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계속해야지

Pachinko

사실 <파친코>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2022년 『영화부산』 가을호에 실린 글이다. 그때 나는 이 작품의 특별한 타이틀 시퀀스에 관해 이야기했다. 타이틀 시퀀스에서는 시리즈의 주요 창작자인 코고나다가 <애프터양>에서도 보여준 것과 비슷하게 등장인물이 다 함께 모여 춤을 춘다.“그렇게 그곳은 서로 다른 시간대와 공간이 서로 뒤섞이고 응집되는 장소가 된다. 그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신명 나게 몸을 흔든다. 적대와 증오, 울분과 원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 우리가 목격한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는 것만 같은 느낌, 힘겨운 삶을 헤쳐가는 ‘이방인’들의 춤과 노래로 가득한 세계가 있는 듯한 느낌, ‘풀뿌리’들의 ‘오늘을 사는 삶’이 한데 뭉친 시공간이 가상적으로 어디엔가 존재하는 듯한 느낌. <파친코>는 바로 그 기운을 선사하며 과거를 이야기한다.”

시즌 1과 유사한 타이틀 시퀀스는 시즌 2에도 얼마간 변주되어 이어지고, 여전히 온갖 시공간을 한곳에 뒤섞으며 신명 나는 춤마당을 열어젖힌다. 마치 서로가 얼싸안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평행 우주 속 다른 삶이 있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여전히 시리즈 본편과는 전혀 다른 바이브를 제시하며 시리즈 끝에서야 마주할지 모를 어떤 가능성을 상상해 보게 한다.

시즌 2가 나오기까지 나는 이민진의 원작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다가 얼마 전 겨우 책을 펼쳤다. 예상 밖이었다. 기본적인 서사는 비슷하지만, 이야기의 얼개 및 캐릭터 구성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가장 다른 측면은 전개 순서였다. 소설은 1910년에서 시작하여 1989년까지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시리즈는 주인공 선자의 청장년 시절이 전개되는 시간대와, 선자의 손자 솔로몬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1980년대가 번갈아 가며 진행된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애플TV에서는 초반부부터 활약하는 솔로몬이 언제쯤 등장하나 기다렸는데 2권 중반부가 되어서야 솔로몬이 막 태어나 성장하고 있었다. 원작 소설이 선자로부터 시작하여 뻗어가는 어느 가족의 연대기처럼 진행된다면, TV 시리즈는 선자와 솔로몬을 중심으로 하는 두 개의 상호 교차-평행 멜로드라마와 같았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왜 이 애플TV 시리즈는 원작처럼 선형적인 전개를 택하지 않았는가? 교차 전개는 선형적 전개와 어떤 점에서 다르며 어떤 차이를 만드는 걸까?

위 질문을 위해 애플TV 시리즈 <파친코>가 가지고 있는 힘을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시리즈 <파친코>가 특별한 감흥을 준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힘이 있기 때문일 테고, 그 힘이 평행 서사 구조를 선택한 이유와 연관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에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요소는 여럿일 테지만 나는 무엇보다 젊은 선자 역을 맡은 김민하의 존재를 이야기하고 싶다. 주인공 선자는 배우 김민하와 윤여정의 연기로 생명은 얻는다. 하지만 이 시리즈를 대표하는 얼굴이라고 한다면 단연코 김민하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만한 사람은 나뿐만 아닐 테다. 한참 선배 배우인 윤여정 또한 김민하가 시리즈의 얼굴이라고 생각할 것만 같다. 무진장 예쁜 배우라고는 할 수 없는, 주근깨가 도드라진 김민하의 얼굴은 특별한 대우를 받은 온실 속 화초가 아니라 질기게 제 뿌리를 땅에 박고야 마는 성긴 잡초 같은 느낌을 자아내고, 굳게 입을 다물고 만들어내는 얼굴 근육 움직임은 고난 속에서도 강직하게 버티며 살아가는 강인하고 단단한 성격을 형성한다. 그러면서도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겁먹은 표정까지 드러내는 모습은 비범하게 보이는 선자를 다시금 평범한 인간으로 자리하게한다.

이처럼 특별한 곳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길바닥 혹은 시장 바닥 어디에 가서도 볼 수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그 누구보다 굳세고 야무져서 함부로 대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힘을 만드는 것이 바로 김민하의 얼굴이다. 윤여정도 그 명성만큼 좋은 연기를 보여주지만, 시리즈 내적 세계에 자리한 모습만으로 존재감을 발휘하는 쪽은 단연코 김민하다. 이는 김민하라는 배우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힘이면서도, 이 시리즈가 김민하에게 그런 힘을 낼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애플TV 시리즈 <파친코>는 김민하의 선자를 위한, 그녀에 의한, 그녀의 ‘판’이다.

평행 서사는 바로 이 ‘판’을 위한 포석이다. 만약 원작 소설처럼 서사가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면 우리는 김 민하를 시리즈 중반부에, 아니 어쩌면 초반부인 시즌 1에서 벌써 떠나보냈어야 했을 테다. 1995년생으로서 2024년 현재 20대 후반인 김민하 배우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은 극 중에서 40대 정도가 최대한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리 분장으로 노인처럼 보이게 한다고 해도 그 어색함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별다른 어색함 없이 연기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40대 초반 정도의 설정일 텐데, 그 이후의 나이대를 연기하면서 김민하가 나머지 시즌을 끌어가는 일은 순 억지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니 김민하의 얼굴을 시리즈 끝까지 데려 갈 묘수가 필요하다. 과도한 분장으로 원래 얼굴이 가진 매력을 가리지 않을 좋은 방책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평행 구조는 김민하가 계속해서 시즌을 끌어가도록 허락하는 조건이 된다. 80년대 서사의 핵심 줄기를 맡고있는 솔로몬의 이야기와 그 곁에서 동행하는 노년의 선자 이야기가 50,60년대 청장년 선자의 이야기와 교차하면서 김민하의 얼굴이 시리즈 초반에 소진되어 사라지지 않도록 시간을 벌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스럽기도 하다. 이 시리즈의 주요 매력이 김민하의 얼굴에 있다는 점이 폭넓게 동의받을 수 있는 평가이고 평행 구조가 그 얼굴을 시리즈 막바지까지 유지시킨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해도, 이 시리즈의 창작자들이 그런 설정을 오로지 ‘김민하를 위해’ 만든 것은 아닐테니까(서사의 또 다른 축인 솔로몬도 잊지 말라). <파친코>가 애플TV에 공개되기 전까지 김민하는 그저 무명 배우에 불과했다. 그런 배우를 위해 거대 예산의 기획물에서 평행 서사 구조를 선택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문제는 영상 매체과 활자 매체의 근본적 차이로 돌아간다. 영상 매체는 캐릭터라는 가상적 존재와 배우라는 실제적 존재를 모두 현존시킬 수 있다. 우리는 <파친코>의 김민하를 통해 선자를 보는 동시에 배우 김민하 자체를 본다. 이와 달리 소설은 배우 없이 오로지 캐릭터에게 동화되도록 한다. 캐릭터의 물리적 육체는 오로지 독자의 관념에 있을 뿐이라 캐릭터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독자가 딱히 놀랄 일도 없다. 하지만 배우의 실제적 육체를 가상적 존재와 겹쳐 놓을 수 있는 영상 매체는 육체성에 의존하여 의미를 형성한다. 실체와 가상의 겹칩은 보는 사람이 캐릭터의 생명력을 즉각적이면서도 생생하게 경험하게 하여 캐릭터와 더불어 배우에게도 동일시를 느끼게 한다. 이것은 영상 매체의 축복 같은 위력인 동시에 치명적 약점이다. 만약 캐릭터와 겹쳐진 배우가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된다면? 상상만 해도 난감하다. 우리는 그동안 감정을 투사하고 공감하며 자아까지 잠시 의탁했던 육체적 존재의 홀연한 사라짐 앞에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이 당혹스러움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실패는 우리나라 TV 연속극 <야인시대>가 증명해 주었다).

물론 아역 배우에서 청장년 배우로, 청장년 배우에서 노년 배우로 넘어가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는 방식은 보편적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 대체로 그런 변화는 이야기 초반부에 일어나거나 후반부에 발생한다. 프롤로그나 에필로그에 가까운 부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서사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뒤 착륙의 낌새가 날 때 까지, 관객의 감정을 붙잡은 캐릭터와 배우는 십중팔구 관객과 동행한다. 이처럼 배우 김민하의 연기력이나 존재감을 차치하고서라도 평행 서사 구조는 관객이 계속해서 마음 줄 수 있는 물질적 대상을 끝까지 유지할 묘 책이 된다.달리 말해, <파친코>의 창작자들은 그저 유명한 소설을 각색하여 영상화하는 것을 넘어, 영상 매체의 특수성이 가져다줄 난점과 위력에 대한 고민의 결과를 내어놓은 것이다.

그와 같은 고민은 또 다른 표현 방식을 만들기도 한다. 태평양 전쟁 중인 상황에서 일본 패전 이후로 넘어가는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그날’을 거쳐야 한다. ‘리틀보이’의 낙하 이후 대지가 시커먼 버섯구름을 토해낸 ‘그날’, 수십만의 생명이 한순간에 사라진 바로 ‘그날’, 바로 이 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모른척하거나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도 없는 그 사건, 엄청난 스펙터클로 보는 이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을 수도 있는 그 사건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이민진의 원작은 꽤 간단하게 그날을 처리한다. “한수조차 마지막 폭격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벙커 덕분에 요셉은 최악의 상황을 피했다. 그렇지만 마침내 거리로 기어 나왔을 때 근처에서 불타고 있던 목재 창고의 벽이 요셉의 오른쪽으로 무너지면서 붉고 푸른 화염이 그를 집어 삼켰다."(『파친코』, 인플루엔셜, 1권, 339쪽) 그 날에 대한 설명은 이것이 전부다. 아마도 이민진은 최대한 해당 사건을 극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상처를 무시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한 것 같다. 문제는 소설과 달리 영상은 “붉고 푸른 화염"을 시각화하지 않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시각화 없이 넘어가기엔 그 날의 사건은 너무도 중대하다. 하지만 그 화염을 시각화하려고 마음 먹게 되면 스펙터클이 드라마를 일순간 삼켜버린다. 전쟁의 참화가 그저 ‘장관(壯觀)‘의 구경거리가 된다. 그래서 시리즈의 창작자들은 ‘믿음’과 ‘운명’을 극화하는 전략을 취한다.

‘그날’이 서서히 다가오는 시점에, 드라마의 분위기가 일순간 변한다. 그동안 이삭의 죽음 이후 시장바닥과 논바닥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선자와 그 가족들을 보여주는 데 전념했던 이 시리즈의 배경이 갑작스레 선자의 시숙이자 경희의 남편인 요셉이 일하는 나가사키 공장으로 옮겨 간다. 화면도 4:3 비율에다가 흑백으로 바뀐다. 거기서 이 시리즈는 화면 전체를 덮는 커다란 자막을 활용하여 ‘그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한다. 너무도 유명한 날이기에 1945년 8월 어느 시점이란 사실을 모를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여 서스펜스 창출에 나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끼어든다. 공장 내에 민족적 반일 감정을 가진 조선인 청년이 있고, 요셉이 그 청년과 가까워진다. 하지만 요셉은 일본인에게 대항 하려는 그 청년에게 동조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청년이 일본 고위직을 살상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요셉은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점차 ‘그날’이 다가온다. 서사 바깥 우리에게는 버섯구름이 피어나는 날이면서, 서사 안 청년에게는 무력시위를 감행하기로 한 날이 임박한다. 바로 그날, 요셉은 청년의 앞을 가로막으며 고위 관리 대신 날카로운 금속을 제 몸에 받아내고, 마침내, “붉고 푸른 화염"에 휩싸이듯 화면이 갑자기 새하얗게 타오른다. 이렇게 불타오른 이후, 요셉의 얼굴에 새겨진 물리적 흔적이 그날의 참화를 망각하지 않고 증언한다.

위와 같은 처리 방식은 그저 스펙터클의 위험성을 피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가 더 주목할 부분은 그것이 시리즈의 전체 테마 및 주제 의식과 연동된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 정확한 날짜는 몰라도 우리 모두 일본의 패전 직전에 ‘그날’이 당도했다는 사실을 안다. 특히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면 더더욱 모를 수가 없다. 이 시리즈는 마치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버젓이 ‘8월 1일’부터 ‘8월 9일’까지 커다란 숫자로 날짜를 셈하고, 시계가 째깍거리는 음향 효과까지 덧붙이다. 즉,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는 사건’이라는, ‘이미 정해진 운명’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간다는 점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행 서사 구조 또한 ‘정해진 운명’을 둘러싼 인물들과 공명한다. 우리는 1980년대 서사가 1950년대 서사의 결과라는 점을 안다. 전부 다 알 순 없어도, 1950년대의 선자와 그 가족들이 전혀 알 수 없는 정보를 부분적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운명으로 1950년대 선자는 향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선자의 첫째 아들 노아의 행방과 같이 80년대 서사가 남기는 공백, 혹은 결과가 밝히지 않은 공백으로서의 원인을 50년대 서사를 통해 깨달으면서 “어쩌다 저런 운명이 되었나"하는 물음이 발생하고 해결되는 과정을 겪는다. 이처럼 <파친코>는 ‘운명’과 같이 변경하기 힘든 어떤 틀(어쩌면 정체성, 국적, 가족과같은 것)을 서사 내부에 세워두고 그 운명들 주위로 진동하는 인물들을 제시한다.

시리즈 <파친코>에 함축된 주제 의식은 원작 소설의 문장으로 대변될 수 있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1권, 15) “다이얼을 돌려서 조정할 수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로 생긴 불확실성 또한 기대한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모자수는 고정돼 보이지만 무작위성과 희망의 여지가 남아 있는 파친코를 왜 손님들이 계속 찾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2권, 80) “야, 삶은 늘 고달프지만, 그래도 게임은 계속해야지.” (2권, 210) 고달픈 삶 속에서도 강인한 힘으로 게임을 계속하는 모습은 <파친코> 시즌 1 마지막에서 선자가 “김치 사세요! 신선한 김치!“라고 힘차게 외치는 얼굴에서, 불확실성과 희망의 여지는 시즌 2 마지막 노아의 웃는 얼굴과 “파친코"라며 빛나는 간판에서 표상된다.

하지만 정해진 길만 따라가는 것은 지루한 일이다.그와 같은 표상과 진동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믿음’이란 것이 불안한 균열과 불확실성을 감지하게 한다. 80년대의 노년 선자는 솔로몬을 두고 “착한 아이"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지켜보는 것은 50년대의 한수와 같이 권모술수의 미혹에 빠져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믿는 솔로몬의 불순한 욕망이다. 정말 솔로몬은 착한 아이인가? 혹시 그것은 선자가 믿고자 하는 믿음, 혹은 선자가 솔로몬에게 부여하고 하는 통제 요인으로서의 운명은 아닌가? ‘착한 아이’라는 운명은 솔로몬에게 다시 돌아올 것인가, 아니면 솔로몬은 (어쩌면 노아처럼) 선자의 의도에서 벗어난 과녁이 될 뿐일까? 이제 우리는 시즌 3을 통해 이 가혹한 운명이 어떤 게임으로 마무리가 될지 지켜볼 것이다.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