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약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동시에 성소수자인 사람이 있다면 우린 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혹은 “살고 싶다"고 말하며 그 욕망을 증명하기 위해 자해를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렴풋이 가늠은 해보더라도 그 괴리를 쉽게 이해하긴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이런 식의 이분법은 너무 극단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가정만으로 흥미로운 상상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고전과 모던을 막론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는 대개 이런 식의 모순에서 촉발된 딜레마를 통해 독자의 관심을 붙잡으려 노력해왔다.
그런데 이런 모순들이 여러 사람에게서, 각양각색의 모양새로 뒤엉켜있는 이야기를 접한다면? 그쯤되면 모종의 결론이나 이해보다 그 난장을 관망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브란스: 단절>은 우리에게 이런 난장을 들이밀면서, 관망과 이해의 사이를 오가게 만든다. 이 시리즈엔 상술한 종류의 모순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하나의 이야기 속에 정돈과 흩뜨러지기가 반복되며, 변태적이고 기괴한 세계가 안온함 속에 섞여드는 모순이 가득하다.
다소 강하게 말했지만 이는 <세브란스: 단절>에 대한 호감의 표현이다. 이 시리즈는 ‘단절’이란 시술을 통해 인격을 나눈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니까 상업성을 띤 SF치고는 어딘가 소박하고, 또 얼마간 무용해 보이는 설정. 하지만 이 시리즈는 이 미묘한 설정에서 배태되는 강한 정치성을, 요상하고 해괴한 세계관으로 발전시킨다. 앞선 가정을 다시 떠올려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지만 성소수자인 사람. 어쩌면 당신은 곧바로 퀴어문화축제와 동성애 규탄 시위가 동시에 일어나는 광화문 풍경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혹은 트럼프와 바이든을 떠올릴지도. 그러나 동시에 당신은 이 강렬한 모순성 속에 서려있는 매혹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세브란스: 단절>은 이런 고민과 매혹 사이에서, 이분법적 모순을 여러 겹으로 중첩시키며 말을 건넨다. 기시감과 생경함, 비관과 낙관, 상상과 현실. 그리고 그것을 품은 이분법, 혹은 삼분법과 사분법.
2.
작품으로 들어가보자. 여기 언제나 말쑥한 정장차림으로, 밀레니엄 시대에나 썼을 법한 뚱뚱한 모니터를 보며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컴퓨터 속 화면도 마치 윈도우98의 ‘지뢰찾기’를 연상시키는, 어딘가 투박한 디자인의 숫자들로 가득하다. 사무실은 넓지만 네 명의 팀원은 한 중간에 십자모양으로 옹기종기 붙어 앉아있고 나머지 공간은 텅 빈 채로 휑하다. 이들은 ‘루먼’이란 회사의 매크로데이터정제팀, 줄여서 MDR 팀이라는데 무슨 데이터를 어떻게 정제한다는 건지 알기 어렵고, 다만 숫자를 골라내고 있다는 사실 정도만 알 수 있다.
이들은 평범한 회사원이라기보다 정신병동 속 환자들이 스스로를 회사원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보통의 회사원이 사내 규정을 성경처럼 줄줄 외워 읊고, 업무 보상 와플파티에 그토록 강하게 집착하긴 어려울 것이다. 분명 이들의 대화 속 리듬, 행동패턴, 미묘한 눈빛 등은 보편성으로 부터 미세하게 어긋나있다. 하지만 동시에 MDR팀은 어느 기밀기관에서 복잡한 최첨단 업무를 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매크로 데이터 정제’라는 알 수 없는 팀명에, 인격까지 바꿔가며, 기억마저 통제하는 철저한 보안 시스템아래에서 일하는 모습이 기술발전의 어떤 극단에 서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 이들은 8-90년대 실리콘밸리 기업의 사무실 풍경 속 사람들같은 뉘앙스를 주기도 한다. 과하게 사무적인 옷차림, 아날로그 틱한 사무용품들, 앞서 말한 뚱뚱한 모니터 등의 오브제들이 그런 인상을 더 짙게 만든다.
요컨대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최소한 범상한 곳은 아님이 분명해 보인다. 이 곳에서 회사 외부의 물건은 마치 사악한 무엇처럼 터부시되고, 퇴사한 팀원과 찍은 사진은 채 하루도 책상 위에 올라가있지 못한다. 분명 여긴 어느 회사의 사무실이건만, 이상하게 멸균실에 온 것 같은 강박적 공간감이 이 곳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정신병원, 멸균실, 혹은 국가기밀기관과 실리콘밸리. 이 외에도 인공적 상담실과 고딕풍의 저택 등 이상한 곳들이 이 시리즈에 즐비하다. 이 기묘한 곳에서 연상되는 장소는 더 있겠지만, 여기서 이상한 건 <세브란스: 단절>의 사무실이 그 어떤 장소로도 온전히 환유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무실은 분명 스스로 관습적으로 고착화된 맥락으로 부터 벗어나면서도, 또 다른 맥락 위에 정착하지 않고, 애써 무언가 비유하려 들지도 않는다. 요컨대 이 시리즈는 매우 강박적인 프로덕션 디자인을 구현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지만, 동시에 그 공간에 특정한 정체성이 새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말하자면 완전히 무색무취한 환경을 만드는데에도 정확히 똑같은 강박을 지니고 있다.
3.
3화의 한 장면을 되돌아 보자. ‘단절’된 자신을 도무지 못받아들여 방황하는 헬리에게 소속감과 존재이유를 고취시키기 위해 MDR팀원들은 함께 ‘영구동Perpetuity Wing‘에 견학을 간다. 놀랍게도 그 곳에는 ‘루먼’의 경영일가인 키어 가문 역대 CEO들이 밀랍 인형으로 전시되어 있고, 그들 자신의 “축성된 힘"을 “전하고 싶다"는 식의 어록들이 반복재생 되고있다. 나아가 심지어 안 쪽엔 설립자 키어 이건의 생가가 고딕풍 저택으로, 실내에(!) 복원되어 있다. 마치 ‘루먼’ 역사 박물관, 정확히는 경영주 역사 박물관 같다. 무슨 회사길래 이토록 스스로 우상화하는걸까 싶을때 쯤 헬리가 그 거대한 생가를 보고 “세상에Jesus“라고 충격 섞인 감탄을 말하자, 루먼의 이념에 완전히 감화돼있는 어빙이 “아니요, 키어에요.No, Kier“라고 말한다.
이 짧은 대화는 이 곳의 미묘한 면들을 우회적으로 시사한다. 알다시피 ‘Jesus’는 관용적 감탄사인 동시에 ‘예수’를 뜻한다. 물론 이 순간 헬리는 종교적 맥락 보다 그저 감탄의 의미로 이 말을 뱉은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건 거기에 붙은 어빙의 “No. Kier.“라는 대답이다. 이 말은 마치 여기서 ‘키어’가 ‘예수’의 대체어로 기능하는 것 처럼 보이게 만들고, 나아가 단호한 어빙의 어투로부터 ‘Jesus’라는 비-‘루먼’적 단어가 여기서는 이단적인 무엇이 된 것 같은 뉘앙스마저 풍긴다. 요컨대 어빙의 짧은 대답은, ‘루먼’이란 회사로 하여금 이단이라면 중의적 감탄사 마저 금하는, 청교도적 기업 같은 인상을 준다. 즉 여기서 어빙은 ‘루먼’이라는 회사와 키어라는 경영일가를 일터가 아니라 유사-종교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세브란스: 단절>속 ‘루먼’을 단순히 기독교적 비유물로 단정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더라도, 방금 전 언급한 대사와, 씬 속에 기독교적 비유가 서려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루먼’과 그들의 ‘단절’은 어떤 종교적 집단이자 행위, 혹은 그에 관한 상징일까?
속단하기 전에 몇 장면을 교차해서 생각해보자. 2화의 초반부. MDR팀에 새로 들어온 헬리를 소개하고 환영하기 위해 대화시간을 가진다. 팀원들과 상위 관리자인 밀칙이 함께 둥그렇게 둘러앉은 채 공을 굴려서 사람을 정하고 그에따라 자신을 소개한다. 그런데 이들의 형상은 은근하게 마약중독치료모임이나 심리상담의 관습적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히 여기서 자신을 소개하며 뜬금없이 ‘루먼’의 핵심 신조 9개를 전부 알고있고, 그 중 가장 좋아하는 게 뭐냐는 질문에 “9개 모두요.“라고 답하며 갑자기 ‘신뢰게임’을 하려는 어빙의 모습은, 더더욱 그를 평범한 회사원 보다 모종의 테라피를 필요로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2화의 또 다른 초반부, 마크가 피티와 함께 찍은 팀사진을 치워버리자, 어빙은 내규에 따르면 새로운 사진을 찍기전까진 이전 팀사진을 책상에 놓아야한다며 없어진 사진을 요구하며 불편함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순간의 미묘한 점은 이전까지 피티에 대해 아쉬움이나 애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에게, 피티와 찍은 사진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단순히 팀사진이 책상위에 있어야한다는 ‘루먼’의 내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어빙은 팀원보다 팀사진이 더 중요한, 말하자면 삶보다 원칙이 중요한 원칙주의자. 심하게 말하면 강박이 삶을 지배한 기계적 회사원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이런 인상들에는 얼마간 나의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세브란스: 단절>은 단 한순간도 어빙을 (그리고 다른 모든 등장인물들을)명료하게 캐릭터화한 적 없기 때문이다. 다만 어빙에게 서려있는 독특한 면모들에서 매끄럽거나 일관된, 모종의 총체성이 느껴지지 않음만은 분명해 보인다. 즉 이 속의 어빙은 ‘키어’라는 종교의 선교사인 동시에, 테라피가 필요한 환자이며, 매우 작고 사소한 것들에 결벽적 강박을 지닌 복합적 인물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빙은 이상한 것들로 가득 차있고, 우리는 그에게서 어떤 현실에 관한 비유(가령 종교적 은유 같은 것)을 유추하다가도 후퇴하고 만다. 즉 <세브란스: 단절>은 어빙을 설득력있고 그럴듯한 인물로 봉합하는데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이 해괴한 정체성(들)을 하나의 인물에 우격다짐식으로 새겨넣는다. 그 결과 우리는 어빙을, 나아가 MDR팀원들을 어떤 상징과 의미로 읽으려다가도 실패하길 반복하며 이 이상한 회사에 함께 갇힌 것만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4.
그리고 5화의 중반부. 어빙은 광학 및 디자인팀의 책임자인 버트와 우연히 마주치며 묘한 우정을 쌓아가다, 그들 사이에 구조적 오해가 있었음을 알게된다. 그리고 그 오해를 푸는 과정에서 버트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버트 또한 마찬가지임을 느낀다. 그는 버트와 이야기를 하며 은근히 손이 닿고, 눈을 맞추며, 농담을 주고 받는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며, 그토록 신봉했던 회사 내규를 아무렇지 않게 거역하기 시작한다.
이 변화는 사소하지만 중요하다. 버트와의 관계 속에서 어빙의 심리가 변해가는 양상은 은근하며 느릿하지만, 동시에 매우 파격적이다. 그간 어빙에게 서려있던 몇 가지 복합적 정체성을 생각해보면, 버트에게 “플라토닉을 넘어서는” 마음을 느끼는 어빙은, 단순히 한 명의 인간이 동성애적 자아를 발견한 것을 넘어, 한 개인이 스스로 밟고 서있던 모든 삶의 근간에 자발적으로 균열을 내는 것 같기도 하다. 어빙에게서 느꼈던 갖가지 이상한 면들을 다시 생각해보자. 광신도와 원리원칙주의자, 그리고 정신질환자 등. 그러나 버트와 싹트는 에로스 속에서 이런 면면들은 점차 모두 극복되거나 사라지고 만다.
7화의 초반부. 이윽고 밀칙에게 버트를 이대로 죽일거냐고 소리치는 어빙은 종교의 이면을 알게 된 선지자이자, 스스로의 강박과 질병으로부터 벗어난 완치자이며, 비로소 사랑을 발견한 하나의 인간이 된 것만 같다. 물론 다분히 기독교적인 ‘키어’의 이념에 심취한 어빙에게 동성애라는 테마는 또한 종교적 맥락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그러나 그 외에도 기억과 인격, 신체의 물리적 활동, 언어와 감정까지 모든 것을 통제하는 ‘루먼’의 아래에 있던 어빙의 변화는 결국 모든 맥락으로 부터 탈출하는,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주체가 되는 것 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무색무취의 공간으로부터 유색유취의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5.
몇 가지 장면을 징후로 삼아 암시적으로 훑어봤지만, 그렇다고 <세브란스: 단절>이 성적, 종교적, 사회적 해방을 숭고하게 그리는, 현실정치적 시리즈로 압축되는 건 아니다. 반복적으로 주지했듯이, 이 시리즈는 서사적으로든 그 외적으로든, 하나의 특정한 감흥과 의제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의도적으로 그런 의미망에 구속되는 것을 회피하며 이야기를 쌓는다. 정치적 이분법의 무수한 중첩들. 단지 그 모순만이 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어빙이, 헬리가, 마크와 딜런이 무엇을 상징하냐고? 그들은 무수한 것들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아무 것도 상징하지 않는다.
어쩌면 <세브란스: 단절>의 내포된 의미를 찾고 싶은 사람에게 이 글은 더 미스테리만 유발하는 짜증나는 글일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이는 작품이 스스로 원하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암울함을 다루고, 현실의 특정한 단면을 끌어오면서도, 그것을 이해가능하고 명쾌한 논리로 정리하려들지 않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모종의 모호함과 여운만이 남는 것. <세브란스: 단절>이 우리가 사는 현실을 다루면서도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세브란스: 단절>엔 여전히 이 글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다른 무수한 것들이 있다. 암시적인 대사들, 딱잘라 말하기 어려운 무드들, 또 다른 무언가 상징하는 것 처럼 느껴지는 오브제와 행동과 말들, 혹은 동시에 거기서 탈출하고 벗어나는 요소들. 이에 대해 또 의미와 해석을 덧붙여볼 순 있겠지만, 중요한 건 <세브란스: 단절>이 그런 맥락들 사이에서 하나로 좁혀지길 끊임 없이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리즈의 등장인물들은 정말 말 그대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중인격자가 된 사람들이다. 자의와 타의의 사이에서, 자아와 타자의 사이를 미끄러져가며, 자유와 감금을 오가는 사람들. 이들의 이야기는 열려있긴하지만, 너무 조금만 열려있어서 거의 아무것도 안 보이거나 혹은 너무 많이 열려있어서 어디로 가야할지 알기 어렵다. 그리고 우리는 이 좁거나 넓은 틈에서 첨예한 의제와 모호한 시어의 사이를 오간다. 너무 뜬구름잡는 소리 같은가? <세브란스: 단절>이 우리를 사로잡으면서 도망치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마치 회사 밖에서 눈을 뜬 마크가, 아무것도 모르지만 많은 것을 아는 것 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