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니발> 시즌1을 대상으로 한정한 글입니다.)
<간니발>의 첫 장면을 장악하는 공기는 극도의 불안과 흥분이다. 불안정한 급브레이크와 함께 도착하는 경찰차, 멀끔한 제복에 어울리지 않게 길 잃은 아이처럼 흐느적대는 카노 순경의 팔다리와 방황하는 시선, 침착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아우성과 헐떡거리는 숨소리까지. 7화에 이르는 시리즈 <간니발>의 짧은 도입부는 이처럼 광기에 휩싸인 인물을 제시하며 시작부터 세계의 공기를 후끈 달궈놓는다. 이 열기를 가중하는 것은 카노의 격앙된 언행이 무색하게 무응답으로 일관하는 저택 내부 인물들의 태도와 그로 인해 형성되는 대화불능의 긴장 상태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단지 충격적 비밀을 알아버린 개인이 표출하는 광기와 그에 대비되는 특정 집단의 침묵이라는 서사적 기틀만이 아니다. 카노 순경이 “너희들은 인간을 먹었다"며 소리를 지를 적에, 저택 내부의 한 노인은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소형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다. 이들은 왜 촬영을 하는 것일까? 물론 ‘카노 순경이 미쳤을 뿐’이라는 고토 가문의 증거물처럼 제시된다는 표면적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는 극중에서 사건의 진상을 흐리는 실질적인 증거로 기능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맥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제시되기에 베일에 싸인 고토 가문에 대한 우리의 의심을 더욱 증폭할 뿐이다.
아무래도 그들의 동기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줄곧 카노를 따라가던 2분 여 간의 롱테이크가 중단되고, 우리가 그의 광기 어린 표정을 확인하는 위치가 고토 가문 노인의 손에 들린 카메라 뷰파인더라는 점이다. 사실상 이 촬영 행위는 세계의 논리와 관계 맺는 내재적 구성물을 벗어나 그 세계를 보고 있는 이들의 흥미를 유도하려는 장치에 가까우며, 그 흥미란 잔혹하고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길 바라는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다. 멀찍이 떨어져 동물의 행동 양식을 관찰하는듯한 무대적 장면의 지속, 은폐한 채 뷰파인더를 통해 상대를 관음하는 시선, 뒤이어 모종의 진실을 발견한 인물의 얼굴을 정면으로 잡으며 그의 목을 낫으로 처리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소개한다고 봐도 좋을 <간니발>의 도입부에는 폭력적 이미지에 대한 욕망과 자의식이 맴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카노의 사망 이후, 쿠게 마을에 새로 부임한 순경 아가와 다이고 역을 맡은 배우가 다름 아닌 야기라 유야라는 점이 내게는 인상 깊게 다가온다. 불과 열 네 살의 나이로 칸느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그의 강력한 무기는 명실상부 무표정의 매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당시 <올드보이>에서 하나의 얼굴이 표현할 수 있는 한계에 도전하듯 희로애락을 전부 드러냈던 최민식의 열연과는 정반대로, 야기라 유야의 무표정은 <아무도 모른다>의 장남 아키라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응축하는 수렴적인 방식으로 관객을 매혹시킨 것이다. 여러 자리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야기라 유야의 캐스팅에 있어 바로 그의 눈이 가진 매력을 언급해 왔다. 심지어 그는 아이에게 쓰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묘하게 사람을 잡아끈다며 야기라 유야의 얼굴에 색기(いろけ, 성적 매력)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정은 <간니발>의 연출자 가타야마 신조에게도 다르지 않았나 보다. 한 인터뷰에 따르면, 야기라 유야가 품은 모종의 폭력적 이미지가 캐스팅의 주요한 이유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야기라상이 아니었으면 좀 더 뭐랄까, 초반에는 두려워하던 순경이 그걸 극복해 마을과 대립한다는 그런 느낌의 작품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야기라상은 처음부터 저지를 것 같잖아요? 중간부터 흉폭해지는 게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던 게 드러나는 느낌으로 되어있으니까…”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비교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인상 깊게 다가온 차이를 한 가지 언급하고 싶다. 바로 주인공 다이고의 묘사다. 우선 다이고 역을 맡은 야기라 유야에게는 헝클어진 머리와 수염이라는 원작 속 다이고의 외형적 조건이 없다. 그의 말끔히 정돈된 머리와 매끈한 얼굴은 그나마 수더분한 구석이 있었던 기존 다이고보다 훨씬 날카로운 인상을 준다. 원작 만화 첫 머리에 컵라면을 해치운 뒤, 담배를 피우며 스마트폰으로 괴담을 읽는 친근한 인상은 야기라 유야에게 조금도 주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여기에는 원작에 수시로 출현하여 인물과 독자의 거리를 좁히는 다이고의 내면적 독백조차 없다. 마을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다이고의 행동은 둘의 차이를 예시한다. 아내에 대한 성희롱을 듣자 원작의 다이고는 능청스레 웃음을 얹으며 그들과 동석하는 반면, 꼿꼿이 선 자세와 무심한 음성으로 둘러대는 야기라 유야의 다이고는 마치 자신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듯 슬며시 대립의 긴장을 세워놓는다. 가타야마 신조는 그를 캐스팅함으로써 기존의 다이고가 품은 얼마간 푼수적이고 때로 폭압적인 가부장적 성격을, 차가운 도시 남자의 건조함과 의문스러움으로 번역해 낸다.
개인적으로 거의 모든 이미지가 실사 촬영으로 구성된 <간니발>은 현실의 모방이라는 층위에 있어서라면 원작 만화보다 훨씬 우위에 있음에도, 주인공의 감정 표출에 있어 인색한 탓인지 리얼리티적 드라마의 강도가 무척 낮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 점에서 앞선 가타야마 신조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점을 넘어, 작품 체험에 있어 모종의 핵심마저 친절히 제공해주는 것 같다. 우리는 야기라 유야의 얼굴이라는 원작과의 차이로 인해, 다이고에게 이입할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차라리 오프닝에 등장하자마자 최후를 맞아 별 서사도 주어지지 않는 카노 순경의 광기에 더 공감이 될 정도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원작이 1인칭 시점이라면, 실사판은 3인칭에 가깝다. 극중 인물들의 얼굴과 신체 부위, 사물 등을 스캔하는 오프닝 크레디트의 콘셉트 이미지가 적절히 요약하듯, 거리를 두고 그의 행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실은 바라본다기보다, 구경한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비유컨대 나는 똑같은 이야기를 원작 만화를 통해 들었지만, 실사판을 통해서는 보았다. 서사라는 추상적 실재보다 그를 견인하는 이미지의 자극이 훨씬 강하게 다가왔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주목할 장면은 에피소드 2의 후반부다. 카노 순경의 행방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다이고는 고토 가문의 저택을 방문해 그들과 한바탕 격투를 벌인다. 오프닝에서 사용된 롱테이크와 무대적 시점에 더해, 360도로 회전하는 지미짚 카메라의 자유로운 움직임은 여기에서 빛을 발한다. 게다가 고토 측 인물들이 가문의 의식을 치르고 돌아와 다이고와 대치한다는 서사적 설정은 이들의 백색 의복과 짙푸른 다이고의 경찰 제복이라는 대립 구도를 시각적으로 강조하는데, 그 광경이 거의 운동회 청백전을 연상케 할 정도다. 이 장면은 흥미진진한 액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흔한 말로 ‘영화적’인 감각으로 충만해 우리의 이목을 사로잡기 충분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전체적인 그림이 주는 분위기보다 집중하게 되는 것은 다이고의 행동과 표정이다. 서둘러 말하면 그가 폭력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격투 장면의 한 부분을 느낀 대로 묘사해보겠다. 다이고는 고토 일당 하나를 붙잡고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충분히 혼내준 것 같은데, 붉은 피로 얼굴이 피떡이 되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다이고의 주먹질은 멈출 생각을 않는다. 심지어 후방에서 공격을 받음에도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구타를 이어간다. 그나마 다이고를 따라오며 감상하던 이들도 여기에서는 물러나게 될 정도다. 다이고는 정말 진실과 정의를 찾으려는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일까? 수사를 이어가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휴머니즘적 성정이나 직업 윤리적 엄격함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집착적인 도파민 중독에 가까워 보인다. 고토 가문과의 크고 작은 다툼을 벌이며 갈등이 심화되는 대목에 이르자, 아내 유키도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당신, 요즘 유난히 생기가 넘치더라.”
그런데 어쩌면 점점 생기가 넘치는 건 텍스트 내부의 다이고 뿐만 아니라, 그 바깥에서 다이고의 폭력 행위를 보는 우리, 혹은 그를 설계하는 연출자 가타야마 신조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간니발> 시즌 1의 중후반부는 다소 전개에 있어 빠르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무엇보다 다이고의 몇몇 조력자들이 특별한 관계없이 나열되듯 출현하고 빠지며 다소 기능적인 역할만 수행하기기 때문이다. 이는 만듦새에 있어 단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특징이기도 하다. 이들이 서사의 진행을 가속하는 덕분에 (?) 우리는 충격적인 진실에 근접하면서도, 그 진실을 실어나르는 충격적인 이미지와도 금방 만나기 때문이다.
그중 한 가지를 언급하자면, 어린 시절 쿠게 마을에서 빠져나온 생존자 테라야마 쿄스케의 반쯤 뜯어먹힌 얼굴이다. 이것은 테라야마의 위성 전화를 받은 다이고와 그의 첫만남에서 공개된다. 그의 훼손된 얼굴은 고토 가문의 식인 행위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물이라는 점에서 서사적 흥미를 마련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솔직하다면 그러한 이야기적 기능보다는 떨어져 나간 코와 한 쪽 눈, 쭉 찢어진 볼이라는 외연적 충격이 더욱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다는듯 그의 얼굴이 공개되는 순간, 에피소드4는 막을 내린다. 테라야마의 훼손된 얼굴은 원작 만화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요소이지만, 미묘하게 조정된 차이는 그것을 단순한 충격요법 이상의 층위로 옮겨놓는다. 우선 공간적 배경이 다르다. 깊은 숲속의 벼랑이라는 원작과 다르게, 여기에는 다이고와 테라야마 사이에 스크린을 닮은 대형의 유리벽이 배치되어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매개적 구도로 환경이 조정되어 있다. 테라야마의 은신처 정도로 추측되는 이곳에는 생활감을 주는 세간 살림이 없으며, 원작처럼 녹음이 우거진 나무와 풀이 주는 자연의 감각 역시 부재하기에, 현장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관찰을 위한 실험실처럼 보인다. 심지어 테라야마의 끔찍한 얼굴이 공개되는 쇼트는 마치 독사진을 찍는 사진관의 카메라를 연상케 할 정도로 대상에 집중하기 좋고, 이곳은 특정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場所)보다는 텅 빈 공간(空間)의 느낌을 강하게 드러낸다. 개인적인 인상을 더하자면, 그의 흉터를 표현하는 컴퓨터그래픽은 사진적 이미지에 기반한 다른 실사 이미지들과는 이질적인 느낌을 주기에 훨씬 제 자신을 부각한다. 그의 얼굴을 본 다이고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런데 왜 하필 얼굴인가. 비교적 오동통한 (?) 허벅지나 뱃살을 먼저 물어뜯을 수도 있었던 것 아닌가. 인간의 살 중에서 유독 얼굴이 맛있기라도 하다는 것인가. 작중에서 그들이 굳이 얼굴을 뜯어먹힌 동기는 제시되지 않으니 알 길이 없지만, 그러한 내적 맥락보다는 해석적 층위로 우리를 옮겨둔다는 점이 중요할 것이다. 일찍이 영화 이론가 벨라 발라즈가 클로즈업을 찬양하며 덧붙인 대로, 얼굴은 “객관적인 법규에 지배되지 않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언어보다도 주관적인 객체이기 때문이다. 그의 분석적 통찰에 빚지지 않더라도,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에게 공포를 느낀다는 도플갱어 신화에서부터 연예인 닮은꼴이라는 일상의 소소한 재미에 이르기까지, 누군가의 얼굴은 신체의 그 어느 부위보다도 고유함을 띠기에 곧 그 사람의 실존을 규명한다는 사회적 합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2024년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을 더해보자면, 최근 불거진 AI 딥페이크 성범죄에 대한 충격 역시 이 사고방식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을 테다.
야기라 유야의 무표정, 테라야마의 뜯긴 얼굴, 친절한 환대에 동반하는 쿠게 마을 주민들의 환한 웃음, 그리고 그 이면에서 이루어지는 그들의 끔찍한 행각들까지 …… 어쩌면 얼굴이라는 요소는 <간니발>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일본에 대한 사회적 가치관으로 그 맥락을 연장한다. 일본에는 타인과의 생활에 있어 자신의 본심을 숨기며 겉모습을 달리한다는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라는 개념이 있다. 여기에서 이 기원에 대해 파헤치는 것은 어색한 일이니 접어두고, 그보다는 <간니발>이 이것을 매우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 집중하고 싶다. 다이고 가족이 쿠게 마을로 입성하는 극의 초반부, 쿠게 마을의 분리된 외형을 강조하는 조감 쇼트에서 섬 나라 일본의 지형을 떠올린 것은 나뿐일까? 마치 이 작품이 다른 어느 나라도 아닌 일본의 작품이라고 선언하는 듯한 과시적 조감 쇼트가 일으킨 불안은 이내 이미지적 차원에서 표리부동한 인물들의 얼굴을, 서사적 차원에서 고토 가문 내의 독특한 체계와 제의 등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며, 셀프 오리엔탈리즘적 매력을 한껏 드러낸다.
물론 과장일 수 있겠다. 그럼에도 일본 작품이 이르게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로, 가깝게는 <하나-비>와 <러브레터>를 통과하며 소위 ‘공백의 미학’으로 국제적 승인을 받고 제 자신의 성격을 구축한 것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는 사실을 쉽사리 지나치기란 어렵다. 요컨대 가타야마 신조의 <간니발>을 보고 있으면, 구슬치기와 달고나라는 자국민의 추억을 살벌한 서바이벌 세트장에 들여와 K콘텐츠의 위상을 전세계적으로 호소한 <오징어 게임>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OTT 플랫폼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다는 점이며, 그 유비쿼터스적 특징에 기반했을 때 창작자는 자국민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호소력이 있어야한다는 일종의 보편성에 대한 강박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간니발>의 성실한 만듦새가 꽤나 자극적이고, 꽤나 일본스럽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창작자가 자신이 놓인 위치를 철저히 의식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불안 섞인 상념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작고한 일본의 영화감독 아오야마 신지의 말을 중얼거리게 된다.
“동시대 영화의 임무는 이미지의 지배로부터 개인을 해방하는 것이다.”
- 아오야마 신지, 「누벨바그 선언, 또는 나는 어떻게 해서 가렐의 사도가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