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방이 디스플레이 화면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 한 인간이 눈을 뜬다(S12E: ‘핫샷’ 15 Million Merits). 자연의 빛이 전혀 새어들지 않는 갇힌 공간. 하지만 갇힌 감각은 곧 화려한 자연의 아침을 닮은 디스플레이의 환한 빛 속에서 해갈된다. 여기서라면 원하는 풍경 속에서 아침을 맞이할 수도 있고, 완벽한 어둠과 고요 속에서 잠을 청할 수도 있다. 눈앞의 화면을 리모컨으로 조종하기만 하면 웬만한 욕구는 편리하게 해결된다. 디스플레이의 작동이 멈추지 않는 한, 미래 사회의 일상은 그렇게 시각의 해방을 이뤄내는 듯했다.
그러나 우리의 아담한 디스플레이 한 칸에 방이 폭 담기자마자 이곳의 시스템은 전능한 시야와 함께 지배당한 육체의 광경을 포착하게 된다. 디스플레이에 펼쳐진 무엇에 따라 단칸방은 우주처럼 무한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음에도 이 감각은 철저히 시각에 묶여 있다. 그렇지 않다면 디스플레이가 방의 각 면을 빈틈없이 점거하고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눈을 뜬 자의 방을 관망하는 넷플릭스의 시청자는 기술의 화려함, 두 평 남짓한 단칸방의 남자를 동시에 목격한다. 이를 신체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봐야 좋을지, 포위당한 신체라고 봐야 좋을지 아리송해진다. 스크린과 리모컨을 가진 남자는 하루 대부분을 침대 위에서 보내도 문제없다. 단, 포르노의 유료 결말에 관심을 가지지만 않는다면. S1E3, 기억을 되감거나 재생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한 ‘당신의 모든 순간The EntireHistory of You‘에서는 디스플레이와 눈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거리마저 삭제되어있다. 이들의 눈은 곧 카메라이자 디스플레이다. 사실관계를 정확히 보기 위해 현실을 저장하는 장치도 된다. 그러니까 이때 눈은 인간의 육체이면서 동시에 기계다. 이 에피소드는 사소한 기억의 오류들을 바로잡는 대신 잊히는 편이 더 나았을사실들과 씨름하는 인간이라는 예상 가능한 전개를 보여준다. 다만 기억에 접속한인간의 모습이 쉽게 잊기 힘든 기묘한 인상을 부추긴다. 여기에 펼쳐진 기억은 무의식에 의해 추상화되거나 곡해된 기억이 아닌, 정확히 촬영된 형태의 이른바 포착 기억이다. 이 기억을 되감고 재생하며 일시 정지, 확대, 속도 조정을 하는 인간의 동공은 희뿌연 색으로 변해있으며, 따라서 눈앞의 시야는 차단된 것처럼 보인다. 그에 따라 화면 바깥에서 여전히 흘러가는 중인 현재는 그 순간 소환된 기억으로부터 완벽히 밀려나 있는 모습이다. 당장 눈앞의 시야는 물론이고, 그 외부 감각 기관인 피부와 같은 부위들은 철저히 외면당한 상태다. 각자가 내 말이 옳다고 우기는 동안에도 우리가 목격한 자의 동공은 현실이 아닌 허공을 향해있다. 미래 사회를 표상한 <블랙 미러> 시리즈가 아니었다면, 허공을 응시한 채 읊조리는 자의 모습은 환영에 휘감긴 자에게서나 보던 이미지였다. 기억을 재생하는 즉시, 그들은 시각을 잃어버린 눈먼 자의 형상이 되어 있다.
2.
이는 ‘지금’ 이외의 다른 시점으로 이동한 그들이 단순히 비주얼적 쇼크를 던질 뿐아니라 다시 보기를 선택한 데서 비롯된 모습이 스스로 신체 능력의 일부를 포기한광경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다. 또한 이는 물리적으로 훼손된 신체가 아닌 진보적 기술에 입각한 미래의 상이라는 점을 곱씹어볼 만하다. 특히 이 눈먼 자의 모습은 다른 에피소드에서 좀 더 심화된 형태로 다시 등장한다. ‘USS 칼리스터U.S.S. Callister’(S4E1)의 게임 설계자 ‘데일리’는 회사의 실질적인 두뇌를 담당하는 프로그래머임에도 불구하고 직원들과 사회적인 관계 맺기에 거듭 실패하는 인물이다. 그는 사회적 관계의 균열을 마주할 때마다 직접 프로그래밍한 게임에 접속해 그들의 DNA를 복제한 캐릭터들의 캡틴으로 군림하는 플레이를 한다. 악취미가 벌어지는 현실 너머의 공간에서 각종 롤플레잉으로 복종하는 사람들을 관람하는 재미와는 달리, 게임에 접속한 데일리의 신체는 그 순간 무방비 상태로 컴퓨터 앞에 축 늘어져 있다. 에피소드 ‘당신의 모든 순간’과 마찬가지로 동공은 희뿌연 빛으로 돌변했다. 이때 데일리는 단지 시야만을 기계에 의탁하지 않고 의식까지 너머의 다른 세계로 접속한 상태다. 그로 인해 게임을 하는 동안 데일리의 육체는 흡사 코마상태처럼 보인다. 이토록 신체의 취약한 상황은 그가 욕망을 실현하는 순간에 현실 세계의 역습을 당하는 데서 나타나는 극의 귀결과도 조응한다. 가상현실 철권 게임에 접속한 S5E1의 ‘스트라이킹 바이퍼스Striking Vipers‘의 대니와 칼의 모습도 견주어볼 만하다. 유부남이 된 대니가 칼로부터 선물 받은 최신형 의 철권은 시각뿐 아니라 의식마저 영상 내부에 의탁한 채로 즐기는 게임이다. 그들도 칼리스터의 데일리처럼 관자놀이에 수신기를 장착하자마자 소파에 늘어져 눈먼 얼굴을 하고 있기는 매한가지다(<블랙 미러> 시리즈는 에피소드와 에피소드를 느슨하게 엮어 기시감을 주는 장치를 자주 사용한다). 게임 속 캐릭터에 의식을 보낼 수 있게 된 대니와 칼은 실제와 맞먹는 타격감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대결하고, 탐닉하고, 밀애를 나눈다. 현실과 다른 성별, 인종, 생김새가 되어 즐기는 쾌락은 게임 밖의 현실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고 점차 현실보다 나은 가상공간의 감각에 매달리는 증상을 겪게 된다.
디스플레이에 포박된 신체의 무력감, 가상현실에 위탁한 육체의 유사 코마를 목격하며 이 미래의 광경을 ‘육체의 죽음’처럼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육신은 여기 있으나 정신은 없는 상태, 청각과 촉각은 여기 있으나 시각은 완전히 압수당한 상태. 이를 인간 스스로가 선택한 행위라고 한다면 신체가 스스로 죽음을 모방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그들은 죽음과도 같은 가수면 상태에서 요지경을 보지만, 접속하지 않은 제3의 눈(시청자의 눈)으로 보는 그들의 모습은 그저 편치 않은 잠을 자는 사람이며, 스스로 그러한 형벌에 처해버린 자의 모습일 뿐이다. 그들은 자꾸만 현재를 죽인 채로 허상 속에서만 깨어나려 한다. 이러한 연쇄 사이에서 드는 질문이란, 왜 <블랙 미러>는 미래적인 기술의 풍경 속에서 연거푸 ‘죽음’이라는 관념을 연상케 하느냐는 것이다.
3.
단일한 에피소드의 나열로 이루어진 <블랙 미러> 시리즈에서 유독 반복적으로 다뤄지는 대목이 있다면, 종종 등장인물들이 사자(死者)를 불러오기 위해 기술을 사용한다는 맥락이다. S2E1의 ‘돌아올게Be Right Back‘에서는 죽은 남편을 대신해 감쪽같은 인공지능 로봇과 함께 사는 여성의 이야기를, S3E4의 ‘샌 주니페로SanJunipero‘에서는 늙고 병들어가는 몸을 대신해 디지털의 영역에서 영원한 젊음의 삶을 이어가는 세상을 보여준다. S4E6의 ‘블랙 뮤지엄Black Museum‘에 이르면 불의의 사고로 의식을 잃은 여성이 남편의 뇌에 살며 공동 육아를 할 수 있게 된 진풍경을 묘사한다. 인간으로 사는 삶의 최종장인 죽음마저도 극복할 수 있게 된 기술을 전제하고 있는 광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급부인 ‘현실의 죽음’을 몹시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블랙 미러> 시리즈가 죽음을 극복하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육체는 의식을 운반할 뿐이라는 토대 위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동시에 육체를 버리고 생존한 의식이 일종의 데이터에 불과하다는 인식 역시 여러 에피소드 속에서 부각되며 양자는 충돌한다. 의식과 육체를 끊임없이 분절해내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갈라진 각각은 하찮은 존재가 되고 말 따름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블랙 미러>는 다른 무엇도 아닌 인간의 통제 욕망을 실험하고 투사한 결과물이다. 서로 다른 두 의식, 재차 말하자면 육체와 의식을 떼어내려는 욕망과, 분리된 육체나 분리된 의식을 불완전한 파편으로 간주하려는 욕망을 한꺼번에 다루어낸다. 이 상충하는 욕망은 모두 인간으로부터 파생된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끔 만드는 것.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통제 가능한 상황으로 바꾸겠다는 그 욕망이 다시 문명의 이름으로 일궈낸 윤리의 탑에 부딪히며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러한 통제 욕망이야말로 이 드라마가 고수하고 있는 핵심 의제다.
궁극적으로 <블랙 미러>는 당신들의 욕망을 따라간 끄트머리에 무엇이 있느냐고 묻는다. 이 욕구는 편의와 회생이라는 비교적 선한 의도에 곧잘 어울리지만, 다른 한편 ‘응징의 욕구’ 또한 짙게 드리우고 있다. 가상 현실상의 감옥을 만들어 죄인이 직접 공포에 떨게끔 하며, 심지어는 이를 서커스 판옵티콘panopticon으로 유희화해 대중 오락거리로 삼는다(S2E2: ‘화이트 베어White Bear’). 또는 영겁의 반복과 시간을 견디도록 고문을 불사하는 동시에 악의 이름표를 붙여 손쉽게 사회와 절연하도록 만든다(S2E4: ‘화이트 크리스마스White Christmas’, S3E6: ‘미움받는 사람들Hated In the Nation’). 이 모든 내러티브의 판본은 인간의 근원적인 통제 욕망이 불러낸 비극적 상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죽음을 극복하려는 열망과 단죄와 응징의 욕구가 복합적으로 드러난 ‘블랙 뮤지엄’의 말로(末路)는 줄곧 시리즈가 관심을 보이던 소재를 적절히 뒤섞어 그 혼란을 강조한 모형으로 보인다.
이렇게 <블랙 미러> 시리즈는 인간 능력 바깥의 일을 기술이 대리 수행할 수 있게 만듦으로써 잔혹한 결론과의 대비를 거듭 보여준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도덕극의 시사점은 인간성의 회복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그런 와중, 2018년 공개된 번외편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Black Mirror: Bandersnatch>의 등장은 흥미롭다. 인간의 통제 욕망을 끊임없이 시사하던 시리즈가 스스로 시청자에게 그들의 통제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도록 하는 모델을 인터렉티브 필름으로 시도한 것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컨트롤러의 합심이 작동한다. 말하자면 시청자, 캐릭터, 설계자라는 3중의 컨트롤러가 동시적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사실상 그 점 때문에 이 모델은 기획 단계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나, 통제 욕망을 조롱해 왔던 시리즈가 직접 시청자에게 통제 욕망을 체험하도록 한다는 것. 또 하나, 그러나 정작 그들은 이 체험판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설계자에 다름 아니라는 것. 이 구간에서 사용자가 이야기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게끔 만드는 그 착각과 환영을 구현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 통제 욕망을 발현해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야말로 컨트롤러의, 컨트롤러에 의한, 컨트롤러를 위한 게임을 정조준한 판형이지만 각각의 욕망이 서로를 자극하며 대결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점에서 기이한 감흥을 불러낸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에 내려진 대체의 부정적인 평가는 당연하게도 상충하는 욕망 사이에서 스스로 길을 잃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본작의 진행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사용자는 극의 사이마다 두 답안의 갈림길에서 각자의 욕망을 선택하며 그 선택은 다른 결말을 빚어간다. 흥미롭게도 극의 내러티브는 사용자가 안고 있는 상황과 거의 흡사하게 맞춰져 있다. 게임 개발자인 주인공은 양자택일의 묘미로 결말을 추동하는 게임을 설계하고 있으며, 이 캐릭터는 인터랙티브 서사를 구축하기 위해 넷플릭스가 안았던 조건적 상황과 흡사하다. 하물며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미완의 감각은 극 중 주인공이 만든 게임의 데모 버전을 닮아있기까지 하다. 마땅히 지켜져야 할 2의 n제곱 개의 전개는 각각 탄탄하지 못하고, 맥 빠지는 결말에서 다시 선택의 기로로 돌아오도록 유인하는 책략이 수시로 엿보인다.
게다가 주인공이 어머니와의 트라우마를 반드시 고백해야만 한다는 특정 전개를 유도하는 질문도 재차 발생한다. 어떤 길로 가도 결국 상담사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큰 줄기로향하도록 그려진 도면임을 부정하기 힘들다.<블랙 미러: 밴더스내치>는 ‘선택’과 ‘결정권’에 관한 자기 형식의 부연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마치 선택이 운명을 바꾼다는 통찰로 시작된 프로젝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통찰의 전제는 사실상 설계자를 자처한 ‘넷플릭스’의 존재를 떠올리는 순간부터 분열되기 시작한다. 사용자가 할 법한 모든 선택지를 반영한 게임 도면을 코딩해야만 하는 주인공은, 작업 중 내 위의 설계자가 있다는 망상에 시달리며 분열한다. 그가 그나마 정신을 보전하게 되는 선택지는 끝내 자신의 게임을 완성하지 못하는 결말에 이르는 경우가 유일하다. 이 모습을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의 사용자에 대한 경고이자 넷플릭스의 자기 고백으로 읽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이를 증명하듯 넷플릭스가 가장 공들여 만든 (진짜)결말은 자기 꼬리를 삼킨뱀과 같은 우로보로스식의 결론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착각만 줄 뿐이지 엔딩은 설계자가 결정한다"는 말을 직접 들려주는 대목도 있음은물론이다.
시야의 자유, 한계의 극복을 위한 기술은 동시에 인간의 육체를 한없이 무력화하는 공포의 기제로 작동했다. 무엇이든 가능한 영역을 새로이 구획하기 위한 기술이지만, 이는 선택하는 주체(신체)를 만들어 낸 동시에 도리어 선택할 수 없는 주체(신체)의 탄생을 극명하게 대립시킨다. 게다가 <블랙 미러> 시리즈가 표방하는 미래사회의 기술 공포란 넷플릭스라는 거대 미디어의 물리적 자장 안에서 소구되기 마련이다. 본작이 넷플릭스의 인기 시리즈이자 명실상부한 대표작이 되었고, 시즌 6까지 이어진 후속 시리즈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경고의 시효가가깝지 않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이른바 꺼진 전자 기기의 검은 화면을 지칭하는 ‘블랙 미러’(Black Mirror)의 경고가전 세계 사용자 개개인의 블랙 미러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렇다면 소외된 현재와 훼손된 신체는 지금 시리즈를 관람하는 우리의 거울 앞에 매 순간 반영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검은 거울 앞을 떠날 생각을 하기가 어렵다. 새 시리즈를 기다리거나 또 다른 알고리즘을 찾아 떠나거나, 재생 버튼을 눌러 거울 속 세계를 회의하거나 보관함에 보낸 채 먼 후일을 기약하거나. 모든 행위는 거울 앞에서 이뤄지고 넷플릭스는 당신의 경험을 수집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