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부터 2년간 춘천SF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팬데믹의 시작과 함께 영화제에서 일한 경험도 소중했지만, 한국 최초의 SF 장르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전 세계의 동시대 SF 장단편 영화들을 볼 수 있는 경험 또한 소중했다. 팬데믹 상황이 영화제의 미래를 고민하도록 만들었다면, 동시대 SF 장르 영화들 속에 담긴 앞날에 대한 위기의식은 우리의 미래를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어찌되었든 ‘미래’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고민을 더욱 가중시킨 매체는 바로 OTT 플랫폼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더욱 빠르게 보급된 OTT는 영화 산업, 관람 환경, 문화 콘텐츠의 소비에 대한 모든 패러다임을 뒤바꿔버렸다. 특히 현장성이 중요한 영화제 입장에서 OTT는 가장 큰 변수이자 애증의 대상이었다. 관객이 모일 수 없는 상황에서 개최해야 했던 영화제들은 온라인 상영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열어두고 OTT 플랫폼과 손을 잡았지만, 막상 이런 방식으로 치르고 나니 영화제의 본질은 바로 극장에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통적으로 구분 지어왔던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 어딘가 즈음에 자리하고 있는 ‘시리즈’1 1라는 이름의 8-10부작 연속극 형식은 고전적으로 영화 형식만 다뤄왔던 영화제에게 과연 이 형식을 ‘시네마’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보탰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별도의 섹션을 마련해서 다수의 한국 OTT 오리지널 시리즈물을 초청했다.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젊은 배우들을 초청할 수 있었고 그들의 팬들 또한 영화제에 방문해 축제 분위기를 활기차게 만들어냈다. 제작진 또한 자신들의 작업물이 영화제에서 하나의 ‘작품’으로 대우를 받으니 꺼릴 이유가 없었다. 마치 쇼케이스를 열듯 홍보 효과까지 누릴 수 있는 OTT 플랫폼 입장까지 더해져 앞으로 당분간은 OTT 시리즈물의 영화제 상영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OTT를 떠올리면 양가감정이 앞선다.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했던 고전적인 토대 속에서 OTT는 끝없이 경쟁해야 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소비자/시청자 입장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미국과 유럽 이외의 다국적 콘텐츠를 만날 수 있으니 반가운 존재이기도 하다. 물론 OTT가 콘텐츠의 의미를 휘발시키며 단순한 소비 상품으로 전락시키기도 하지만 관람자의 태도에 따라 새로운 문화 상품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한계라고 보기엔 어려움이 있다. OTT는 영화 산업 입장에서도, 영화제 입장에서도 기회와 한계를 동시에 지니는 대상이다.
여기에 SF 장르를 더하면 상황은 더욱 흥미로워진다. 한국은 SF의 불모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SF 장르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대자본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한국 영화 산업 내에 팽배해 있다. 그만큼 한국에 SF 장르 팬들이 다양하지 않아서 무리수를 두고 제작을 하더라도 결국 성공할 확률이 지극히 낮았다. (최근 개봉된 <외계+인>에 대한 한국 관객들의 평가만 봐도 쉽게 확인할수 있다.) 하지만 OTT 플랫폼은 다르다. 콘텐츠를 채워야 하는 OTT 입장에서는 다양한 장르를 포진시킬수록 가입자 수 유지에 도움이 되기에 SF 장르라고 외면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한국은 이미 소설과 웹툰을 중심으로 SF 장르가 점차 대중화되어가고 있다. 시청자들이 서서히 SF 장르를 낯설어하지 않게 되었으니 영화가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장르에 대한 도전을 마다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SKT와 지상파 방송3사가 모여 야심차게 오픈한 웨이브Wavve가 MBC와 손을 잡고 기획한 첫 번째 시리즈 콘텐츠가 영화감독협회가 기획한 <SF8>이라는 사실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애플TV 또한 처음으로 자체 제작해 오픈한 한국 시리즈물이 김지운 감독의 SF 장르인 <Dr. 브레인>임을 상기해본다면―디즈니+의 <그리드>는 두 번째 오리지널 한국 시리즈물이었다― 영화 산업이 달성하지 못했던 어떤 영역을 OTT 시리즈가 왕성하게 개척 중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쯤에서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해보고 싶다. 과연 SF 장르는 대자본을 투입해야만 만들어질 수 있는 장르인가? 올해 넷플릭스를 통해 오픈한 노덕 감독의 <글리치>와 정지우 감독의 <썸바디>, 티빙TVING이 오픈한 이준익 감독의 <욘더>까지, 한국의 SF 시리즈물은 앞으로도 차고 넘칠 예정이다. 그런데 이 작품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한국 영화 산업이 갖고 있던 SF에 대한 어떤 편견이 깨지게 된다. 앞서 언급한 <SF8>만 놓고 보더라도 이미 공개된 바와 같이 기존의 드라마 제작비보다 현저히 적은 예산으로 하나의 에피소드를 완성했다.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편차가 있지만 이 작품들의 독창성은 절대 대자본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글리치>는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라는 독특한 소재로 극을 시작하지만 결국 작품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미래세계의 판타지가 아닌 기만과 중독으로 가득한 세계에 대한 풍자라고 볼 수 있다. <글리치>는 특수효과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SF 장르 시리즈물이기도 하다. 유일한 특수효과는 UFO가 등장하는 순간인데 이 또한 몇 번 등장하지 않기에 많은 예산이 들어갈 필요도 없다. <글리치>는 SF 장르가 대자본이 아닌 ‘상상력’의 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해낸다. 영화에서 SF 장르는 그 시작부터가 상상력의 힘에 있었다.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Le Voyage dans la Lune>은 자본이 있었기에 가능한 작품이 아니었다. 마술사였던 멜리에스의 세상을 비틀어 보는 시선, 남들은 보지 못하지만 그는 봤던 현실과 비현실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세계를 묘사하고자 했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어쩌면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하는 OTT 시리즈물의 SF 또한 그동안 한국 영화 산업이 외면했던 영역, 대자본이 아닌 상상력의 힘에 기반한 SF 장르에 더욱 집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영화 산업이 저예산 SF 영화들을 외면한 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예가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저예산 독립영화 감독인 백승기 감독의 <인천스텔라>이다. 백승기 감독은 꾸준히 저예산으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감독으로서 키치한 스타일을 고수하며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자신의 영화로 바치는 감독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를 오마주한 <인천스텔라>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화제를 몰고 와 개봉까지 이어졌지만 개봉 성적은 처참했다. 분명 그의 골수팬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 숫자가 산업을 움직이기에는 미비하다는 점을 증명한 셈이다. 마블 히어로들에 집중되어 있는 한국의 SF 장르 팬층을 고려해본다면 영화 산업이 전투적으로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SF 장르를 개척하지 못했던 현실 또한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SF 장르를 대자본으로 직결시켜왔던 편견이 이해되는 건 아니다. 분명 한국의 영화 산업은 현재의 OTT 시리즈물로부터 SF 장르를 대하는 태도부터 배워야 한다.
필자는 영화제 프로그래머 이전에 영화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 지망생이었다. 대학 시절의 전공부터 지금까지 영화 산업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런 필자에게 OTT는 분명 새로운 기회의 장임이 확실하다.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식의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으니 어쩌면 노다지 땅이 새롭게 열렸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본인은 여전히 ‘장편 영화’ 형식을 애정한다. 불이 꺼진 극장에서 불특정 다수와 함께 영화를 관람하는 경험,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다 같이 하나의 스크린을 응시하며 유사한 감정을 느끼고 공유하는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런 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OTT는 대중을 파편화시키는 부정적인 매체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런 논쟁, 과연 어떤 매체가 더 고귀하고 더 우월한가에 대한 논쟁은 그만 멈췄으면 한다. 어쩌면 앞서 강조한 것처럼 지금은 각각의 매체가 서로 보고 배워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역사는 필연적으로 세계를 변화시킨다. 시간의 흔적은 익숙했던 세계를 낯설게 만들고 더 나아가 전혀 새로운 세계 속에서 다시금 적응할 것을 강요한다. 우리는 지금 그런 변화를 최근 몇 년간 현기증이 날 정도로 극심하게 겪었다.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각자의 고유함을 주장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어차피 고유함이라는 것 자체 또한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는 현실이니 말이다. 이제는 불필요한 논쟁에서 벗어나 배움의 자세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춘천SF영화제에서 보았던 수많은 SF 장르 영화들은 대부분 미래를 부정적으로 그려냈다. 절반 이상이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을 정도로 영화는 미래를 암담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OTT SF 시리즈물들은 미래를 극복 가능한 대상으로 바라본다. 지구에서 살 수 없다면 다른 별로 가면 되고, 그 별이 비록 위험천만하고 척박한 환경이겠지만 인간은 항상 그러하듯 어디서든 결국 적응해가며 뿌리내릴 수 있다는 믿음과 신념을 잃지 않는다. 한편에서는 그 믿음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지극히 의심스러워하며 비판할는지도 모른다. 일면 동의한다. 하지만 무조건 부정하고 비관만 하는 것 또한 정답은 아니지 않은가?
SF 장르의 팬으로서 영화건 OTT 시리즈물이건 더욱 다양한 SF 작품들이 발표되길 바란다. 한국의 현실을 풍자하며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이 마치 평행우주처럼 가능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세계가 영화 속에서 좀 더 다양하게 펼쳐지길 바란다. 자본의 한계로 상상력이 가로막힌 채 기획조차 못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좀 더 흥미로운 방식으로 현실을 뒤틀기를 마다하지 않는 SF의 세계를 도래하길 기다리며 스크린으로 경험하며 위로받고 즐거워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시대가 점차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 반가울 뿐이다.
-
45-60분 분량의 에피소드 6-10개가 하나의 시즌을 구성하는 형식을 미국에서는 ‘시리즈Series‘라고 명명한다. 이는 기존의 45분 분량의 에피소드 24개가 하나의 시즌을 구성했던 Soap Opera(연속극) 형식과 구별된다. 방송을 통해 일주일에 한두 편씩 제한적으로 공개했던 것과 달리 전체 사전 제작 후 시즌 전체를 한 번에 공개한다는 측면에서도 차이를 지닌다. 한국의 경우 지상파를 통해 공개되었던 드라마는 형식적으로 일일 드라마, 주말 드라마, 미니시리즈로 구분되는데 미니시리즈의 경우 1시간 분량의 에피소드 16개가 하나의 시즌을 구성하며 대부분의 드라마는 한 개의 시즌으로 종영되는 완결된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Soap Opera 형식과도 구별된다. 어떤 의미에서 시리즈는 그동안 각 국가별로 천차만별이었던 ‘드라마’의 형식을 통일한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전적으로 글로벌 OTT 플랫폼의 대자본에 의해 가능해질 수 있는 현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