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동시적인 활동들

Carol & The End of The World

지구 종말까지 7개월 남은 시점에서 시작되는 애니메이션 시리즈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 (이하 <캐럴의 자세>)에는 재난 서사를 지탱하는 이론, 정치적 상황, 심지어 생존을 도모하는 인물들의 행위가 없다. 군대가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투입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그뿐이다. 대다수의 인물은 카르페디엠을 외치며 아쉬움 없는 여생을 보낼 작정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이 시리즈는 쾌락 및 유희와 거리가 먼 회계법인 행정 직원 캐럴(마사 켈리)의 단조로운 일상을 조명한다. 이를 통해 전하려는 바는 명확해 보인다. 시간의 유한성이 새삼스러워진 이때,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 묻고 알아내라는 것. 그러면 타자와 세계,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과의 관계를 더 깊이 사고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일단 이 접근이 시리즈를 가장 뭉클하게 감상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어딘가 단순한 것 같다. 또는 앞에서 말한 세상의 보편적 가치에 도달하기 위해 이 시리즈가 왠지 서두른다는 인상이 든다. 단순히 말하면, 각 에피소드가 일상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무기력하던 캐럴이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고, 그러면서 한 공동체의 풍경도 다른 결로 바뀌어 간다. 하지만 그것이 회사 복사기토너를 성공적으로 교체하는 일이라면? 토너를 얻기 위해 총까지 겨누었던 캐럴의 간곡함은 유아기의 퇴행적 모험담 가장자리에 애매하게 걸리게 된다. 터무니없거나 편견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이 애니메이션 작화도 언급하고 싶다. 간단한 인물 신체 표현, 납작하고 덩어리진 움직임을 보며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만화적 인상을 적절히 분간해 작중 심오한 현실의 문제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고 말인다. 주름 잡힌 얼굴들이 단체로 어린아이처럼 눈물 쏟을 때, 댄 쿠터먼의 블랙 코미디 스타일이 안기는 ‘애잔함’과 ‘유머’의 적절한 배합은 상당 부분 이 작화의 단순함 혹은 귀여움에 의존하고 있다. 사실상 <캐럴의 자세>가 요구하는 것도 그 지점이다. 서둘러 말하면 그 특성 자체를 지적하는 것보단 그 특성으로 인한 인상의 문제를 넘는 게 관건이다. 이 화면 너머, 저 세계의 모습이 실사 이미지만큼 생생하지 않다는 점, 그러므로 우리가 작중 세계의 현실을 반감해 경험한 것은 아닌지, 이걸 새삼스럽게 살피고 싶다. 애니메이션이 철저히 계획에 의한 인위라면 이 그림, 이 화면, 이세상 속에 존재하는 모든 운동과 활동, 움직임에는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쉬이 주목되지 않은 요소들을 감각하려 한다.

인물들이 종말에 관해 대화하지 않는다고 해서 종말이 없는 일이 아니듯, 작품이 강조하진 않더라도 작중 세상에는 세부적인 운동들이 복수로 존재한다. 하나의 세계에는 복합적인 원리와 이치가 섞이고 충돌하며 동시적으로 작동한다. <캐럴의 자세>는 시간에 종속되고 순응한 것처럼 보이지만 저항과 의지로 작동하는, 이것이 과하다면 대조를 일으키는 운동이 나타나고 있다. 한 대화를 상기 해보자. 다들 어째서 이 의문스런 회사로 모였나, 루이스(멜 로드리게즈)는 다들 죽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을 따라 캐럴은 그들이 죽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 상상이 이미지로 구현되어 화면을 덮치기도 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거기엔 행성의 충돌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상한 건 이 뿐만이 아니다. 인물들은 서류 더미를 쌓아놓고 쏟아지는 잠을 참아가며 키보드를 두드리지만 정작 엄청난 단위의 숫자를 다룬다는 것 말고는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노동(또는 유희)에 몰두하는것으로부터, 육체를 활성화해 사고를 마비시키고 패닉을 잠재우려 한 인물들의 상황과 긴밀한 연관을 지닌다. 우리 존재는 현실이 불만족스럽고 거부감이 들수록 환상에 의존한다. 오차 없는 실재가 아니라 실재인 것 같은 환상에 오차 없이 몰두하려 한다. 말하자면 <캐럴의 자세>에는 시간이 유한성의 숙명을 안고 인물들을 죽어야 하는 현실로 잡아끄는 힘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죽는 환상을 작동시켜 숙명화를 거부하고 이탈하려는 힘이 동시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 시리즈에는 수많은 사물이 있지만, 그것들이 본래의 쓰임을 가지고 움직이는 법은 없다. 에피소드마다 하나씩 등장하는 사물들은 그에 대한 인물의 집착을 보여준 뒤 실은 그것이 불필요한 것이었음을 일러주는 데 쓰인다. 캐럴이 사활을 걸고 찾았던 토너는 다른 누군가가 교체해 둔 토너로 대체된다. 루이스의 브로치를 찾기 위해 물품 보관소를 방문했을 때는 처음의 목표와 다르게 캐럴이 목도리를 얻어가며 마무리된다. 심지어 그 목도리의 주인은 느슨하게 추측될 따름인데, 어쨌든 캐럴이 잃어버렸던 적이 없는데 그녀가 가져간다는 게 흥미롭다. 루이스의 잃음이 캐럴의 찾음으로 전환되는 흐름이 인상적이다. 단지 인물들을 서로 매개해서가 아니다. 사물은 사물끼리 대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시간을 거친 것은 반드시 다른 무언가로 바뀌고 교환되는 세계의 거대한 이치를 툭 건들기 때문에 그렇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대체 불가하단 사실도 나란히 상기된다. 회사에테리라는 동명의 사람이 넷이나 있다는 점은 웃음을 주지만 데이비드가 여럿이란 점은 눈물을 안긴다. 과로사해 죽은 데이비드의 아내는 여러 남자(‘데이비드’들)와 동거 중으로 죽은 데이비드의 존재를 망각한 상태다. 아내를 위해 각자의 역할을 수행 중인 데이비드들은 존재의 대체 가능성을 존재 의 사라짐(죽음)으로 역설한다.

데이비드의 죽음은 인물들이 비로소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면서 벌어진 것이었다. 부조화를 이룬 이 관계에는 어쩌면 개인의 죽음을 통해 사회의 ‘덜 외로운’ 죽음을 연습하는 특권적 위치가 담겨 있을지 모른다. 이름도 모르던 회사 동료들이 데이비드의 장례식에 방문하는 반전이 아무리 두텁게 펼쳐져도 그의 죽음은 슬프다. 굳이 7개월(종말까지의 기간)을 더 앞당긴 죽음이 그렇다. 명징한 죽음에 비해 모호한 건 인물들이 무맥락으로 화면 앞으로 걸어 나와 자기 이름을 언급하는 쇼트들의 정체다. 캐럴이 동료들의 이름을 익히고 부르던 장면들이 방출하던 생기라곤 볼 수 없는 흑백 화면, 그 안에서 인물들은 무표정으로 자기 이름을 말하고 얼굴을 좀 보여주다가 사라진다. 저승에 도착해 생애를 보고하는 것 같고 다소 연극적인 구도다. 이렇게 장면 사이에 이따금 틈입하는 이 쇼트에는 (데이비드의 시신은 주지 않았던) 죽음에 대한 실감이 있다. 그것은 단지 죽은 것 같은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죽음의 분위기가 살아있는 존재를 감싸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 이 시리즈에게 죽음의 시간으로 넘어가지 않으려는 조치, 곧 종말에 ‘대비’하는 자세가 중요하지 않은 까닭은 죽음으로 건너가는 경로가 이미 삶 안에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 다음에 온 결과인 셈이다.

캐럴과 그의 언니 엘레나가 여행을 떠난 에피소드도 중요하다. 특이하게도 이들의 여행기를 담은 이 에피소드는 통째로 엘레나가 촬영하는 카메라를 거쳐 서술된다. 우리는 카메라 뷰파인더로 녹화 대상을 바라보는 것 같은 구도에서 엘레나가 포착한 무언가를 경험한다. 이 카메라에는 대부분 캐럴의 모습이 담긴다. 엘레나는 여행을 통해 캐럴과 단절됐던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한다. 그런데 더 주목해야 하는 건 의도적으로 촬영된 그녀 이외의 장면들이다. 엘레나의 촬영물에는 렌즈 앞에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는 동물들처럼 화면을 무질서하게 가로지르는 것들이 많다. 또는 예고 없는 캐럴의 몸짓, 그 때문에 갑자기 화면에 들어온 허공, 속도감을 따라가지 못한 기계의 글리치된 화면 등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움직임이 촬영자(엘레나)가 의식하지 못한 순간에 끼어든다. 불필요해 보이는 쇼트와 대자연의 풍경 쇼트들도 있다. 정작 카메라는 인물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말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작동을 멈춘다. 엘레나의 카메라는 단순한 대화의 도구가 아닌, 범우주적 차원의 필연성이 한층 강화된 가운데 그만큼의 우연성을 채워 내는 도구다. 인간의 여력으로 통제 불가한 필연이 있다면, 통제를 벗어난 순간에서만 가능한 우연도 있음을 진단한다. 언제 무엇이 맞닿은 결과인지 알 수 없는 그 우연들이 속수무책으로 통제되어 보이는 세상의 풍경을, 반복될 수 없고 무언가로 대체되면 또 다른 것이 되고 마는 유일한 것으로 잠시간 바꿔 놓는다.

자매의 대화를 그냥 넘어갈 순 없을 것 같다. 인물들은 강박적으로 미래를 논하지 않는다. 대화는 빈번히 과거를 향한다. 거기서 발견되는 건 기억의 오류다. 기억이 그 종류와 상태 면에서 애매하다. 엘레나는 기억하는 것에 관해 캐럴에게 두 번 묻고 캐럴은 두 번 답하는데 그때마다 엘레나는 그게 다인가? 하는 반응을 보인다. 도나(킴벌리 허버트 그레고리)는 자녀들과의 대화에서 그녀가 제대로 기억하는 게 없음을 알고 실망한다. 루이스는 옛 연인에 대해 떠올리지만 언급에서 그친다. 회상 장면을 넣지 않는 이 시리즈는 이따금 사진을 비추며 지금,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는 과거를 암시할 따름이다. 엘레나의 촬영물은 기억의 문제를 극복할까. 촬영물엔 특정할 수 없는 과거에 엘레나를 녹화된 상들이 불특정한 규칙으로 끼어드는데, 여기에 가공되지 않은 엘레나의 또 다른 모습이 담긴다. 그것은 엘레나가 스스로 긍정하지 못한 모습들이다. 이 쇼트들은 마치 캐럴과 이어가지 못한 대화를 대신하듯 배치되며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복원되는 자기와의 소통 가능성을 암시한다. 아닌 게 아니라, 캐럴을 단독으로 조명하며 시작된 <캐럴의 자세>는 끝에 이르러 캐럴 바깥으로 이동해 외부 관찰자의 시선을 구태여 개입시키며 캐럴이 다른 누군가의 타자가 되는 관계를 도입시킨다. 타자와의 동일시가 아닌 서로가 서로의 타자가 되는 관계적 구도, 공동체 의식.

다른 한편에서 <캐럴의 자세>의 강박은 그런 관계에 대한 낙관으로 미래를 쉽게 닫아버린다는 데있다. 종말 서사에 블라인드를 치는 시도와 종말론이 이야기에 봉사하는 구조는 다른 문제다. 인물들은 서로 함께하는 법을 알게 되면서 충만한 감정에 휩싸이지만 여기엔 함정이 존재한다. “정신놓은 어린 학생들이 참 많다. 봄방학을 맞아 놀러 왔다가 유흥에 빠져 돌아가지 못한 세대. 어른이 되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술에 취한 반항아들”. 캐럴은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이 말은 고스란히 캐럴 자신에게 되돌아가야 하는 말이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완벽하며, 후회할 것도 남지 않은 이 삶을 경험한 이들은 그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공동체를 이룬 서로가 서로를 집단적으로 상실한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댄 쿠터먼은 (인물의 대사를 빌려) 그런 고통을 짐작하면서도 이 시리즈가 보여준 변화가 세상에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를 지나친 낙관처럼 받아들인 이라면, 그런 변화를 겪은 삶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데는 동의하나 영원한 진리가 될 순 없음을 더 간명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은 아닐까. 상황이란 것은 파편적인 순간의 연속이며 그 안에서 적용되는 진리는 일회적이고 단면에 불과하단 사실을 겪어 본 이들은 이 시리즈의 ‘끝’을 과연 긍정할 수 있는가. 물론,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개연성을 만드는 것이 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활동이다. 앞서 언급한 한 장면에서, 이 많은 사람이 모인 까닭이 죽음이냐 일이냐 물을 때, 거기서 어떠한 수식도 없이 끼어들어 갑자기 설득력을 안기고 죽음의 상상마저 너그럽게 감화하던 접합의 물질, 외로움. 오직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서만 홀로 추락하는 저 육중한 행성에도 붙여볼 수 있을 것 같은 외로움이라는 단어의 몸집. 부인하기 쉽지 않다. 그러면서 나는 이 납작한 애니메이션 너머로 정말로 찾고 싶던 것이 외로움의 더 생생한 형태였다고 고백하려 한다. 인물들이 흘린 눈물에서, 적막만이 감도는 방에서, 불현듯 스쳐 간 얼굴에서 나타났을 그 외로움을 어떻게 하면 더 외롭게 느낄 수 있을까. 이것의 실패로 인해 <캐럴의 자세>가 인물과 세계를 묶어내는 방식이 ‘지나치게’ 세상을 긍정하기 때문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은 아닌지. 그러나 또한, 외로움이 만든 매개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더 확실한 외로움을 감각하길 욕망하는 기저에는 보편적 외로움이 일상화된 현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캐럴의 자세>를 보며 그런 생각들의 뒤엉킴을 나는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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