 있다. 그는 천재성을 지닌 뛰어난 탐정인 동시에, 한편으론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지했듯 그에겐 분명 전통적 탐정의 면모가 서려있지만, 한편으로 그는 살인마와 그들의 심리에 지독하게 매혹돼 그 내면을 끊임 없이 파헤치는 유사-오타쿠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자신의 발견과 분석을 이론으로 정립하고 싶어하는 연구자이기도 하며, 히피들이 가득한 서부의 대학에서도 정장을 유니폼처럼 입고 FBI/탐정이란 정체성을 잃지않으려는 일종의 강박적 퍼포먼서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다소 독특하긴 해도)별달리 문제라고 하긴 어렵다. 연구자, 오타쿠, 퍼포먼서이면서 동시에 누아르적 탐정이 되지말란 법은 없다. 생각해보면 ‘탐정’의 장르적 발원지인 셜록 홈즈부터가 뛰어난 탐정인 동시에 음악가이자 결벽증 환자, 소시오패스, 특유의 담배와 모자를 유니폼처럼 착용해 상징화하는, 복합적 정체성의 소유자 아니었던가. 이런 점에서 비범한 추리능력과 갖가지 특이한 면모를 동시에 지닌 홀든은 오히려 셜록 홈즈의 장르적 적자라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복합적 정체성이 뒤섞이는 방식에 있다. 과연 우리는 <마인드 헌터>를 따라가며, 손쉽게 홀든을 믿음직한 탐정으로 여길 수 있을까? 셜록 홈즈가 홀든과 마찬가지로 기행을 일삼는 비정상적 인물이었음에도 여전히 탐정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이유는, 그 특유의 기벽이 탐정으로서의 능력과 위상을 훼손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를 더욱 신비로운 인물로 느끼게하는데 기여하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캐릭터적 매력의 근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든의 복합적 성질은 셜록 홈즈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
시즌2의 1화로 돌아가보자. 1화의 초반부, 셰퍼드의 뒤를 이어 후임 관리자로 등장한 테드는 행동과학부에 부임하기 전 빌과 웬디와 각각 면담을 나눈다. 그는 이미 행동과학부 요원들의 프로젝트에 큰 기대를 걸고 있으며, 나아가 이 프로젝트가 홀든의 능력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 또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기대를 은연중에 빌과 웬디에게 내비치며 홀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 그런데 빌과 웬디는 의외로, 홀든이 뛰어난 직관과 본능을 지니고 있지만 그만큼 독단적이고 충동적이며 근시안적이기도 하다며, 홀든을 무조건 신뢰하기보다 얼마간 다면적으로 묘사한다. 즉 시즌2가 시작하자마자 제시된 이 두 번의 짧은 면담 장면은, 우리가 시즌1을 따라오며 홀든에게서 느꼈던 미묘한 양면성을 빌과 웬디를 비롯한 작품 속 인물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음을 은근하게 누설한다.
생각해보면 홀든은 분명 뛰어난 취조능력과 추리력, 논리적 추론능력을 지닌 셜록 홈즈의 귀환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완성된 탐정이라기에 어딘가 미성숙하고, 충동적이며, 자아도취적이어서, 홀든을 떠올리면 그에게 구조를 기대하기보다 오히려 반대로 강연과 파티 등에서 사회적 곤란에 처한 그를 구조해줘야할 것 같은 장면이 더 많이 떠오른다. 요컨대 홀든은 미궁에 빠진 사건을 밝힐 추리의 귀재인 동시에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언제나 예의주시하고 있어야하는, 이상한 양면성을 지닌 사내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주변으로 부터 신뢰를 쌓으면서 동시에 신뢰를 해체하고, 사건이 터지면 언제나 가장 먼저 찾게되지만 막상 어딘가로 보내놓으면 무슨 사고를 칠지 걱정부터 드는, ‘복합적’이란 말로도 껴안아지지 않는 양극단이 한 신체 속에 서려있는 인물인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 앞서 서술한 강박적으로 복장을 지키는 퍼포먼서, 살인자에게 매혹된 유사-오타쿠, 연구자, 소시오패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파악하며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아도취등의 정체성이 결합되면서, 홀든은 가장 믿음직한 탐정인 동시에 범죄자보다 더 언행을 예의주시해야할 시한폭탄이 된다.
그리고 일면 유아적이기도 한 홀든의 다면성은 단순히 그의 평판에만 영향을 끼치는 걸 넘어 추리와 사건해결에도 관여한다. 시즌1의 8화, 직업의 날 행사로 한 초등학교에 자신을 소개하러 간 홀든은, 교장 로저가 훈육이란 이름으로 학생들의 발을 간지럽히고 동전을 주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그리고 몇몇 교직원과 학부모는 이 훈육이 부적절하며 위험하다고 여겨 홀든이 조취를 취해주길 원한다. 홀든은 그의 행위가 성도착적 욕망이 발현된 것으로 판단해 징계위원회에 개입하고, 결국 그의 진술이 결정적으로 작용해 교장은 해임되고 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인드 헌터>는 충격적인 중범죄와 연쇄살인마들의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사소하고 부차적으로 보이는 이 에피소드를 꽤나 무겁게 다룬다. 더 미묘한 것은, 교장 로저가 정말로 성도착적 욕망을 훈육의 명목으로 해소했는지의 여부가 끝내 밝혀지지 않은채 에피소드가 종료되고 만다는 점이다. 결국 우리는 (깊은 교육학적 지식을 지닌 소수의 관객을 제외하고는)로저의 행위가 정말 교육의 일환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적절한 훈육이었는지 아닌지를 영원히 알 수 없는 상태로 로저의 해임을 지켜 볼 수 밖에 없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행위를 판단할 수 없는 입장에 관객인 우리뿐 아니라 직접적 연루자인 홀든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역시 교육학에 유별난 지식을 갖춘 전문가가 아니며, 로저의 행위를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판단할 증거도 없다. 홀든은 근거 없는 마녀사냥에 발을 담근 것일까? 아니면 FBI요원으로서 할 수 있는 적절한 판단과 개입을 한걸까? 이 딜레마 사이에서 홀든은 스스로의 직관과 경험을 확신하며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그 결과, 지역사회에서 두터운 신망을 쌓았던 한 교육자는 가정이 무너지고 직업을 찾지못해 전전긍긍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아동 성도착 범죄를 예방했(을지도 모른)다.
이게 옳은 일일까? 이 사소한 에피소드는 끝내 미완된 것만 같은 찝찝한 감각과 함께, 결국 시즌이 끝날때 까지 해소되지 않는 이 질문을 마음 깊이 남긴다. 이 에피소드는 결국 홀든이 비현실적 비범함을 지녔지만 그것이 항상 정확하지도 않고, 완벽하지도 않으며, 매번 옳지도 않다는 (당연한)사실을 은유적인 방식으로 상기시킨다.
3.
여기서 서두로 돌아가보자. 그러니까 홀든을 셜록 홈즈의 귀환으로 여길 수 있을까? 시즌1의 마지막, 홀든은 수사기록을 조작한 혐의로 직무감찰을 당할 위기에 처하고 그 심적 혼란을 안은채 알 수 없는 이유로 에드 캠퍼를 찾아간다. 거기서 거대한 체구의 에드 캠퍼와 최소한의 방어장치도 없이 마주한 홀든은 결국 공황발작을 일으키고, 시즌1이 마무리된다.
이어지는 시즌2 1화의 마지막. 행동과학부 관리자였던 셰퍼드의 은퇴 파티에서 셰퍼드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하려는 홀든에게 셰퍼드는 폭언을 퍼붓는다. 셰퍼드는 사실 자신은 은퇴하는게 아니라 “오만하고 이기적인”인 홀든의 “불복종과 무모한 판단력 결여와 허영심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하니 권고사직 당하"는 것이라고 쏘아붙인다. 스스로 셰퍼드의 업적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만하던 홀든은 사실 자신이 온갖 민폐를 저지르고 다니는 천둥벌거숭이였다는 것을 알게되자 다시 공황발작을 일으킨다.
자아도취의 신기루가 벗겨지고 보잘 것 없는 진실 앞에 서자 한없이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이 남자를 어찌해야할까? <마인드 헌터>는 바로 이 캐릭터성의 분기점에서 시즌2를 시즌1과 다른 길로 보내려 한다. 시즌2 1화의 사소하지만 인상적인 장면을 하나 더 보자. 공황발작으로 기절했던 캘리포니아 감호시설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빌은 홀든에게 왜 에드 캠퍼를 찾아가선 정신도 못차리고 공황이나 일으키냐며 쓴소리를 한다. 그리곤 “주말동안 잘 쉬어, 월요일에 찾아갔을 땐, 유능하고, 책임감 있고, 망할(스튜어디스의 카트가 지나가서 말이 끊긴다)프로답게 보이라고" 말한다.
이 사소한 장면 속 빌의 대사는 그 사이를 치고들어오는 스튜어디스의 카트로 인해 미묘한 리듬과 강조성을 획득한다. “망할fucking”과 “프로답게professional”사이에 잠깐의 틈이 생기며 “프로답게”에 강조가 스며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장은 역설적으로 홀든이 그동안 ‘유능하지도, 책임감 있지도, 결정적으로 욕나올 정도로 프로답지 못했음’을 강하게 반증하고 있다.
웬디의 진술에 따르면 “자기 가설을 뒷받침 하는 데이터만 인정하”고 “근시안적이고 충동적인"사람, 게다가 ‘유능하지도, 책임감 있지도, 욕나올 정도로 프로답지 못한’ 프로파일러.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성도착 범죄를 스스로의 직관만 믿고 판단해 결국 한 가정을 조각내버린 FBI요원. 악명이 자자한 범죄자들을 상대하고 사건을 해결하던 히어로적 탐정의 모습과 반대로, 이토록 무능하고 제멋대로인 요원이 같은 한 명의 인물이라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4.
홀든에게 서려진 양가적 면모는 그를 완결성 갖춘 서사적 인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여기엔 단일한 정체성만으로 도무지 규정하기 어려운 장르적 혼란이 있다. 그래서 그는 ‘탐정’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 어쨌거나 그는 여느 탐정들처럼 비현실적 능력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장르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는 확실히 ‘탐정’인가? <마인드헌터>는 여기서 우리를 멈춰세운다. 이 질문에 이르면 유약하고 변덕투성이인, 콧대만 높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 남자를 무어라 말해야할지 난감함이 앞선다. 그러나 <마인드헌터>는 도저히 우리를 여기서 더 답하지 못하게 만든다.
요컨대 <마인드헌터>는 (조연이나 단역도 아닌)주인공의 장르적 성질을 공들여 정교하게 쌓아올리곤 그것을 다시 은근한 방식으로, 아주 조금씩 훼손하고 해체한다. 그것도 그간 쌓은 장르성이 완전히 와해되진 않을 만큼만, 매우 미묘하게. 하여 우리는 이 믿음 안가는 탐정만 보고 앞으로 갈 수도, 그렇다고 눈앞의 흉악범죄를 두고 못본 채 돌아갈 수 도 없는 진퇴양난에 처한다. 그리고 바로 이게 <마인드헌터>가 그리는 인물과 세계의 입체적 관계다.
말하자면 <마인드헌터>는 스스로를 완전히 분해해 자신의 장르적 한계를 폭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반대로 그 관습과 쾌락에 온전히 몸을 내맡기는 것도 않으면서, 중도적(?) 해체주의 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이 모호함이 가득한 인물관, 나아가 세계관 속에는 불가능성과 불확실함, 미완의 감각, 찜찜함 같은 것들이 잔뜩 서려있다.
그래서일까. 시즌2가 흘러가면서 조금씩, 아주 천천히 판타지적 탐정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 해체되어가는 홀든에게 시즌1에서 보여줬던 비범함만으로는 해결불가능한 사건이 주어진다. 시즌2의 중심사건인 애틀랜타 아동 실종사건은, 시즌1 속 서스펜스의 뼈대였던 취조와 추리만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사건이다. 여기엔 범인의 존재와 별개로, 사건의 안팎을 둘러싸고 있는 인종과 계급의 문제, 미국이라는 거대한 땅의 지리적 정치의 문제 등, 탐정이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즌2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범죄자, BTK라는 신출귀몰한 변태살인마는 홀든이 그간 상대해왔던 에드 캠퍼와 찰스 맨슨 등과 함께 사이코패스 리스트에 올릴 법한 인물이건만, 작품은 결국 그를 검거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만다. 그렇다면 이것은 홀든 개인의 실패일까? 혹은 탐정 장르의 근원적 한계인가? 어쩌면 홀든이 시즌2의 시작에서 부터 무너지고 만 것은 ‘BTK’라는, 지미 카터 시대엔 잡을 수 없었던 실제범죄자가 등장하면서부터 예견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인드헌터>는 존 더글라스의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삼아, 이미 죽었거나 수 십년째 감옥에 갇혀있는 20세기 흉악범들을 마치 눈 앞에 나타난 듯 생생하게 출현시키고 그들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들의 속을 엿보는 것은 우리에게 자극과 흥미진진함을 선사하며, 무엇보다 인간의 근원적 한 측면을 파악한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당신도 이미 알고있듯이, 우리도, 홀든도, 혹은 세상 누구도 다른 이의 총체를 완벽하고 온전하게 알 수 없다.
“우리 행동의 이유는 뭘까요?” 시즌1 1화에 새겨진 홀든의 질문. 결국 우리는 여기로 되돌아온다. 이 짧은 말에서 출발한 <마인드헌터>는 비범한 추리력을 갖추고 강건히 이해불가한 인간의 심리를 탐험하지만 결국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회귀한다. 짧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은 질문. 어쩌면 <마인드헌터>는 이 질문을 제대로 물어보기 위해 이 긴 여정을 떠난건 아닐까? 그렇게 홀든은 탐정이지만 탐정이 아니게 되고, 감정 없이 건조하던 그의 동공엔 불안이 가득 찬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미궁으로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