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상한 일이다. 한국에서 죽쓰고 있는 디즈니 플러스를 굳이 가입한 뒤(아니면 통신사 프로모션으로 들어왔거나) 수많은 콘텐츠 중에 굳이 <완다비전>에 들어왔다는 것은 당신이 분명 마블 시리즈(이하 MCU)의 팬이기 때문이다. 시리즈를 보는 별다른 이유도 없다. <닥터 스트레인지2 : 대혼돈의 유니버스>(2022)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 따름이니 당연히 보러 올 수밖에 없었겠다. 그런데 <완다비전>은 마블 팬인 당신으로 하여금 처음부터 당혹감을 주게 된다. 죽을 줄만 알았던 비전(폴 베타니)이 버젓이 완다(엘리자베스 올슨)와 시트콤을 하고 있다니? 그것도 흑백 화면으로! <완다비전>은 시리즈 밖 사정 혹은 MCU의 스토리라인은 전혀 모른다는 듯 군다. 마치 별개의 이야기처럼 능청스럽게 콩트를 진행하는 것이다. 1화가 다 끝나가서야 <환상특급>을 연상하게 하는 마무리로 떡밥을 짐작하게 되지만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될지는 여전히 미궁에 있다. 이 당혹감은 이상하게도 당연하다. 우리가 으레 나올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MCU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니까. 심지어 그동안의 이어져 온 마블의 내러티브와 전혀 연관도 없어 보인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완다비전>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정확히 고백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야기를 따라가려면 수십 시간의 영화를 먼저 보고 와야 하는, 거대한 울타리가 생겨버린 마블 시리즈는 그것을 향유하는 팬들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 연속의 과정에 있는 사람만이 <완다비전>을 보며, 당혹감을 느끼는 것이다. 도대체 당신은 무엇 때문에 (MCU의 스토리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완다비전> 2화를 이어서 봐야하는가? <완다비전>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팬들의 당혹감을 원동력 삼아 극을 이어나간다. 시리즈는 <완다비전>을 둘러싼 경계 그 자체를 드러내어 OTT가 가미된 MCU의 지속가능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말대로 과연 <완다비전>은 모니터 안팎에서 반복적으로 경계 혹은 구획의 행위를 지시한다. MCU라는 구획에서의 팬과 비(非)팬의 온도차, 완다가 만들어낸 시트콤 세계의 영역, 모니터 안을 보고 있던 관객이 갑자기 모니터 밖 또 다른 재현의 세계로 내던져(4화 참조)지기도 하면서 각자의 층위에서 구획을 감각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완다비전>이 드러내는 구획의 감각은 무엇이란 말인가.
1.
가장 빠르게 감지되는 것은 MCU의 구획이다. 확률은 희박하지만 MCU의 서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완다비전>을 처음 봤다고 상상해보자. 단순히 내러티브의 이해를 넘어서 어떤 맥락도 알지 못한 채 외계인처럼 이상하게 생긴 탈모 인간이 초능력을 쓰는 시트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설령 시리즈 자체의 힘으로 3화 이상 끌어왔다고 하더라도, 4화에서 완다 밖 세계로 갑자기 전환하면서 그들은 2가지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MCU에 편입하던지 아니면 하차하던지. 반면 MCU를 꾸준히 따라온 팬들은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아니 오히려 당혹감을 느끼기에 도대체 어떤 의도가 있을까하며 계속 따라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분기점인 4화에 가서는 전자와 정반대로 이 시리즈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이는 순전히 울타리의 안팎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팬들은 모종의 익숙함을 기대하면서도 새로운 형식이 등장하면 그것대로 신선함을 느낀다. 이건 ‘마블’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팬들의 신뢰에서 비롯할 수 있는 모험이며, <완다비전>은 그 같은 신뢰를 영리하게 이용한다. 어떨 때는 MCU를 이용하다가도 그걸 다시 역이용하여 다른 기대감을 만들어 내는 장치로 활용하는 것이다. 심지어 비슷한 세계관(X맨 시리즈)의 동일 인물을 차용(퀵실버, 피에트로)하며 서술 트릭으로 활용하기까지 한다. <완다비전>은 MCU의 자장에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다른 MCU 작품이 시도할 수 없는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낸다. 일종의 표상이 되어 버린 MCU는 이제 스스로 그 지위를 이용해 다른 가능성을 점치고자 하는 것 같다. MCU는 단순한 표상을 넘어 하나의 장르, 혹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이정표를 구축할 수 있을까? 그것을 단언하기에 섣부를 순 있지만 적어도 <완다비전>은 MCU가 쳐놓은 울타리의 감각을 시도한다는 건 분명하다.
2.
구획은 시리즈 바깥에서만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완다비전>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다시피, 내러티브 안에서 완다의 세계를 다루는 방식 역시 구획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완다의 세계는 거대한 TV고 그 곳에서 펼쳐지는 시트콤들은 TV쇼처럼 상정되니까. 여기서 TV라는 요소는 <완다비전>에 있어 의미심장한 존재다. ‘완다비전’이라는 제목부터가 이를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 제목은 연인관계로 등장하는 히어로 완다 막시모프와 비전의 이름을 이은 단어다. 그러나 우리가 직감적으로 느끼다시피 제목 ‘완다비전’이 ‘텔레비전’의 변형이라는 것도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직감대로 <완다비전>은 미국 TV시트콤의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를 철저히 고증하여 TV시대 미국의 열광을 재현한다. 이처럼 <완다비전>은 TV라는 매체를 매개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음은 시리즈 안팎으로 지시된다. 그런데 왜 하필 2000년대까지였을까? 그리고 왜 하필 시트콤이었을까. 2000년대는 TV편성표대로 프로그램을 봐야만 했던 마지막 시대였다. 그리고 시트콤은 그런 TV시대와 함께 해온 장르였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우리가 아는 시트콤의 이름들은 모두 2000년대까지 마지막 시효를 다하고 사라졌다. 그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시트콤이야말로 함께 시청을 하면서 시너지를 보는 장르니까. 그리고 그 ‘함께 본 경험’이 추억이 되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 사람들은 이미 끝난 <프렌즈>(19942004)나 <오피스>(20052013), <빅뱅 이론>(2007~2019) 등을 여전히 보고(특히 밥 먹을 때와 같이 배경으로 까는 콘텐츠로써) 있는지 생각해보라. <완다비전>은 누구도 TV가 그은 구획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시대에서 그 구획의 힘이 살아있는 시대까지만 재현한 다음, 완다의 텔레비전을 부셔버린다. 이는 TV 이후의 OTT 시대를 노골적으로 은유한다. TV가 편성표(시간)를 축으로 자신의 구획을 공고화했다면 OTT는 플랫폼(공간)을 축으로 자신의 구획을 공고화한다. <완다비전>은 완다가 설정하고 있는 세계를 축으로 스크린이 가로지르는 구획과 그 구획 밖의 플랫폼, 그리고 그것을 향유하는 우리에게 보내는, 일종의 전파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전파를 통해 OTT의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완다비전’이 대체해버린 ’tele-‘의 존재는 의미심장해진다. ‘멀리 떨어진’이라는 의미를 가진, 고대 그리스어 부사에 파생된 이 접두사는 그야말로 20세기를 상징하는 존재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텔레그램(전보), 텔레비전, 텔레폰, 세기말에 등장한 <텔레토비>까지… 신기술이나 그것을 상징하는 문화적 상징에 어김없이 붙었던 이 접두사가 인간들에게 부여했던 마법은 바로 ‘연결’이었다. 특히 텔레비전은 시간을 중심으로 동시에 같은 것을 ‘보게’ 만드는 연결체였다. 그런 마법의 시대가 지나가고, 시간의 축이 사라진 지금의 세계는 과연 어떤 양태를 띄고 있는 것인가. 이제 사람들의 동시의 시대를 살아가지 않고 각자의 시대를 살아간다. 유행마저 분절적으로 쪼개졌을 뿐만 아니라 콘텐츠의 관람 형태 역시 울타리 안팎의 사람들이 철저히 분리되고 있다. <오징어게임>(2021) 같은 시리즈가 아니라면, 아니 설령 수억명이 본 시리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제 완전히 다른 시간과 조건 속에서 작품을 보고 있지 않은가? OTT의 감각은 같은 작품을 두고 얘기한다 하더라도 개별화된 경험을 남긴다는데 있다. 이제는 TV 앞에 모여 앉아 가족들끼리 보던 시리즈, 시트콤 이야기가 윤색되어버린 과거처럼 묘사되는 것(2부에 쓴 <아폴로 10 1/2 : 스페이스 에이지 어드벤처>가 이를 정확하게 보여준다.)이 그렇다.
3.
그렇다면 <완다비전>은 OTT 시대를 긍정하는 것일까, 부정하는 것일까. (좀 더 포괄적으로 표현한다면 구획과 영역의 필요성을 긍정하는 것일까, 부정하는 것일까.) 시리즈는 거기에 대한 답을 확실히 내놓지 않는다. 대신 미묘한 태도로 현재의 상태를 증언할 뿐이다. 시대별 시트콤을 통해 과거를 추억하기도 하지만 완다가 스스로 TV를 부셔버림으로써 미래지향적 태도를 보여주기도 하고, 시리즈는 OTT를 통해서만 볼 수 있으나 그 이후의 완다 이야기를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2>에게 넘겨주는 것 역시 과도기적인 현재를 상징하는 것만 같다. 종합해볼 때, <완다비전>은 혼란스러운 현재(마치 완다처럼)를 받아들고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것만 같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시리즈는 명확하게 그어버린 구획을 부러 흐리는 작업을 진행한다.
그런 측면에서 먼저 언급해야하는 지점들이 있다. 시리즈로 다시 가보자. 한쪽에는 TV쇼가 펼쳐지고 있고, 다른 한 쪽에는 TV쇼를 끄려는 인물들이 있다. 그 과정에서 헥스 밖의 인물들은 어느 정도 완다의 세계를 모니터로 봐야만 하는 관객으로 강제된다. 그 순간, 모니터 밖의 우리와 모니터 안의 인물들은 동일시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적어도 그들의 세계와 분리되는 시기까지는 ‘함께’ 이 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시공은 물론 제4의 벽마저 초월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건 오직 OTT를 통해서만 달성 가능한 것이다. 헥스 밖 인물들 역시 모니터로 보고 있으니까. 모든 걸 구획하고 분리할 줄로만 알았던 OTT가 시리즈 안 인물들과 동일화할 수 있음을 <완다비전>은 시도한다. 이 동일화는 내러티브에서의 명분과 결합하여 겹침, 즉 디졸브의 상태로 나아간다. 그러다 불현듯 자신의 정체(지금 보고 있는게 완다의 TV쇼라는)를 드러냄으로써 분리되어버린다. 그 결과 ‘따로, 또 같이’라는 양가적 상태로 거듭남으로써 OTT 콘텐츠의 미래를 보여주려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4.
무엇보다 <완다비전>이 흥미로운 지점은, 노골적인 함의를 가지고 그것을 지시하긴 하지만 자신의 브랜드와 내러티브, 매체의 속성을 절묘하게 겹쳐내면서 독특한 감각을 만들어 내려하는데 있다. 이 ‘겹침의 상태’는 시리즈를 설명하는 또 다른 중핵이다. 이를테면 TV의 구획을 드러내기 위해서 시트콤이란 장르를 들고 왔지만,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완다가 만들어낸 자기 상상적 세계에는 어떤 고통과 죽음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세계는 시트콤이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제나 깔깔대며 1화가 끝날 때마다 (거의)리셋이 되어져 있는 세계 말이다. 시리즈가 진행되고 우리는 완다가 구성했던 모든 세계가 그녀의 과거와 현재의 경험과 슬픔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완다비전>은 그 자체로 완다 그 자체이자 현실에 대한 회피, 그에 따른 강렬한 반작용이 작동되고 있는 세계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영화나 시리즈를 보는 이유 역시 현실에서 벗어나거나 불가능한 일을 재현하길(그 과정의 쾌감도) 원하면서도 현실에 앉아있는 자신에게 투사하여 그에 대항하기도 하는, 이중적 상태를 감각하기 위해서이지 않는가. 그 상태가 MCU 세계관에서도 전이되어 재현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완다비전>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만든다. 또 다른 중첩의 지점은 <완다비전>은 MCU 영화나 시리즈들이 가지는 히어로-빌런의 구도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완다는 신경쇠약이 걸린 히어로이자 빌런이며, 그러니 쉴드의 요원들이 웨스트윙의 사람들을 볼모로 잡은 그녀의 TV쇼를 막아야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빌런처럼 등장한 애거사 하크니스(캐서린 한) 역시 빌런이라기보단 오히려 완다의 조력자처럼 느껴질 정도다. 아니 그녀야말로 생존에 필요하거나 자신의 목적을 이룰 때나 능력을 쓸 뿐 타인을 공격하는 것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극이 끝나고도 살아남게 된다. 심지어 <완다비전>은 평소의 MCU 콘텐츠처럼 히어로에 인한 빌런의 죽음(오히려 죽음은 히어로에 가까운 비전에게만 주어진다.)이나 빌런 스스로의 회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물론 시리즈 마지막에 완다는 자신의 행동이 불러일으킨 결과를 깨달으며 비전과 자신이 만들어낸 아이들을 없앤다. 그러나 과연 그녀는 자신의 세계 그 자체였던 ‘완다비전’을 파괴한 것일까? 어떤 의미론 그렇다. 하지만 그 방향성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다. <완다비전>은 어떤 의미에선 빌런 성장기에 가깝다. 시리즈에서의 모든 사건이 끝난 뒤, 그녀는 이내 사악한 흑마법서 ‘다크홀드’를 읽으며 ‘스칼렛 위치’로 다시 태어나 더욱 타락한 빌런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이후 <닥터스트레인지2>에서 스칼렛 위치는 이제 환상에 빠지지 않는 대신, 멀티버스에서 다르게 공존하는 아이들을 차지하려 한다. 놀랍게도 그 아이들은 <완다비전>과 동일하게 쌍둥이 형제다. 이건 꽤나 의미심장하다. 완다는 분명 <완다비전>에서 현실에 도피하기 위해 자신이 만든 시트콤을 ‘보아왔’고 스스로의 저항을 통해 시리즈 속에서 빠져나왔지만, 여전히 자신이 꿈꾸던 욕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어떤 측면에선 욕망이 더욱 강화가 된 셈이다. 우리는 이 같은 사태를 정확히 묘사할 수 없다. ‘성장’도, ‘타락’도 아니며, ‘파괴’도 ‘회귀’도 아닌, 이 중간자적 상태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5.
<완다비전>은 이처럼 다중의 레이어를 통해 시리즈와 시리즈 그 자체,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들에 대하여 생각해보게끔 만드는 흔치않은 작품이다. 물론 그 시도가 너무 설익거나 비약이심하다든지, MCU라는 세계관 자체가 편협하다는 지적 역시 동의한다. 그러나 <완다비전>은 그 사실을 모른척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주목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의 한계와 단점을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원동력 삼아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하는 것, 설령 어설픈 동치라 할지라도 대화의 중간 지점을 만들고자 하는 그 시도에 대해서는 말해볼 필요가 분명히 있다. 확신할 수 있는 울타리의 구획 안에서 확신할 수 없는 세계를 지근거리에서 바라보는 것, 그럼으로 무언가로 규정할 수 없는 이 중간적 상황은 OTT가 처해있는 현실이자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OTT 같기도 하다. <완다비전>은 그런 OTT시대의 미래에 대한 디즈니의 원대한 야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