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지겨운 이야기 하나. 이런저런 플랫폼과 TV시리즈, 그리고 극장과 모니터 사이로 관객이 흩어졌다. 그리고 코로나는 그렇잖아도 흩어지게될 사람들을 정말 확실하게 만나지 못하도록 격리시켰다. 이제 다들 혼자, 혹은 두 세명을 넘지 않는 선에서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영화를 본다.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그 사이를 떠도는 게 관객 뿐일까? 우리는 작품들도 그 틈을 유령처럼 배회한다는 걸 종종 잊는다. 단지 각각의 오리지널 영화/시리즈와 극장 개봉 후 시즌오프 세일처럼 OTT에 얼굴을 드러낸 영화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뜬금없이 넷플릭스로 완성된 오손 웰스의 <바람의 저편>(2018)이나 노아 바움백의 신작 아래 ‘함께 볼만한 작품’으로 추천된 홍상수의 2000년대 초반 영화를 생각하고 있다.
이 묘한 관계를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나는 알고리즘의 사고회로를 잘 알지 못하지만, 스낵무비의 상세페이지에 타란티노가 따라붙고, 또 그 상세페이지엔 스콜세지의 <아이리쉬맨>(2019)과 히치콕의 유명한 작품들이 함께 따라 붙은 추천 리스트를 보며, 여기에 이상한 전류가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니까 예술의 어떤 근원이기 보다 어느 컬렉션의 풍성함을 위해 장식처럼, 신작 이곳 저곳을 망령처럼 배회하는 고전들. 그리고 그런 망령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마련하려는 값싸면서 비싼 신작들. 나는 단순히 플랫폼의 허망한 욕망을 말하려는게 아니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이용하면서, 배회하는 우리들 사이를 배회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신작들은 우리가 그 미묘한 공생관계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은폐시켜 버린다. 장식이 되어버린 과거와 그 장식에 기생하는 현재. 그게 이 플랫폼의 지형도 속에서 고전과 현대가 맺고있는 관계다.
1.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이런 동시대 영화의 산업과 예술 사이 은원관계를 잘 알고 있는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이며, HBO시리즈(이자 WAVVE 독점스트리밍 시리즈) <이마 베프>는 그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이 시리즈는 1915년에 처음 공개된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 연작을 리메이크 한 영화, ‘이마 베프’를 만드는 감독 르네 비달과 주인공인 미라 하버그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데 (알려진 사실이지만)아사야스는 이미 1996년 같은 소재로 <이마 베프>라는 동명의 영화를 만든 바 있으며, 한편으로 이 시리즈는 그 영화의 리메이크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뱀파이어>연작을 거의 100년 뒤에 리메이크하는 영화, 의 현장을 다룬 영화, 를 리메이크 한 시리즈. 이 사이에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면 1996년의 영화버전 <이마 베프>에서 주연이 장만옥이었으나, 새로운 버전은 알리시아 비칸데르라는 서양 배우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96년 작에선 르네 비달역을 장-피에르 레오가 맡았으나 시리즈에선 빈센트 맥케인이 대신한다. 같은 소재와 같은 이야기. 그러나 다른 인종의 배우와 같은 국적의 배우, 30년에 가까운 시차, 무엇보다 100분짜리 영화와 8부작 시리즈라는 차이. 여기서 몇 가지는 반복되고 몇 가지는 너무 결정적 차이를 지닌다. 아사야스는 그 틈에서 무엇을 만들고 싶었을까?
2.
이 속엔 몇가지 층위가 어지럽게 겹쳐있다. 2022년 버전 <이마 베프>(이후 편의상 ‘시리즈 버전’과 ‘영화 버전’으로 구분 하겠다. 다만 이 구분이 ‘시리즈’를 ‘영화’와 별개의 형식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의 르네 비달은 예술영화계에서 나름 입지있는 유럽 감독이지만 영향력의 전성기는 조금 지난 편이고, 메인스트림 상업영화는 못/안 만드는, 예술적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그는 십수년전 같은 내용을 다루는 동명의 저예산 영화 ‘이마 베프’를 만든 적 있고, 당시 ‘이마 베프’역을 맡았던 홍콩 배우 제이드 리와 결혼했으며, 5년간의 결혼 생활 후 이혼했다.
어디서 본 이야기 같지 않은가? 르네 비달을 창조한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영화평론가 출신 감독으로 90년대에 데뷔해 활발히 활동하며 <클라우드 오브 실스마리아>(2014)로 세계적인 주목과 수상을 거머줬지만, 그 뒤의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평이한 평을 받았다. 그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줄리엣 비노쉬 등 스타배우들과 작업했지만, 딱히 크게 상업적 성공을 거둔적은 없고, 무엇보다 그는 1996년 영화버전 <이마 베프>를 만들면서 주연이었던 장만옥과 결혼했고 3년 후 이혼했다.
즉 빈센트 맥케인이 연기한 르네 비달은 아무리 봐도 현실 속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분신이다. 그리고 시리즈 버전 속엔 이런 식의 메타적 관계가 계속 등장한다. 가령 시리즈 버전 ‘이마 베프’를 연기하는 미라 하버그는 작품 속에서 스웨덴 출신으로 ‘둠스데이’라는 SF히어로 영화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헐리우드 배우지만, 예술적 갈증에 목말라있다. 그리고 미라를 연기한 배우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마찬가지로 스웨덴 출신이며, <툼 레이더>(2018)와 <제이슨 본>(2016)같은 텐트폴 영화에 출연하면서 한편으론 <그린 나이트>(2021)나 <대니쉬 걸>(2015)같은 예술영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이 둘 사이에서 국적과 위상, 혹은 상업적 존재감과 예술적 욕망이 교차한다. 작품 속 미라와 작품 밖 알리시아 사이엔 은근한 평행선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시리즈 버전 <이마 베프> 속 인물들(특히나 르네 비달)에게는 각자 어느 정도 작품 바깥 실존인물들의 그림자가 배어 있다. 심지어 르네는 아사야스의 개인적 마음마저 픽션화 한다. 그는 과거 영화버전인 ‘이마 베프’의 주인공이자 자신의 전처인 제이드 리를 완전히 잊지 못했으며, 심지어 제이드의 유령(혹은 환상)을 마주칠 지경으로 ‘이마 베프’를 만들면서도 제이드와의 과거에 붙잡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르네의 이런 미련과 회한으로 부터 어쩔 수 없이 장만옥을 향한 아사야스의 마음을 유추하게 된다. 현실 속 아사야스도 혹시 여전히 영화 버전 <이마 베프>와, 그 속의 장만옥을 잊지못하고 있는 걸까? 2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그러고 보면 미라가 캣우먼 복장으로 도시의 지붕을 누빌 때 지속적으로 영화버전 <이마 베프> 속 라텍스 코스튬을 입은 장만옥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곤 한다. 그리고 나는 시리즈에 관해 찾아보다 아사야스가 실제로 제이드역에 장만옥을 캐스팅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결국 캐스팅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쯤 되면 르네와 제이드 사이에서 장만옥을 향한 아사야스의 마음을 함께 연상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진실은 아사야스 본인만 알겠지만, 아사야스는 이렇게 카메라 바깥의 현실을, 심지어 자신의 사적인 사정까지도 이야기 내부로 끌어들인다. 물론 이걸 보는 우리는 재밌다. 아사야스가 정말 여태 장만옥을 잊지 못했다고? 이게 그 자체로 가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사야스는 스스로 가십의 장작이 되가며 서사에 틈을 낸다.
3.
어쩌면 여기까지는 일종의 발칙한 캐릭터적 도치로 볼 수도 있다. 이런 방식의 유희적 자기반영이 코미디의 관습 속에서 종종 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사야스는 여기서 인물의 존재론적 기반을 더 쪼개면서 작품의 물질적 근간에 구멍을 내기 시작한다. 시리즈 버전 <이마 베프>의 중반부, 20세기 초중반 활발히 활동했으며,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 연작 주인공이었던 무지도라의 회고록이 자막으로 나오고, 작품은 다소 뜬금없이 그 회고록을 재현한다. 푀이야드와 무지도라의 1910년대 영화 현장 이야기. 여기서 르네는 푀이야드가 되며, 미라는 무지도라가 된다. 잠깐, 그런데 여기서 푀이야드를 연기하는 인물을 르네라고 단정 할 수 있을까? 이 회고록-재현은 엄밀히 말하면 시리즈 버전 <이마 베프>의 서사에 속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 이 회고는 ‘이마 베프’라는 영화사적 인물에 관한 각주가 시각화되어 산발적으로 삽입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여기서 푀이야드를 연기하는 인물은 정확히 르네라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서사 밖의 빈센트 맥케인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존재적 모호함을 지니게 된다. 각각의 세계와 인물들의 다중 중첩과 해체. 여기서 ‘이마 베프’를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들이 가진 개별적 층위들이 이상하게 겹쳐진다. 르네와 푀이야드, 그리고 빈센트 맥케인과 그 이면에 아사야스까지. 분명 하나의 인물이 단일한 형상으로 나타나건만 여기서 우리는 이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할지, 혹은 어떤 존재로 간주해야할지 알 수 없어진다. 그리고 이는 무지도라도 마찬가지다. 이 존재적 혼란은 무지도라-미라 하버그-알리시아 비칸데르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시리즈 버전 <이마 베프>는 ‘이마 베프’라는 영화사적 존재를 현재의 영화만들기 환경 속에 소환하면서 그를 단순히 우상화하기보다 절반은 살아있고 절반은 기록 속 유령이 된 인물로 만들어낸다. 여기서 하나의 인물이었던 ‘이마 베프’는 푀이야드의 무성영화 <뱀파이어> 속 ‘이마 베프’와 1996년 영화버전 <이마 베프> 속 ‘이마 베프’, 2022년 시리즈 버전 <이마 베프> 속 ‘이마 베프’로 나뉜다. 그리고 각자 무지도라와 장만옥과 알리시아 비칸데르로. 그리고 무성영화 속 캣우먼과 라텍스 코스튬과 벨벳 코스튬으로 분화되는 동시에 하나로 합쳐진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이마 베프’라는 픽션적 인물에게 서려있는 인과성의 사이를 여러 가지 형상과 형식으로 재조립하여 어떤 복합적 유기체로 만들어낸다. 자신의 가십까지 이 속에 불태우길 서슴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아사야스는 홍상수를 염두에 뒀을까? 그건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이 인물의 해체와 중첩을 통해 아사야스는 ‘현대성’의 한 실천을 이뤄낸다.
4.
시리즈 버전 <이마 베프>는 표면적으로 동시대 영화만들기의 어떤 현실을 그린다. 조너선 로젠봄은 영화버전 <이마 베프>에 대해 “예술과 사업 어느 쪽도 만물을 주재하는 조물주로 군림할 수 없고 그러므로 성적 욕망과 방어적 짜증이 넘겨받는 무신론적 세계를… 유영하"는 영화라고 적었는데, 이는 시리즈 버전에 <이마 베프>에 대한 설명으로도 얼마간 유효하다. 위대한 고전을 리메이크하려는 예술영화 감독과 그의 예술적 작업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는 스타배우, 그 뒤에서 산업적 욕망을 실현하려는 투자자들. 모두의 욕망이 뒤엉키고 그 사이에서 영화는 구체적인 예술이 되지 못한 채 허공을 부유한다. 이 시리즈엔 이런 긴장관계가 녹아 있으며, 그 속에 갇혀있는 영화만들기의 현실을 그려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이 유의미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그 과정에서 매번 영화 속에 흐릿하게 나타났던 존재의 희미한 본질에 좀 더 다가가고 싶었던 것 같다. 7화의 초반부, 미라는 영화가 우리로하여금 “물질세계로 부터 거리를 두게 하"고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고 말한다. 영화를 존재의 이면을 비추는 예술로 간주하는 이 말은 미라가 가진 영화일반에 대한 관념자 바램이면서, 동시에 시리즈 버전 <이마 베프>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사야스는 결국 미라/이마베프를 벽도 통과하고 지붕을 뛰어넘는 신비한 존재로 만들어 낸다. 유령이자 영화적 현신인 인물로. 그리고 이 유령은 영화사의 위대한 인물인 동시에, 아사야스 자신의 과거와 사랑이고, 실존하는 유명스타이자 픽션에 갇혀있는 허구가 된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한 편의 시리즈 드라마를 보면서 또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또 1915년에 만들어진 초기영화와 닿는다. 아사야스는 이 30년에 걸친 리메이크를 통해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세계의 품이 어떤 형태로 확장하면서도 구체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되돌아보니 달랐던 과거의 어떤 순간들이 그런 것 처럼. 당장 우리의 방금 전과 지금이 그런 것 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