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당신은 빅뱅을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도무지 상상이 안된다. 아무리 해도 그 ‘상像‘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가 없다. 폭발의 상은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폭발 이전에대한 상상은 어떻게 해도 불가능하다. 빅뱅 이론을 부정하는 거냐고? 천만에, 어찌 그럴 수 있겠나. 적색 편이, 수소와 헬륨 핵융합, 우주 배경 복사와 같은 과학적 증거를 부정할 재량은 나에게 없다. 빅뱅 이론은, 적어도 현재까지, 거부하기 힘든 정설이자 합리적 지식이다. 하지만 그 이론을 지식으로 습득하는 것과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지금의 우주 혹은 지금 우리가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시간과 공간은 빅뱅에 의해 만들어졌다. 즉, 빅뱅 이전에는 시간과 공간 자체가 아예 없는, 그야말로 무無의 상태였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상태다. 머릿속에서 제아무리 빅뱅을상상하려 애써봐도 빅뱅 이전을 시간과 공간으로 상상해버리게 되는 탓이다. 시공간 없는 어떤 상태가 과연 인간의 머릿속에서 상상 가능할 법한가? 당신은 그럴 수있는가? 빅뱅을 상상할 때면 내 머릿속에는 우주 다큐멘터리 영상 한 편이 상영된다. 그 스크린 혹은 디스플레이 위에는 폭발 직전의 한 점이 있고, 그 점 바깥에 검은 화면이있다. 그리고 그 검은 화면을 둘러싼 스크린 및 디스플레이의 프레임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폭발하는 점 바깥을 특정한 시간과 공간으로 떠올리면서 빅뱅을 상상하게 된다. 빅뱅 이론과 모순되는 이러한 상상은 나의 인지적 한계다. 자꾸만 내가 지각적으로 경험한 것을 불러와 상상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외계인을 상상할 때 인간과 비슷하거나 지구의 어떤 생명체와 닮은 무언가로 떠올리는 일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즉, 나에게는 상상 가능한 영역으로서의 틀이 있어 그 바깥으로나가기가 힘들다. 그러니 어쩌면 빅뱅 이전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상상의 틀 자체를 바꾸어야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틀을 탈출하는 것은 얼마나 가능한 일일까? 어떤 조건이 그 탈출을 성립시킬까?
상상이 불가할수록 질문을 멈추기 힘들고, 그럴수록 더욱 질문을 멈추고 싶다. 우리는 빅뱅 이전의 무無가 자꾸만 시공간으로 상상되기에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라고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질문 앞에서 우리는 종교적 신비와 과학적 유예로 나뉜 길을 간다(제 3의 길이 있다면 상상해보고 싶다). 하지만 두 길은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난다. 바로 ‘기원’이다. 빅뱅 이전에 대한 상상은 결국 빅뱅의 시작에 대한 상상과도 같기 때문이다. 이 광활하고 끝없는 우주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원을 찾기 위해 헤맨다.
1.
사변적 세계로서 SF는 상상할 수 없는 기원을 어떻게든 상상의 자리에 불러오는 장이기도 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다크Dark>(2017-2020) 또한 그런 상상을 펼친다. 독일에서 제작된 이 시리즈는 독일의 가상 도시 빈덴을 배경으로 복잡한 시간 여행을 통과하면서 ‘기원’의 문제를 다룬다. 이 작품의 주요 공간이 ‘동굴’이라는 점은 기원을 상징화하는 시도를 노골적으로 알려준다. Y자 형태의 낮은 언덕 사이로 보이는 검은 동굴은 어떻게 보아도 여성의 질과 자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닮았다. 이처럼 ‘동굴=자궁’의 도식은 대사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제시된다. 주인공 요나스와 마르타는 ‘매트릭스의 오류’를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그 오류가 어떤 것인지는 경우에 따라 다르게 지시되지만, 매트릭스가 ‘행렬’이자 ‘자궁’을 모두 뜻한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러므로 매트릭스의 오류는 시공간 배열상의 오류를 가리키면서도 기원의 장소에서 발생한 오류를 지시한다. 여성의 자궁은 동굴의 형상이자 기원(혹은 잉태)의 장소로서 온갖 문화 생산물에 기입되어 왔다. <다크>도 그러한 역사 위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하지만 그런 상징만 제시되었다면 이 작품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과 세계 창조의 장소로서 동굴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러한 장소성은 작품 내부의 요소 중 하나로 기능할 뿐 지배적인 의미화 요소가 아니다. <다크>는 빅뱅, 핵분열, 힉스 입자, 양자역학, 웜홀, 블랙홀과 같은 과학적 상상을 바탕으로 구성된다. 반복해서 제시되는 아포칼립스 형상은 빅뱅과 블랙홀을 상상하게 만들고, 원자력 폐기물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검은 물질은 ‘신의 입자’라는 별명을 가진 힉스 입자를 떠올리게 한다. 둘 이상의 평행 우주 및 차원 도약은 양자역학과 웜홀을 지시한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그러한 과학적 현상이 역설적이게도 종교적 신비와 손잡도록 한다는 점을 숨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바로 그런 점이 이 시리즈를 특별하게 만든다. 과학과 종교가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붙들고 있다는 점, 상상 불가의 지점을 교조적 신념으로 채우려는 인간의 한계를 확인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설명되지 않는 현상을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다고 믿으려 하고, 그 믿음은 교조적 확신을 발아시킨다. <다크>는 그와 같은 맹목적 확신을 작금의 환경 및 에너지 문제와 연결한다. 하지만 그 연관성은 우리가 교훈적 전언으로 환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다크>는 그 연관성을 복잡한 이야기 내부 요소에 불과한 것으로 자리하게 한다. 그러므로 환경 및 에너지 문제와의 연관은 서사를 따라가고 즐기는 과정의 핵심이 아니라, 추적과 관찰 이후의 경험을 다시금 우리가 의미화할 때 중핵이 된다. 세계를 탐험한 이후에 다시 ‘핵’(혹은 말 그대로의 핵분열 발전)으로 진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다크>라는 시리즈가 우리에게 어떤 세계를 탐험하게 했는지, 그리고 그 탐험의 방식이 어째서 그러해야만 했는지 말해보려 한다.
2.
<다크>의 진입 장벽은 높다. 보다가 포기한 사람도 여럿일 것이다. 그 높은 장벽은 무엇보다 복잡한 서사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복잡한 서사는 상당히 많은 등장인물로부터 기인한다. 가뜩이나 사람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들이 시간대별로 서로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다. A라는 인물이 10대, 40대, 80대로 나뉘어 등장하고, 서로 다른 배우가 그 인물을 연기한다. 그런 인물이 서사 곳곳에 포진되는데, 각기 자리한 시대도 때에 따라 다르다. 같은 생김새를 하고는 여러 시대를 넘나들기도 한다. 더군다나 어떤 인물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연루된 탓에 인물의 관계도를 단번에 포착하는 일은 더더욱 힘들어진다. 이처럼 <다크>에서는 인물의 얼굴, 이름, 정체성이 분열하고 증식하면서 곳곳에서 우리의 기억력을 시험한다. 우리는 그 인물이 누구이며, 어떤 나이대이며, 지금 어떤 시대에 있는지 계속해서 추적해야만 한다. 이렇게 <다크>는 우리에게 지도 그리기를 강제한다. 이는 시리즈 내부에서 인물들이 맞닥뜨린 곤란과 닮았다. 그들처럼 우리도 지도를 그리다가 오히려 길을 잃고말 지경에 놓인다. 하지만 <다크>는 우리가 길을 잃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우리가 시리즈 내부 인물들처럼 길을 잃었다면 우리는 이 시리즈를 놓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시리즈 내부 인물은 자력으로 빠져나오기 쉽지 않지만, 우리는 클릭 한 번으로 길 잃은 상태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 시리즈는 우리가 잠시 이 세계에 더 머물 수 있도록, 길을 잃을 시점마다 표지를 제시한다. 바로 ‘빈덴’과 ‘노란색 우의’다. 이 장소와 의상은 우리를 이끌고 안내하는 표지인 동시에 복잡한 서사 줄기를 수렴하는 인력이 되면서도 이 시리즈를 알레고리로 기능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먼저 빈덴이라는 장소에 대해 살펴보자. 이 시리즈에서 이상한 점 하나는 인물들이 도통 빈덴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산업화 이전 시대도 아닌데, 인물들의 역사는 빈덴에 머문다. 한 인물과 그의 부모, 그의 부모의 부모는 모두 빈덴에 살았거나 살고 있다. 이따금 빈덴 외부에서 빈덴으로 이주한 인물이 설정되긴 하지만 그 외부가 어디인지 알려지지 않고 일단 들어오기만 하면 빈덴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빈덴 바깥의 세계는 없는 것만 같다. 모든 일들은 빈덴 안에서 일어나고, 빈덴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만이 빈덴에서 벌어진 사건과 관련된다. 인물들의 관계망과 사건의 역사는 복잡하기 그지없지만,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만은 지극히 간단하다. (빈덴winden은 독일어 verschwinden와 winden을 연상시키는 단어로써, verschwinden는 ‘사라지다’, ‘길을 잃다’라는 뜻이며, winden은 ‘꼬이다’, ‘뒤틀리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단일하고 폐쇄적인 장소는 시리즈의 시공간을 닫힌 체계로 만든다. 닫힌 체 계이기에 시리즈 바깥 현실과는 동떨어지면서도 인류 전체를 재현하고 대표하는 듯이 여겨진다. 즉, 빈덴의 폐쇄회로적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로 비유되는 알레고리가 형성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복잡한 시계열 속에서도 단순하고 명료한 알레고리를 추출할 수 있게 한다.
이 알레고리가 형성되는 처음과 끝에 ‘노란색 우의’가 있다. 노란색 우의는 처음에 요나스가 입고 나왔고, 나중에는 다른 평행 우주의 마르타가 입는다. 이 시리즈에서 노인이 되어간 요나스와 마르타는 그토록 ‘매듭의 처음과 끝’을 찾으려 애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처음과 끝을 끊임없이 오해하는 사건들을 지켜본다. 그 과정에서 노란색 우의는 이 시리즈를 보는 우리의 경험의 처음과 끝을 형성한다. 노란색 우의로 시작한 이 시리즈는 노란색 우의(들)의 소멸과 또 다른 생성으로 나아간다. 이는 ‘원자력 발전’과 전혀 관련이 없으면서도 원자력 발전을 상징한다. 노란색우의들이 원자력 발전과 인과적이거나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 선명한 노랑은 우리로 하여금 둘을 연결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게 한다. 원자력 발전소는 노란색 드럼통을 은폐한 곳이며, 사건이 발생한 기원지로 반복해서 제시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노란색 우의를 입은 요나스와 마르타는 사건의 기원적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결국 소멸했다가 또 다른 계기를 통해 다시 생성된다. 이는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에 대한 상징적 경고이면서 원자력 발전의 소멸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상징적 전언으로 독해될 여지를 남긴다. 이와 같이 <다크>는 복잡한 시계열 속에서도 그 시계열이 펼쳐지는 장소를 한 곳으로 한정함으로써, 그 시계열의 지도를 완전히 독파하지는 못하더라도 하나의 명료한 지도를 형성하게 한다. 이는 관람자가 시리즈를 의미화할 수 있게 이끄는 명민한 전략이자 신호로 기능하면서, 이 시리즈의 인물들처럼 복잡한 시공간의 지도를 파악하느라 도리어 길을 잃게 되는 상황에 놓이지 않게 하는 분명한 표지로 작용한다.
서사의 알레고리가 빈덴과 노란색 우의로 수렴되는 만큼, 이제 복잡한 시계열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다시 한번 압축해보자.이 시리즈를 지켜보면서 가장 의아하게 여겨지는 부분은 질문의 부재에 있다. 혼동을 피하도록 가장 나이 든 요나스와 마르타를 그들의 또 다른 이름인 ‘아담’과 ‘에바eva’(이브eve의 독일식 이름)로 부르자. 아담과 에바는 서로 적대적인 세력을 형성한다. 아담은 에바의 계획을 무너뜨리고 자신이 생각한 기원을 해체하려고 하며, 에바는 아담의 계획을 방해하고 그만의 방식으로 기원을 되돌리려 한다. 그리고 그들은 각기 계획을 실행하고 목표를 실현할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다. 여기서 두 세력 모두 그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똑같이 반복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어째서 반복이 구원으로 나아가는가? 시리즈 종반부에 우리가 아담과 에바가 수립한 계획의 실체를 알게 되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떻게’,‘어찌하여’라는 (과학적, 이성적, 논리적) 질문은 들리지 않는다. 아담과 에바의 수하들은 각기 상실을 겪었고, 그 상실을 되돌리기 위해 각기 아담과 이브의 계획을믿는다. 아담과 에바 또한 상실을 복원하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실행한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질문은 없다. 해명도 없다.
질문과 해명 없는 집단, 그저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집단, 우리는 그런 집단에 ‘종교적’, ‘교조적’이라는 속성을 부여한다. 이렇게 <다크>는 어떤 현상을 제대로 말할 수 없거나 현상을 변경하기 힘든 무기력한 처지에 놓일 때마다 교조적 믿음에 의존해왔던 인간의 역사를 비유적으로 전한다. 그러한 믿음은 우리가세속의 종교뿐만 아니라 ‘국가’, ‘민족’과 같은 상상의 공동체가 공유했던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러한 믿음이 세계를 파괴하고 세계의 종말을 걱정하게 했다는 사실을 세계대전과 냉전을 경유하며 역사적으로 목격했으며, 지금도 반복해서 목격하고 있다. <다크>에서 아담과 이브가 반목하며 반복하는 행위는 그러한 역사의 반복을 가리킨다.
3.
시리즈 내부에서 ‘신의 입자’로 불리는 검은 물질은 전자기력의 힘을 얻어 그 형태를 바꾼다. 처음에는 무작위적으로 들썩이는 모양이었다가 전자기력과 함께 매끈하고 안정된 구형으로 변형된다. 그것은 완벽한 대칭성을 이루는 입체도형이다. 그러한 완벽한 대칭성은 곧잘 신의 섭리로 신화화된다. 너무도 완벽하기에 신비롭고, 신비롭기에 전지전능을 상상해야 해명되는 것들. <다크>는 그러한 대칭성에 대한 감각을 반영하여 우리에게 제시한다. 시리즈의 오프닝에서 시각적으로 출현하는 대칭 이미지들은 세계를 이분법의 세계로 추상한다. 우리는 그러한 오프닝 시퀀스 이후 남과 여, 빛과 어둠, 선과 악, 이쪽과 저쪽처럼 둘로 나뉘어 작동하는 세계를 지켜본다.
하지만 과학적 세계에서 힉스 입자는 오히려 대칭이 아니라 대칭 붕괴를 가리킨다. 그것은 질서 잡힌 체계에서 일순간 어떠한 힘으로 쏠리게 하는, 그 힘에 질량을 부여하는 메커니즘이다. 마치 <다크>는 그러한 힉스장을 교조적 세계의 붕괴를 위해 도입하려는 듯이 팽팽하게 이분되고 대칭된 세계를 구축했던 두 세력의 대칭성을 깨뜨린다. 그렇게 하여 시리즈 마지막, 요나스(아담)-마르타(에바)는 소멸한다. 그들의 소멸은 이분법의 소멸과도 같다. 하지만 <다크>는 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는 듯이 그들의 에너지를 보존한다. 어떤 형태로? 바로 노란색 우의로! 원자력 발전의 소멸을 곧 세계의 구원으로 위치시키는 노란색 우의는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와 역사의 또 다른 시작을 알린다. 하지만 그 시작이 이루어지는 세계는 이분법의 장소도 아니며, 해명되지 않는 일에 성급히 답을 부여하는 장소도 아니다. 차라리 해명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세계다. 그런 점에서 토르벤 뵐러는 이 시리즈의 인물 중 가장 이상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경찰 업무를 보조하는 인물로서 시리즈 내내 애꾸눈을 하고 나오는데, 왜 그런 것인지 알려지지 않는다. 그의 눈에 감긴 붕대 혹은 안대는 얼굴의 대칭성을 기이하게 바꾼다. 그리고 그는 성소수자 버나뎃의 가족이기도 하다. 즉, 그는 이분법적 대칭의 세계에 자리한 비-대칭, 비-이분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다. 시리즈 내부에서 사람들은 뵐러에게 눈이 왜 그런 것이냐고 묻는다. 그런데 뵐러가 대답하려 할 때마다(“지난 여름에…”) 말문을 막는 외부 개입이 우연하게 발생한다. 이렇게 <다크>는 우리에게 뵐러의 눈이 대체 왜 그런 것인지 줄곧 궁금하게 만들었다가, 그 해답이 나오는 순간에 해답을 들려주지 않기로 선택한다. 이러한 설정으로부터 우리는 어떠한 현상의 해명이 (어쩌면 끝없이) 유예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 해명을 유예하는 것, 쉽사리 상상되지 않는 일에 성급히 해명을 도입하기보다 해명 유예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다크>가 우리에게 남기는 최종 경험의 의미일 수 있을까? 이분된 대칭을 허무는 듯하면서도 구조적으로 너무도 빈틈없어 보이는 <다크>의 세계는 대칭을 통해 대칭 바깥을 상상하게 할 수 있을까? 나는 해답보다 질문을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