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이즈라 하더라도

landscapers

1.

<마인드헌터>는 패턴을 찾는 게임이다. 연쇄살인자들의 행동을 조사하고 분석하여 그곳에서 패턴을 찾고, 그것을 기반으로 미해결 살인사건의 단서를 추적한다. 패턴을 발견하고 의미화하는 것은 패턴 간의 상호 관련성을 찾는 일이자, 우발적으로 보였던 패턴을 필연적인 것으로 위치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필연은 어떠한 조건이 만족되면 반드시 일어나는, 대안적 가능성이 없는 사물 현상을 가리킨다. 사람의 죽음처럼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현상인 것이다. 이처럼 <마인드헌터>의 게임 또한 ‘반드시 그러할 것만 같은 일’을 추적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게임에서 패턴의 오류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패턴에는 간섭, 장애, 버그와 같은 오류가 섞인다. 노이즈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게임의 핵심은 노이즈를 걸러내고 유의미한 정보들을 캐내어 패턴으로부터 필연을 추출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인간의 정신과 달리 세계와 자연은 기계에 불과하다. 알고리듬대로 명령만을 수행하는 것이다. 모든 활동은 이미 주어진 법칙에 따라 결정되고, 이상 징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미리 설정된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인류가 20세기에 진입하면서 이러한 세계관의 도식은 점차 통하지 않게 되었다. 과거에는 명령이 에너지양으로 조절되었고(인력, 혹은 증기 기관), 정형화된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명령은 신호의 패턴이 되었다. 되풀이 해서 실행하도록 이루어진 명령이 형성된 것이다.1 하지만 그러한 패턴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명령은 필연적으로 일부분 손실되었고, 기계는 그러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작동해야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렇게 명령이 일부분 손실된다는 것은 신호 전송 과정에서 노이즈에 의해 간섭받고 변형될 가능성과 마주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기계는 정보를 확률적으로 포착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정보에 대한 판단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in-formation’으로서 정보는 데이터에 형태가 부여된 것이다. 이렇게 데이터를 형태화하기 위해서는 식별과 반복 전달이 필요하다. 설령 명령의 내용이 노이즈와 섞여서 기계를 통과하더라도 명령과 노이즈의 형태를 식별할 수 있는 특성을 정식화해야 하며, 전달 장치를 통해 반복적으로 정보를 실어나름으로써 정보량이 서로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2 바로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반복 전달’을 통해 확률을 도출하여 ‘노이즈를 거르고’ 암호를 해독하는 일이다.

이렇게 노이즈라는 열쇠 말이 떠오른 것은 나에게 <마인드헌터>가 제법 참을성을 요구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작품을 재미없게 본 것은 아니다. 재미없게 보았다면 앞서 1부와 같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마인드헌터>는 분명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시리즈다. 하지만 조금은 지루할 법한 과정을 인내하고 보아야 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누아르와 범죄스릴러 형태를 띠면서도 긴박한 액션 시퀀스나 자극적인 시각적 충격이 보이지 않고, 오직 인물들의 대화와 표정, 몸짓의 반복을 인내심 있게 지켜보도록 한다. 그래서 작품의 초점은 액션이나 충격보다 반복적 정보 수집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이즈와의 대결에 놓인다. 그리고 노이즈와의 대결은 때때로 승리를 확인하게 하면서도 많은 경우에 좌절을 안긴다. <마인드헌터>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그 지난至難한 과정을 조금은 지난持難한 방식으로 보여주기로 선택한 것 같고, 그런 점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그것을 유의미한 정보로 만들어내는 행위의 필연적 측면을 우리에게 경험하도록 한다. 노이즈, 노이즈, 노이즈의 연속들. 거르고, 거르고, 거르는 행위들의 연속들. 정식화하고, 정식화하며, 정식화하는 판단의 연속들. 그렇게 노이즈와 대결하며 외견상 우연적인 개별 사건들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바로 그 행위의 필연적이고 시공간적인 조건이 <마인드헌터>의 중심축으로 자리한다.

2.

<러시아 인형처럼>을 말하기 위해 조금 돌아왔다. 이 시리즈는 꽤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만한 <사랑의 블랙홀>이란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반복된 죽음을 겪고, 비슷한 일상을 반복하고, 끝내 어떤 깨달음을 얻어 그 반복에서 탈출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리즈와 영화라는 점 이외에 이 두 작품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우연과 필연을 드러내는 방식과 더불어 인물의 변화를 끌어내고 노이즈를 출현시키는 방식에 있다.

<사랑의 블랙홀>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서, 무뚝뚝한 남자가 반복된 죽음과 일상을 통해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남자가 되어 끝내 사랑을 쟁취한다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즉, 주인공은 ‘재수 없는 놈’에서 ‘선량하고 친절한 사람’이 된다. 여기서 노이즈는 시간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남자의 ‘재수 없음’이 영화와 세계의 노이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노이즈를 변화시키고 소거하는 결말로 나아간다. 마치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러시아 인형처럼>의 주인공 나디아는 그렇지 않다.

그 차이는 성격 변화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사랑의 블랙홀>의 남자 주인공이 성격 변화를 일으켰다면 <러시아 인형처럼>의 나디아는 변하지 않는다. 물론 반복과 시간 여행을 거치며 과거에 대한 관점이 수정되거나 변하기는 한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관점 변화와 나디아 그 자체의 변화는 조금 다른 문제다. 시즌 1 처음부터 시즌 2 끝까지 나디아의 성격은 그대로 유지된다. 나디아는 하루 2갑의 담배를 끊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고, 마약류에 대한 도덕적 죄책감도 딱히 보이지 않으며, 특유의 시니컬하고 불친절한 말투를 비롯하여 옷 입는 스타일과 머리카락 모양새도 그대로다. 그것은 나디아의 (연인은 아닌) 운명적 파트너, 앨런도 마찬가지다. 앨런은 강박적으로 청결에 집착하는 성격을 고치지 않으며, 특유의 꼿꼿한 자세도 그대로 유지한다. 이와 같은 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나디아는 세계의 노이즈로 간주될 법한 자기 자신이나 자기 엄마, 자기 과거에 대한 태도를 변경하고, 앨런은 애인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태도를 변경한다. 이는 그들 그 자체가 세계의 노이즈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노이즈로 여기게끔 하는 개인적 상황과 역사에 대한 태도가 노이즈라는 점을 전한다. 이처럼 두 사람의 시각적 형상이 변화하지 않는 것과 삶에 대한 태도가 변하는 것 사이의 이질성은 이 작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시즌 1에서 나디아가 똑같은 시간대를 반복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나디아의 삶에서 일종의 버그다. ‘버그’라는 은유는 컴퓨터 게임 프로그래머라는 나디아의 직업과, 회사에서 직접 버그를 간단히 지워버리는 그의 능력을 통해 분명하게 암시된다. 화장실에서 날아다니는 날벌레 또한 그러한 암시를 직접적으로 지시한다. 나디아와 앨런은 말 그대로, 그리고 비유적인 의미에서, 그러한 버그를 찾아서 제거하거나 그것에게 필연이라는 운명을 안기려 한다. 그래서 나디아는 자신의 생일을 기점으로 벌어진 일들을 되짚어 나간다. 어딘가에 이 일의 원인이 되었던 계기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그는 그들을 피해 미끄러져 나간다. 앨런은 매번 다시 살아날 때마다 죽여 없앴던 화장실 벌레를 더 이상 죽일 수 없게 되고, 나디아도 화장실 안에서 벌레를 잡지 못한다.

우리 삶 속에서 벌레의 출현은 우연으로 경험된다. 물론 양자적 규모로 들어가면 그 출현의 필연적 과정을 추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21세기 과학 기술은 그러한 필연성을 도출하기 위해 애쓴다. 그런 점에서 시즌 2가 양자역학적 시공간 연속체를 경유해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은 이 시대에 필연적으로 터져 나오는 현상처럼 보일 정도다. 이는 시즌1이나 시즌2 모두 우연과 필연에 대한 21세기 인간들의 경험을 분명하게 횡단하고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

그렇다면 버그로서의 반복과 시간 여행을 지켜보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위해 우선 우리가 짚어야 할 것은 나디아와 앨런의 사건이 우리에게 우연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시즌 1에서나 2에서나 우리는 왜 하필 나디아와 앨런에게 그런 일들이 벌어진 것인지 알지 못한다. 물론 시간 반복 경험이 두 사람의 현재와 과거를 반추하게 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현재와 과거가 그 일의 원인으로서 주어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최종 목적지에 이르러 우리가 사후적으로 필연적 원인을 지목하는 일이기도 하다. ‘깨달음을 위해(!)’ 시간 반복이 일어났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목적론적으로 원인과 결과를 연관시킨 것이지,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정확하게 설명해주지 못한다. 나디아와 앨런의 경험은 철저히 우연적 사건이다. ‘왜 하필’ 두 사람이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지 우리는 설명하기 힘들고, ‘왜 하필’ 그 도시의 수많은 다른 사람 말고 그 두 사람이 그 경험을 하게 되는지 이 작품은 말하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도시인이 어찌 두 사람뿐이겠는가. 그러므로 <러시아 인형처럼>의 더 큰 지도 안에서 나디아와 앨런의 경험은 ‘그렇지 않을 수 있었던’ 가능성 중 하나로서 우리에게 제시된다. 이는 그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혹은 우리 또한 그 가능성에 속한다는 점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을 알린다.

그러한 가능성 속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기이한 인물을 만난다. 바로 노숙자 호스다. 시즌1에서 나디아는 호스가 시간 반복의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하지만 호스는 사건 해결에 어떠한 도움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혼란스럽게 한다. 그런데 그 혼란은 그가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호스는 의도치 않게 나디아의 시간 반복 게임에서 중요한 교란자로 나타난다. 즉, 그는 마치 게임의 버그이거나 이스터 에그처럼 이 시리즈 내부에 일종의 노이즈로서 배치된다. 없어도 되는 존재, 혹은 없었으면 하는 존재이면서도 언제나 유령처럼 시스템 구석에 달라 붙어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게임 시스템 내부에서 해소되지 않은 상태로 교란자(혹은 노이즈)라는 지위를 유지한다. 이 시리즈가 게임에 무작위적 간섭을 일으키는 존재를 그대로 존속시키는 것이다.

호스로부터 암시되는 ‘교란자(혹은 노이즈)의 존속’은 시즌 2에서 과거의 인물들, 특히 나디아의 엄마 노라를 통해 이어진다. 노라는 나디아 뿐만 아니라 시종일관 우리에게 불안을 안긴다. 그의 돌출 행동이 나디아를 상처입히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우리는 그가 나디아에게 적합한 엄마로 교정되기를 은근히 바라게 된다. 그런 점에서 노라 또한 우리에게는 노이즈로 자리한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끝내 노라를 교정하기보다 나디아로 하여금,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노라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요청한다. 즉, 우연한 것들을 필연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의 체계 내부에서 제거되어야 할 노이즈를 소멸시키기보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이처럼 <러시아 인형처럼>은 사건의 발단과 결말을 모두 우연하게 해결하도록 두면서 필연적 계기들을 찾고, 그 계기를 또 다른 필연적 계기로 만들어 내려는 시도와 화해하며 우연적 사건들의 연속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노이즈 제거’가 최대 관건이 되는 현대 미디어 기술 환경에서, <러시아 인형처럼>은 (넷플릭스로 재현되는) 그러한 환경의 도움을 얻어 역설적으로 노이즈에 대한 인정을 역설한다. 관습적이면서도 과감하게, 냉소적이면서도 익살스럽게.


  1. 조성배, ‘인간과 기계를 통합시킨 사이버네틱스’, 『과학동아』, 1998년 01호,124쪽 ↩︎

  2. 클로드 섀넌, 『수학적 커뮤니케이션 이론』,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141~165쪽 ↩︎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