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인드헌터>에는 악명높은 살인자들과 사건 사이의 인과를 규명하려는 자가 등장하지만, 정작 살인이 벌어지는 현장은 없다. 오직 사후의 ‘진술’만이 있을 뿐이다. 단지 윤리적 측면에서 살인의 현장을 묘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엔 부족하다. 대신 이 텅 빈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대화다. 살인마의 입을 통해 묘사된 사건의 현장은 어쩌면 직접적인 시각 정보를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은밀하고 충격적이다. 적나라한 신체 훼손과 폭력, 강간, 급기야 살인과 사체 처리의 과정까지. 그간 살인 사건을 압축적인 이미지로 접해왔던 관람자에게 살인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해하고 싶지 않은, 넘치는 정보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빌 텐치는 번민한다. 시즌1 1화에 등장한 빌의 대사(그걸 이해하면 우리도 비정상적인 거고. -If we understood it, we’d be aberrant, too.)는 살인마의 비정상적인 일탈 행위가 애초에 이해 가능한 대상이 아니라는 그의 입장을 드러내는 동시에 향후 프로파일링이 전개될 양상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프로파일링은 속칭 비정상의 범주로 걸어 들어가는 방식으로써 맺어진다. 예컨대 살인마와의 대화를 거북해하는 빌 텐치의 아이 레벨(eye level)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달라지는데 늘 살인마와 정면으로 마주 앉아 진술을 듣는 홀든 포드와 달리, 빌은 줄곧 다른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시선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대화의 테이블로 진입하기를 회피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조금씩 살인마와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의 기억 속으로 입장한다. 피자를 나눠 먹으며 대화를 나눌 정도로 얼마간의 심리적 장벽을 허문 모습도 비친다. 그러다 후반부 의자 위에 걸터앉은 찰스 맨슨을 완전한 앙각으로 올려다보게 되었을 때는 대화를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 떠난다.
금단의 세계를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할 FBI 요원뿐만 아니라 시리즈의 관람자 모두에게 곤란한 이입이 요구된다. 1960년, 마이클 파웰이 <피핑 톰>을 통해 살인자 시점의 비디오를 펼쳐 두었다면, 2017년의 데이빗 핀처는 살인자의 기억에 관한 진술을 따라 별개의 연상을 유도한다. 진술의 정교함을 차치하고서라도 이를 단지 청각적 정보쯤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사건의 현장이 거의 없다시피 한 <마인드헌터>에서 즉각적인 이미지 대신 핵심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방대한 대화들이기 때문이다.
2.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이해하기. 기억을 되새기는 살인마의 자아 추적에 동행하며 일종의 알고리즘을 만들고, 살인을 촉발하는 결정적 요인(stresser)을 발견하는 것이 요원들이 삼은 목표다. 궁극적으로 이들은 더 이상의 연쇄 살인이 발생하지 않는 미국을 만들길 원한다. 그에 따라 살인자와의 대화를 시작한 직후, 요원들과 살인마의 관계는 연구자와 연구대상이라는 이해관계로 재정립된다. 이는 자기 영향력의 확인이 중요한 살인마들이 대화에 협조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특히 에드 켐퍼처럼 비교적 자기 객관화와 논리적 서술이 가능한 인물인 경우에는 스스로를 동료 연구자 혹은 FBI의 일원에 준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모습도 나온다. 대다수는 알고 싶지도, 알 필요도 없었을 유해한 정보들이 ‘유의미한’ 자료로 소환되었다는 점에서 프로파일링은 당대의 관념을 뒤집어 시작한 불온한 연구로서 출발한다.
여러 측면에서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일반적이지 않다. 대화는 진실과 거짓, 현재와 과거, 이미지와 상상, 세계와 세계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동시 진행되는 탓에 우리를 몹시 바쁘게 만든다. 개별적 사건들의 분석과 합으로부터 어떤 가설을 만들 수 있다면, 이는 사실에 근거한 정보를 통해 규명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감옥에 수감된 살인자들이 직접 자신의 행동을 진술한다는 데에는 진실 아닐 가능성이 반드시 끼어든다. 진실의 외관을 보존하는 CCTV의 기록 현장이 아닌 이상에야, 과거의 경험적 진술에는 불완전함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그에 따라 살인마의 변명과 합리화, 자기 연민과 피해의식 등 다양한 주관적 요인에 의한 짜깁기식 정보가 흘러든다. 아마 대화의 참여자이자 연구자인 요원들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녹음된 대화로부터 일관된 알고리즘을 만드는 해석의 작업 역시 체계적인 과정으로 완수될 리 없다.
최초의 연구대상이 된 살인마 에드먼드 켐퍼는 매우 특별한 인터뷰를 전개한다. 켐퍼는 놀라울 만큼 침착하고 정교한 자기 분석으로부터 유년기의 트라우마, 어머니와의 관계성, 성적 불능의 상태를 진술한다. 그의 입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요인화된 정보는 빌 텐치의 자세를 고쳐 잡게 만든다. 여기에서 녹음기의 등장 또한 그의 진술이 매우 꼼꼼하고 유용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동시에, 녹음 장치는 켐퍼를 비롯한 살인마들의 자아감과 쇼맨십을 북돋우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자신의 진술이 귀한 자료가 되고 있음을 인지하는 살인자들은 연구자, 이야기꾼, 선지자의 역할놀이에 심취해 가는 것이다. 그들의 서술에는 현실의 질서가 작동하는 안온한 세계, 어둡고 은밀한 행위가 전개되는 폭력적인 세계가 뒤섞이는 현장이 등장한다. 잘린 머리들이 든 가방을 옮기는 켐퍼 옆으로 행복한 커플이 지나가는 대목을 듣자마자 홀든은 “두 세계가 충돌했네요. -Your two worlds are colliding.”라며 두 세계가 맞물리는 찰나를 짚어낸다. 두 세계의 겹침 사이에서 살인마와 연구자 사이의 팽팽한 힘의 긴장, 진위가 뒤섞인 혼돈이 이어진다.
3.
이들 대화의 지속은 불가해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그들 세계의 바깥에서, 말하자면 평범한 우리의 대표자로서 존재하던 요원들은 더욱 은밀한 세계로 접근하기 위한 전략을 취한다. 정확히는 홀든 포드가 그것을 행한다. 애초에 계획해 둔 질문지의 매뉴얼 만으로는 세계의 심연에 접근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요원들의 입장을 따라가던 관람자의 차원에서도 일종의 깨짐이 발생한다. 데이빗 핀처는 시종일관 건조하고 엄격한 태도로 대화가 진행되는 장소를 포착하고 있다. 그러나 마주한 두 세계의 대화를 다루는 카메라가 아무리 숏(shot)-리버스 숏(reverse shot)-풀 숏(full shot)을 통해 평등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화면 너머의 관람자는 절대 중립의 상태를 완수하지 못한다. 필연적으로 둘 중 하나의 편에 치우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인드헌터>에는 그 경계가 흐릿해지는 구간이 스며든다. 무참한 살인이 벌어지는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빌리는 홀든의 태도가 완고한 두 세계의 깨짐을 만들고 관람자의 위치 또한 어지러이 교란되고 만다.
에드 켐퍼 만큼 솔직하지는 못한 살인마 브루도스의 경우, 진술 속에서 살인의 행위자를 ‘그-he’와 ‘그 살인자 -the killer’로 호명하며 객체화한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사건은 그 자신과 무관하나 살인자의 심리 추론은 얼추 가능한 영역이 된다. 이렇게 자신의 세계를 열어낼 생각이 없는 브루도스에게 홀든은 그들 세계와 유사성을 갖는(살인마에게 결정적 요인이 되었던 수치심과 유사한) 자신의 기억을 꺼내 놓는다. 이러한 홀든의 행동은 전략이라기보다 거스를 수 없는 직관에 의한 행위처럼 보인다. 협조적이지 못한 대담자 리처드 스펙을 만나면서 홀든은 더욱 대담해진다. “물오른 조개 여덟 개를 누구 마음대로 없애요? -What gave you the right to take eight ripe cunts out of the world?” 지금까지 반응을 보이지 않던 리처드 스펙은 홀든의 말에 처음으로 동요를 보이더니, 조금씩 대화의 물꼬를 트는 듯하다가 손안의 새를 프로펠러 속에 던져 버리곤 스스로 대화를 종료한다.
그들 세계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발견한 홀든은 자신감이 붙으면서 추동력을 얻는다. 그리고 점차 위험해져 간다. 그가 선택한 방편은 공적인 차원에서의 윤리적이지 못할지언정 충분히 실효적이다. 하지만 그가 프로파일링 능력을 발휘해 갈수록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해방감이 아니라 불안이 찾아온다. 엄연히 각자의 영역을 유지하던 두 세계가 교묘히 섞여들며 간격을 좁혀가는 것이다. 자신의 스토리텔링에 도취한 살인마의 우월감과, 악명높은 살인마와의 만남을 무용담처럼 흘리는 홀든의 나르시시즘 사이에는 얼마큼의 거리가 있을까. 스스로 완성한 당위로 살해라는 사명을 행하는 살인마와, 직관을 따라 종종 위험해지며 시야를 잃고 돌진하는 홀든 사이의 거리는 어떨까. 수시로 대화의 주도권을 낚아채는 살인마의 독특한 언어 습관과, 동료의 말허리를 끊어내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홀든 사이는 또 어떨까. <마인드헌터>의 홀든은 갈수록 믿을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의 모습이 되어 간다.
4.
대화의 명백한 주연이 살인마이고 개별적 시퀀스를 그들 각자의 쇼라고 부를 수 있다면, 찰스 맨슨의 무대는 우리를 완전히 압도하는 쇼에 다름 아니다. 맨슨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의자 등받이에 걸터앉아 요원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점유한다. 사랑(love), 원(circle), 자유(freedom), 반영(reflection)···, 각종 추상어의 퍼레이드와 다분히 교조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맨슨의 철학이 대화의 테이블 위에 구현된다. 왜소한 체격의 그가 어떻게 패밀리의 선지자로 군림할 수 있었는지는 얼핏 감지할 수 있겠으나, 어떻게 그가 끔찍한 살인을 간접적으로 행할 수 있었는지를 납득하기엔 너무나 아득한 거리가 있다. 이 아득한 현기증은 그의 설교와 몸짓을 담는 생소한 앵글과 무대 속에서 압도되어 가는 감각이다. 입양아들 브라이언의 일로 혼란스러운 빌의 상태를 마치 꿰뚫고 있기라도 한 듯한 맨슨의 설교를 수비하지 못하게 되자 빌은 분노하며 대화를 중단한다.
맨슨과의 인터뷰 이후 빌과 홀든의 표정은 패닉 상태에 가까워진다. 범죄자의 행동 양식을 성문화하겠다는 통제 욕망이, 불가해한 사이비의 영향력 앞에서 무용해짐을 알아차리는 표정이다. 그 여파 때문인지, 분명 맨슨보다 명료하고 차분한 대화가 벌어지는 텍스 왓슨과의 인터뷰에서는 환각적인 느낌까지 받게 된다. 맨슨에게는 그의 생각이 내 생각인양 믿게끔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현재의 왓슨에게 그러한 통찰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만약 맨슨을 만나지 않았다면’이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도출하지 못한다. 자기 안에 도사린 분노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왓슨은 자신의 신념 체계를 찰스 맨슨으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양하고, 이미 회개한 뒤였다.
수십 수백 번의 칼을 의식 없이 휘두르던 그 날의 진술을 듣는 동안 홀든의 얼굴은 공포로 물들어 간다. 그리고 이따금씩 대화와 무관한 사람들이 그들 옆을 지나쳐 간다. 이 대목에서 생성되는 기이한 감각은 시즌1의 초반부 에드 켐퍼와의 대화에 언급되었던 두 세계의 마주침을 상기시킨다. 두 세계 사이에 낀 홀든은 왓슨의 생생한 묘사 속을 거닐며 바로 옆에서 존재하는 현실을 인식한다. 이 순간 홀든이 두 세계 가운데 어느 쪽을 생경하게 인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대화 바깥으로 빠져 나와 할 수 있는 상상은 오직 이해와 통제가 불가능한 영역이 던진 아득한 심연뿐일 것이다.
맨슨과의 대면이 있기 직전, 에드 켐퍼가 전한 충고는 다음과 같다. “당신들이 쫓는 자는 환상에 압도된 삶을 살고 있어요. 자신이 한 짓에 대한 환상, 하고 싶은 짓에 대한 환상,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한 환상. 그 꿈들이 그자를 삼켜 버리겠죠. -This person you’re after, he has an overwhelming fantasy life. Fantasies of what he’s done, what he wants to do, how he’s going to improve. These dreams will consume him.” 켐퍼가 말하는 환상이 정말로 BTK 살인마를 압도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 환상을 홀든의 환상이라고도 말해볼 순 없을까. 거부하고 싶지만 헌터와 헌터, 두 세계 사이의 모호한 중첩에 자꾸만 신경이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