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조작된) 추억을 사랑하겠어!

Wanda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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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링클레이터를 두고 영화가 지닌 시간성을 언급하지 않기란 어려울 것 같다. 그는 시간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루는 감독이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비포 시리즈’, <보이후드>(2014)는 일정하게 압축된 시간 동안 변해있는 인물들을 통해 시간 그 자체를 감각하게 만들기도 하고, 다른 축에서는 자신의 실제 추억과 뒤섞인 게 분명한 영화들, 그러니까 <멍하고 혼돈스러운Dazed and Confused>(1993), <스쿨 오브 락The School of Rock>(2003), <에브리바디 원츠 썸!!Everybody Wants Some!!>(2016) 등으로 과거에 대한 낙천적 향수가 가득한 영화를 만든다. 이때의 시간성은 이제는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과거의 시간, 그리고 우리가 이른바 ‘추억’이라고 부르는 시점을 재현한다. 이렇듯 그가 구현해내는 시간성은 전혀 다른 성질을 띠는 듯하지만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바로 지나간 시간에 대한 ‘윤색’이다. 물론 영화의 재현에 있어서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기억이나 존재에 대한 윤색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시간을 영화로 포획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수행할 수밖에 없는 이 윤색이라는 행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감각하게 만든다.

1.

윤색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아주 단순하게도 ‘로토스코핑rotoscoping‘이라는 1차원적 기법으로 ‘기억의 윤색’을 재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재현을 가능하게 만든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이전의 작품에서도 로토스코핑을 여러 번 활용해왔는데, 모두 과거와 결부되어있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아폴로 10 1/2-스페이스 에이지 어드벤처Apollo 10 1/2: A Space Age Adventure>(이하 <아폴로>)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이전의 로토스코핑 작품을 살펴보자면, 상상의 이야기를 기반에 둔 영화(<스캐너 다클리A Scanner Darkly>(2006))거나 삶에 대한 선문답(<웨이킹 라이프Waking Life>(2001))의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그동안 자신이 관심 있는 세계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나누어 표현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는 앞서 말한 시간성의 압축이라던가, 추억에 관한 노스텔지어, 로토스코핑 등 전혀 다른 성질의 영화들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그런 측면에서 <아폴로>는 이러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세계의 교집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교집합을 이끄는 중핵이 바로 ‘기억의 윤색’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내가 관심을 가지는 점은 로토스코핑이라는 기법 자체보다는 ‘덧씌워진다’라는 행위다. 그동안 그가 집중했던 시간성에 로토스코핑 기법을 ‘덧씌운다’라는 행위의 결합 말이다. 로토스코핑 기법 자체도 덧씌워지는 행위임을 감안한다면, <아폴로>는 이중의 덧씌움 상태를 전제로 작동하는 세계다. 이와 같은 상태는 모종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아폴로>를 보며 분명 애니메이션으로 인식하지만, <아폴로>는 내레이션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과거를 상기시키는 방법을 취하고, 로토스코핑이라는 기법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실사로 과거의 모습을 재현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배우들의 얼굴도 나오기에 우리의 믿음은 더 강화될 것이다.) 설령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증언하는 과거의 추억들에서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아폴로>는 정말로 실사로 과거를 재현할 필요가 있었을까? 실제로 촬영 현장 역시 블루 스크린 안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디테일한 세트나 소품들을 애니메이션으로 덧씌우는 형태로 제작된 점을 생각해본다면, <아폴로>는 실사의 이미지를 빌어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관념적 형태와 증언으로 과거를 재현한 것에 가깝다. 물론 이 자체는 그다지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있으나, 우리에게 마치 실제의 이미지로 현전하게 만든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이런 이유로 <아폴로>에서 주인공이 말하는 60-70년대 미국의 모습은 사실 불분명한 이미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부분적인 사실과 주관적인 추억에 기반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점은 매우 의미심장한데, 인간이라면 왜곡할 수밖에 없는 기억과 그 기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영화의 한계를 피하지 않겠다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의지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아폴로>만큼 ‘추억은 미화된다’라는 표현이 적합한 영화가 있을까. 영화는 60-70년대 미국의 온갖 역사 문화적 요소들, 이를테면 우주 경쟁이라는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가족끼리 모여 앉아서 보는 시트콤, 학교의 분위기 등 소소한 문화적 기억들까지 총동원하여 감독 자신의 추억(이라고 추정되는)을 재현해낸다. 영화를 둘러싼 반응도 그래서 흥미롭다. <아폴로>를 혹평하는 이들이나 상찬하는 이들이나 공통적으로 말하는 요소는 당연하게도 ‘추억’이다. 추억을 효과적으로 재현했기 때문에 칭찬받기도 하며, 추억’만’ 재현했기 때문에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추억만큼이나 중요한 건 <아폴로>가 자신의 한계성을 결코 회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기억의 불확실성, 시대에 대한 나이브한 시선, 의도치 않게 관객을 기만할 수도 있는 가능성까지 내포하며 추억이라는 존재 자체를 풀어낸다. 어쩌면 자신의 추억조차 조작될 수 있음을 <아폴로>는 로토스코핑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폴로>는 추억의 물성을 구현하여 우리에게 감각시키고자 하려는 것만 같다. 이러한 시도가 바로 ‘덧씌워지는’ 행위로 구현하는 ‘기억의 윤색’ 그 자체다.

2.

<아폴로>가 구현하는 윤색에 대하여 또 하나 얘기해 볼 만한 지점이자, 관객들이 영화 전체를 오해하지 않도록 만드는 장치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영화는 <아폴로>가 대체 역사물적 성격을 띤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지시한다. 영화에서의 스탠(마일로 코이/잭 블랙)의 행보―아폴로 11호 이전에 달착륙에 성공한 청소년이 있었다는 식의 일―가 실제로 벌어졌으리라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스탠이 꿈을 꾼다는 듯한 암시를 영화가 반복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꿈인지 실제인지 확정 짓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꿈이야말로 ‘윤색’이라는 행위가 가지는 성질을 그대로 구현한 존재이지 않은가. 같은 듯 다른 듯, 같고도 다른 세계. 이는 앞서 설명한 <아폴로>를 구성하는 성질을 생각해봤을 때 상당히 이상한 요소이기도 하다. 영화는 정교한 기교로 디제시스가 만들어낸 시(時)점에 빠져들게 하여 착각하게 만들어놓고는, 정작 내러티브에서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기 때문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대체 역사적 내러티브의 활용을 볼 때 <아폴로>가 시대적 고증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영화가 고증에 관심이 없다면 과거를―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과거를―소환하는 일은 분명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 역사적 내러티브는 <아폴로>의 세계를 우리가 익히 아는 세계와 닮은 듯 다른 세계로 만들고, 우리가 추억이라 말하는 존재가 일정 부분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조작을 가능케 만드는 존재가 영화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 순간 우리는 <아폴로>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로를 지시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고, 그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된다. 세계 안에서 서로를 지시한다는 말을 좀 더 살펴보자. 대체 역사적 내러티브는 로토스코핑 기법을 지시한다. 로토스코핑 애니메이션은 우리가 아는 세계를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엄연히 다른 세계를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로토스코핑은 다시 대체 역사성을 지시하게 되는데, 앞서 쓴 대체 역사의 특징, 같고도 다른 세계의 물성과 닮아있다. 그러니까 <아폴로>의 중추를 구성하고 있는, 즉 ‘우리가 알고 있던 기억의 이면에 있는 전혀 다른 가능성’의 존재를 로토스코핑 기법이 암시하고 있다면, 대체 역사 내러티브는 이러한 존재를 직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은 기억이 윤색되는 행위의 물성이기도 하다. 이렇듯 로토스코핑 애니메이션 기법이―기억을 윤색하는―세계에 내재된 속성이라면, 대체 역사적 내러티브는 그 세계를 실현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기억의 윤색’이 리처드 링클레이터 세계의 중핵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3.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질문 하나가 남겨진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기억의 윤색’ 그 자체를 구현한 <아폴로>를 통하여 무엇을 시도하는 것인가? 그러나 여기서 그에 대한 답은 질문의 방향과는 어긋날 것이다. <아폴로>에게 ‘왜’라는 질문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추억이 이토록 불완전하고 스스로를 속이기도 하며, 타인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도록 위장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추억을 인정하고 사랑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 때문이다. 비록 조작된 추억일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기억이 있다면 성립 가능한 사랑, <아폴로>는 그야말로 ‘나의 (조작된) 추억을 사랑하겠어’라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선언이자 고백이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태도는 영화라는 환영을 대하는 자세와 연결된다.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화들은 누군가의 왜곡되거나 조작된 기억을 기록한 것은 아닐까? 우리가 꿈이나 상상으로 부르는 현상도 결국 나라는 존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아폴로>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영화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기도 하다. 그의 영화가 종종 시간을 감각하게 만들려고 시도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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