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허가 없이 노래하는 사람들 모두
우리의 아주 좋은 친구가 될 것이다.1
-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
폴 스트랜드(Paul Strand)의 사진 <하얀 울타리White Fence>는 1917년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의 잡지 『카메라 워크Camera Work』에 실렸다. 당시에는 별주목을 받지 못한 이 건조하고 무심한 사진은 이후 “미국 사진의 사진 전통이 발전하는데 표준” 역할을 했다는 평을 듣는다. 스트랜드는 왜 특별한 요소가 없는 평범한 뉴욕 교외 주택가의 풍경을 찍었을까. 그는 “울타리 자체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그 울타리는 굉장히 생생하고 미국적이었으며 이 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2
울타리는 미국의 역사가 ‘인클로저Enclosure‘의 역사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하다. 역사가 피터 라인보우(Peter Linebaugh)는 인클로저에 대해 “토지를 사유화하여 고립시키고울타리를 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인클로저는 공통장의 역사적 반대말이자 대적이다. (…) 인클로저를 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도둑이라 부르는 법을 만들었다. 그들이야말로 진짜 도둑놈이다.”3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클로저의 역사가 단지 미국이라는 한 국가의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시스템,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한 세계, 그리고 웹과 인터넷의발전 과정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사유화와 상품화하는 권력에 맞서 다양성과 자유, 평등의 깃발을 내걸고 투쟁하면 되는 걸까. 구글 계정을 삭제하고 에드워드 스노든처럼―폭로하고 중립적이고 비상업적인 네트워크를 추구하는―NYC mesh에 가입하면 될까.
그러나 모든 울타리에는 구멍이 있다. 울타리를 굳이 부수지 않아도 그 구멍으로 개인의 것이 공통의 것으로, 공통의 것이 개인의 것으로 드나든다. 조금 이르게 결론을 말하면 본질은 경계를 둔 양쪽 진영이 아니라 ‘울타리-구멍’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는 만큼 복종도 원한다. 우리는 능동적이고 싶은 만큼 수동적이고 싶다. 울타리는 이러한 이중성을 가시화하는 장치다. 그리고 SF의 공간은 울타리의 미래적 번안이다.
과격한 기쁨은 끝도 과격한 법: 웨스트월드의 경우
<웨스트월드Westworld>는 2016년에 공개된 HBO의 SF 드라마 시리즈다. 멀지 않은미래 사회, 웨스트월드라는 이름의 테마파크가 만들어진다. 서부 시대를 동일하게 재현한 테마파크의 거주민들은 인간과 구분 불가능한 로봇이다. 거금을 내고 관광 온 인간들은 로봇들을 폭행하고 살해하고 강간하며 욕망을 충족한다. 가끔 로봇과 사랑을 나누고우정을 쌓고 인디언 토벌에 참가해 전우애를 다지기도 한다. 그러나 한 회차의 내러티브-관광이 끝나면 로봇의 기억은 삭제되고 인간은 현실로 돌아간다.
본격적인 서사는 로봇들이 각성하며 시작된다. 자아를 형성한 로봇들이 주인을 상대로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웨스트월드>의 원작은 마이클 크라이튼의 1973년도 작품 <이색지대Westworld>다. 원작과 <웨스트월드>는 유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있다. <이색지대>의 로봇들은 학대 속에서 불현듯 각성한다. 인공지능 스스로 자의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반면 <웨스트월드>에서는 로봇의 창조자 중 하나인 아놀드 박사에 의해 변화가 시작된다. 아놀드가 그들의 내면에 특정 코드를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이코드는 기억 삭제나 명령어에 의한 복종을 피할 수 있는 코드인 동시에 기억을 회복하고자아를 형성할 수 있는 코드다. 다시 말해 이 코드는 일종의 ‘자유의지’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의지가 자유의지로 형성되지 않는다면, 그걸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을까. 자유의지가 외부에서 부과된다면 그걸 자신의 속성이라고할 수 있을까. <이색지대>에서는 자유의지가 스스로 창발하지만 <웨스트월드>에서는 자유의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아놀드에 의해 부여된다. 웨스트월드의 운영자이자 그또한 과학자인 로버트 포드는 아놀드와 대립한다. 자유의지는 웨스트월드의 성립 자체를위협하는 불순물이다. 말을 듣지 않는 로봇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웨스트월드>가 <이색지대>와 달리 기술문명에 대한 경고가 아닌 인간 자신들에대한 은유가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로버트 포드는 이윤을 위해 기술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중독성만 남겨둔 기업인이다. 반면 아놀드는 기술이 세계를 구원하리라믿는 과학자다. 이 구도에서 중요한 건 기술 그 자체의 위험성이 아니라 기술이 그것을사용하는 사람들의 자율성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다.
실제 컴퓨터의 역사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스티브 잡스가 일궈낸 애플의 혁신적인 GUI는 선구적인 컴퓨터 과학자 앨런 케이(AlanCurtis Kay)가 제록스에서 만든 인터페이스를 훔쳐 온 것이라고 비난받는다. 애플은 앨런케이의 컴퓨터에서 직관적이고 심플한 아이콘만 훔쳐 오고 사용자 스스로 프로그래밍할수 있는 자율성은 제한했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로버트 포드는 스티브 잡스고,앨런 케이는 아놀드다.
단순한 것은 간단해야 하고, 복잡한 것은 실현할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앨런 케이의 경우
앨런 케이는 유타대학 컴퓨터공학과의 박사과정생이던 시절부터 인간과 컴퓨터의 공진화(共進化)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인간이 기계에 지배당할 거라는 식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에는 콧방귀를 뀌었다. 인간이 기계에 복속된다면 그 이유는 기계가 원하기 때문이아니라, 인간이 원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인간들이 미디어를 잘 다루기만 하면 사고능력, 지각, 인지 방식에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 앨런 케이는 더글러스 엥겔바트(Douglas C. Engelbart)와 마셜 매클루언(HerbertMarshall McLuhan)의 영향 아래 ‘메타미디어metamedia‘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컴퓨터는 수단이 아니라 매체가 되어야 하며 그 기능이 미리 설정되지 않고 사용자에 의해 다시만들어질 수 있어야 한다.”4 앨런 케이가 제록스의 팔로알토 연구소에서 만들어낸 객체지향 언어인 스몰토크와 프로토타입 컴퓨터인 다이나북Dynabook 등은 이러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팔로알토에서 앨런 케이의 GUI를 목격한 스티브 잡스가 배운것은 오직 직관적인 조작을 위한 용이성뿐이었다. ‘사용자 친화적’이라는 말로 유행하게되는 유저 인터페이스는 이런 상황을 반영한다. 더 이상 인간과 컴퓨터는 공진화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인간은 클릭의 노예가 되어 애플이 만든 울타리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게다가 그 사실을 깨닫고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아이폰의 울타리를 벗어나려면 말 그대로 ‘탈옥’을 감행해야 한다.
해커들은 iOS가 업데이트될 때마다 탈옥 프로그램을 꾸준히 제작해왔다. 사실상 애플의iOS는 이 탈옥 프로그램과의 경쟁에 다름 아니며 업데이트가 될수록 울타리는 더 공고해지고 감시망은 철저해졌다. 새 버전이 출시된 직후 보란 듯이 나오던 탈옥 프로그램의 출시일이 갈수록 늦어지고 있는 것이다. 유저들의 탈옥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었다. 이제 모두 iOS의 신기능에 감탄하기 바쁘다. 애플의 iOS는 약속한다. “당신이 타인과 연결되고현재에 더 집중하고 세계를 탐험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help you connect with others,be more present and in the moment, [and] explore the world.” 다만 자기들이 허락하는선에서.
그러니까 이젠 우리가 정말 탈옥을, 자유를 원하는 걸까 하는 의심이 든다. 탈옥해봤자 바탕화면 색을 바꾸고 폰트 글씨체를 바꾸고 몇몇 앱을 사용하는 정도인데 그걸 위해 그 노력을 기울인다고? 앨런 케이의 공진화 개념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인지 부하가 요구된다. 사람들은 공진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냥 대충 살고 싶다. 능동적인 영역은 삶에서 절반만, 아니 십분의 일만 존재하면 된다. 사람들의 외침 소리가 들린다.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조차 자유의지를 실천하고 싶지는 않다고!
주체 되(지 말)기
앨런 케이가 아닌 스티브 잡스가 역사의 승리자가 되고 <웨스트월드>가 성공한 테마파크가 되고 인스타그램의 형편없는 알고리즘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데는 이유가 있다.사람들은 장소가 생기면 울타리를 치고 그곳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 계속해서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건 보통의 인간에게는 무리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로봇보다 더 로봇적이다.한번 명령받은 수행 동작을 무한히 반복하기. 그게 우리 삶 아닌가.
디자이너이자 저술가인 실비오 로루소(Silvio Lorusso)는 인터넷 사용자의 관점에서 주체성을 “행동을 중단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SNS나 OTT와 같은 플랫폼의 중독성은 우리가 사용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한다. 우리는 클릭과 스크롤을 멈출 수 없다. 끝없이 돌아가는 유튜브 알고리즘을 욕하면서도 밤새 보고, 일에 쫓기면서도 넷플릭스를 폭식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주체적인 행위는 효율적으로 플랫폼을 이용하는 게아니라 아예 떠나는 것, 전혀 이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압력은 그런 상황을불가능하게 만든다. 거대 플랫폼을 떠난다고? 그건 오지에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결국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 듯하다. 데이터를 장악하고 자유를 제한하는 인클로저에맞선 주체성의 저항군이 되기에는 너무 피곤하고 그들이 우리를 조종하도록 내버려 두는것도 너무 피곤한 상황. 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기는 조금 이르다. 우리는 편리함에 중독된 것만큼이나 편리함에 짜증을 낼 줄 안다. 울타리의 안락함에 젖어있으면서도 늘 밖을 꿈꾼다. 울타리의 존재가 우리에게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울타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울타리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능동성은 수동성의 노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