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떤 이야기를 기대하는지를 고민하는 일은, 서사 창작자로서 숨쉬는 것처럼 당연하고 습관적인 태도다. 그 생각에 사로 잡히다보면 내가 마치 사당은커녕, 이름조차 가지지 못한 종교의 유일한 사제가 된 것 같다. 종교에 대한 비유를 든 것은, 창작을 대하는 진지한 나의 태도를 생색내기 위함은 전혀 아니다. 나는 그냥 내 삶을 유지하는데 그런 믿음이 필요하게 돼버렸다. 그 믿음이란 곧 ‘나는 좋은 이야기를 알아볼 수 있고, 그 능력으로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다’는, 어딘가 오만한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마저도 가끔은 너무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아주 성공하거나 아주 실패한 창작자가 왜 쉽게 괴물이 되는지도 조금 이해가 된다. 극단적으로 강한 믿음이나, 외부에 인정받지 못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타인에게 해로운 존재가 되기 쉽다. 다행히도 나는 쉽게 감탄하고 믿는 유형의 인간이라, 양질의 대중 서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위안을 받는다. 그리고 SF (이 글에서는 ‘과학소설’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하겠다)에는 그런 이야기가 아주 많다.
SF는 기본적으로 과학적인 태도로 쓰여진 이야기다. 따라서 사고 실험을 몹시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SF가 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일시적으로 낯설게 보게 되고, 작가가 의도적으로 교란한 세계 자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인물은 사고 실험을 전개하는 스피커 정도의 역할을 맡는다. 따라서 SF의 오랜 독자들 중에서는 이야기 속 세계가 구체적이기만 하다면, 독자가 감정 이입이 가능한 인물이 꼭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부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어째서 이런 인물이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이지?’ 의문을 일으킬만한, 인물의 불필요해 보이는 디테일들이, 오히려 SF 속 인물을 살아있는 것처럼 만들기도 한다. 세계가 선명하게 드러날수록, 세계의 모습이 구체적일수록 사고 실험의 스피커에 불과했던 인물이 자동적으로 생동감을 얻는 것이다.
반면 드라마, 영화와 같은 영상 대중 서사의 관객은 조금 다르다. 아무리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세계를 그리고 있어도, 실사 배우가 나와 대사를 읊는 이상, 관객은 이입이 가능한 인간을 보고 싶어 한다. 동시에 이 가상의 인간은 어느 정도 입체적이어야 하지만, 현실의 인간만큼 불가해하고 모호하며 복잡해서는 안 된다. 많은 자본이 투자된 작품일수록 인물의 동기란 선명하고 보편적이고 간단해야 한다. 세상에서 영화 투자사와 제작사만큼 겁이 많은 존재는 없다. 그들은 막대한 예산이 한 줌의 관객이 좋아할만한 작품에 낭비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안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용기는 대부분 엉뚱한 곳에 발휘된다.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초래하는 범작이 계속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면, 겁이 많다는 게 꼭 신중함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 작품에서 관객이 이입할 수 있으면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묘사의 경계란 아주 얇다고 할 수 있다. 연출, 작가, 배우들은 그 얇은 경계 안에서 관객이 인물을 어떻게든 살아있게 느끼게끔 뭔가를 스리슬쩍 끼워넣는다. 이건 일종의 직업윤리다.
그런 점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삼체>는 원작이 가진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으면서 SF의 독자들과 드라마의 관객의 기대 모두를 일정 수준 만족시키려는 노력이 보인다. 주요 인물을 서사 속 기능에 따라 통폐합했고, 원작에서는 서로 관계가 없는 인물들에 관계를 부여한 점이 우선 눈에 띈다. 물론 주요 인물들이 모두 옥스포드 동창이라는 각색은 다소 간편해 보이긴 해도, 통폐합된 원작의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새로 재구성함으로써, 각각의 인물들에 알기 쉬운 감정적 동기를 부여했다. 이는 줄거리 분량을 효율적으로 간소화할수 있다는 점에서도 꽤나 효과적인 각색 전략이다.
게다가 원작이 겨냥한 SF적 경이감도 꽤나 잘 구현한 편이다. 과학자들의 장광설을 2분이 넘는 분량의 대사로 듣고 있을 만큼 인내심이 있는 관객은 많지 않다. 하지만 ‘지자’의 차원펼침을 설명하는 부분이나, 3천만명이 2진법 신호를 주고받는 ‘인간 컴퓨터’ 장면은 원작이 의도한 정보의 손실을 줄이면서 시각적으로 만족감을 안겨준다.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창작자의 선택이라면, 보여주지 않는 것도 선택이다. 외계인의 침략을 다룬 이야기에서 한 시즌이 끝날 때까지도 외계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건 무척 대담한 결정이다. 이건 이 이야기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판단이다.
앞서 SF와 드라마 <삼체>의 관객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기대를 드라마가 얼마나 충족시키는지 이야기했다면, 이제 <삼체>라는 이야기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이야기할 차례다.
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연인 사이인 한국인 A와 B가 있다. A는 평소 편안한 성격으로 B에게 건강한 안정감과 애정과 거리감을 제공해준다. 둘은 오랜 기간 연인 관계였으며, 두 사람 모두 이 관계가 앞으로도 변화가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반면 그 둘과 인면식이 없고, 만날 일이 없는 독일인 X도 있다. X는 A와 B와 같은 관계를 항상 꿈꿔 왔으나, 한번도 그런 안정감은 경험해 본 적 없다. A 같은 사람이 주변에 없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 명이나 있었다. 하지만 세 명이나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 세 명은 서로를 의식하고 의심하다가 X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너무 차갑게 혹은 열렬하게 굴었다. 결과적으로 그 세 명과의 관계는 늘 파멸적인 결말을 맞았고, 이런 방식은 계속 반복됐다. 때문에 X는 앞으로도, 어쩌면 영원히 안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확신이 든다. 그러다가 X는 우연히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관계를 실현한 A와 B의 존재를 알게 된다. 심지어 A가 (B와의 관계와는 무관하게) 오랜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X는 B를 죽이고 A를 뺏고자 마음먹고 천천히 한국으로의 도보 여행을 시작한다.
<삼체> 속 상황을 미시적으로 비유하자면 위와 같다. (그러니까 A는 태양이고, B는 지구인이며, X는 세 개의 태양이 초래하는 난세기로 고통받는 삼체인인 셈이다.) SF에는 보통 ‘최소 전제’가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최소 전제’를 공격하며, 이야기의 개연성이나 과학적 정합성을 지적하는 게 SF를 제대로 즐기는 태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난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백투더퓨처>를 다 보고 나서 ‘시간 여행으로 과거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말고는 할 말이 없는 사람과는 나도 그다지 나눌 말이 없다. <삼체> 속 이야기의 출발이 되는 ‘삼체문제’란, 두 물체 간의 중력 궤도는 예측하기 쉬우나, 셋 이상의 물체 간의 중력 궤도는 규명하기 어렵다는, 물리학의 오랜 난제다. 굳이 위와 같은 인간중심적이고 유성애 중심적인 가정을 들지 않더라도, ‘둘일 때는 쉽고, 셋 이상일 때는 어렵다’는 규칙은, 관계와 믿음에 대한 진리를 담고 있는 비유처럼 들린다. 그런 점에서 <삼체>의 서사적 토대를 구성하는 최소 전제란 바로 ‘믿음’이다.
믿음을 동력으로 삼는 이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의심을 겹겹이 쌓으면서 나아간다. ‘예원제’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국가적 폭력과 개인적 배신으로 점철된 청년기를 보낸다. 때문에 그녀는 결국 인류에 대한 거대한 불신을 우주로 쏘아 보내 외계 문명 ‘삼체인’에게 인류를 정복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삼체인은 종족의 미래를 걸고 새 터전인 지구를 향해 함대 선단을 띄운다. 정복과 이민을 동시에 이루려는 이 외계인들이 어찌나 절박한지, 400년을 예상하는 긴 여정 동안에도 부지런하게 미래를 대비한다. 그들은 인류 문명의 빠른 발전 속도를 두려워해 인류의 기초물리학 연구를 방해하고 인류 전체를 속속들이 감시할 수 있는 양성자 크기의 슈퍼컴퓨터 ‘지자’를 지구로 보낸다. 몇 세기나 앞선 기술력을 보유한 외계 문명이더라도 400년 후 문명 간 전쟁의 승부는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삼체인들이 인간을 두려워하는 건 문명 발전 속도 때문만은 아니다. 인류와 달리 삼체인은 뇌파로 직접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거나 의사를 숨긴다는 발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거짓말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삼체인은 지구에 있는 자신의 추종자들조차도 두려워한다. (거짓말을 못하고 겁이 많은 외계인을 귀엽지 않게 묘사하는것도 어렵다.)
삼체인들이 인류에게 두려움을 품고 있다고 한들 인류는 전혀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기초 물리학을 믿을 수 없게 된 과학자들은 절망에 빠져 자살을 택한다. 한편, 인류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UN은 침략에 대비하는 원대한 계획을 자기 머릿 속으로만 품어야 하는 4인의 ‘면벽자’를 지정한다. 하지만 무한한 권한을 지닌 ‘면벽자’가 내리는 모든 선택이 인류를 구원하는 계획의 일부라는 보장이나, 거대한 부담감에 짓눌려 ‘면벽자’가 자살하지 않는다는 보장 또한 없다.
‘면벽 프로젝트’와 별개로, 삼체인 방위를 맡은 범지구적 조직인 PDC는 ‘윌’의 뇌를 실은 탐사정을 삼체 함대에 날려 보내 인류의 스파이 노릇을 시킬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역시 이 또한 아주 희박한 확률에 기댄 계획일 뿐이다. 탐사정이 적의 함대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을지, 도착한다고 해도 삼체 함대가 탐사정을 포획해서 뇌뿐인 ‘윌’을 되살릴 놀라운 생명 공학 기술이 있을지,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할지, 되살려진 윌이 과연 인류를 위해 복무할지, 그럴 의지가 있다고 해도 그게 가능할 상황일지, 모든 단계마다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이야기가 믿음이라는 가치에 얼마나 큰 무게를 두고 있는지는 원작 소설에도 잘 드러나 있다. 원작에서는 우주방위군은 군 내부에 팽배한 패배주의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으로, 승리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 간부를 동면시켜 미래 전쟁에 대비하거나, 뇌 인지체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여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 넣는 방안까지도 등장한다. 하지만 냉철한 이성으로 확정적인 패배를 아는 것과 패배주의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확고한 믿음은 과연 어떤 상황이든 구원할 수 있을까?
<삼체> 서사의 최소 전제가 믿음이라고 단언하는 또 다른 이유는, 위에 나열한 것들 말고도 있다. 이야기 속 인류 사회는 외계인이 다가온다는 상황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쉽게 믿고 있으며 인류 개개인의 능력에 놀랍도록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현실에서 명백한 사실조차도 얼마나 쉽게 왜곡이 되는지 실제 정부나 관료들이 얼마나 현실과 괴리된 인식을 지녔는지, 그리고 현실의 체제가 얼마나 쉽게 인간을 불신하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면벽 프로젝트’ 같은 건 그야말로 의심하는 법을 모르는 외계 종족이나 실천할 수 있는 계획이다.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삼체>의 서사가 허무맹랑하다거나 설득력이 약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작중 세계가 무척 탄력적인 건, 앞서 언급했듯 <삼체>의 최소 전제가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건 이 이야기가 인간 개인의 마음과 지성에 무한한 기대를 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 비약해보자면 사실 모든 SF와 모든 이야기의 최소 전제 또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원작자 ‘류츠신’은 ‘훌륭한 과학 소설은 정신 나간 상상을 뉴스 보도처럼 진실되게 쓰는 것’이라 말한 바 있다. 나는 ‘류츠신’뿐 아니라 모든 이야기 매체의 창작자들이 가능성과 믿음의 신봉자들이라 확신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예원제’가 답하지 말라는 삼체인의 통신에 답한 일 또한, 인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내린 결정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에게는 인류에 대해 실망할 권리가 차고 넘치게 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삼체인에게 답한 것이 그저 인간에 대한 체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는 기표 이상의 의미가 있고, 언어 자체만을 숭상하는 자에겐 늙은 홍위병의 말로가 기다리고 있다. ‘인류에게는 더 이상 자구력이 없다’는 예원제의 말은, 판단이기 보다는 질문이다. 응답을 바라는 모든 마음 뒤에는 어떤 애처로운 갈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인간이 나아질 수 있을지 답을 바랐을 뿐이다. 그녀는 인간이 이렇게 하찮고 어리석을 리가 없다고 믿고 싶었고, 삼체인은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적어도 현실에서는 우리를 침략할 외계인은 없고 (적어도 그러길 빈다), 우리 태양계에는 세 개의 항성이 존재하지도 않지만, 2024년을 사는 한국인으로서 나는 삼체인이 난세기를 대하는 감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 긴 여름이 지나고 갑자기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음에도 나는 무작정 반가워 할 수 없다. 이번 여름은 끔찍하게 길고 더웠고 앞으로 더 길고 더워질 것이다. 지구는 인간을 더 이상 우리를 환대하지 않고 이런 세계를 초래한 건 우리 자신이다. 현대인은 서로 과잉 연결되어 서로의 가장 경멸적인 부분을 실시간으로 경쟁하듯 드러낸다. 뉴스에서 어떤 정치인을 보고, 그런 정치인을 그 자리에 세운 게 결국 우리라는 걸 떠올리고, 각종 웹 플랫폼의 댓글창을 열면, 우린 ‘예원제’가 품었던 실망을 매일 마주하고 같은 의문을 품는다. 무엇보다 현실의 우리는 <삼체> 속 인물들처럼 발군의 확신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자랑스럽게 자칭했던 우리지만, 마음을 기댈 공동체는 사라지고 있고, 개인은 파편화되어 모두가 각자 다른 현실 감각으로 고립되어 생존하는 신세다. <삼체>의 원작에서는 ‘암흑의 숲 이론’이라는 가상의 가설이 언급된다. 외계 문명은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우주는 사실 사냥꾼(문명)이 가득찬 암흑의 숲이며, 누군가 불을 피워 위치가 노출된다면 사냥꾼은 그곳에다가 총을 쏘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무시무시한 가설이다. 모든 문명을 상호 적대적인 존재로 가정하듯, 또 삼체인이 인간 정신 내면에 어떤 악의를 숨겼는지 두려워하듯, 현대를 사는 우린 이미 미지의 타인을 암흑의 숲에 있는 사냥꾼처럼 대하고 있다.
인간은 더 나아질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의문은 실제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와는 관련이 없다. 후반부 늙은 예원제는 ‘농담없이는 우린 살아남지 못한다’고 말한다. 농담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생각해보면 난 이 말이 예원제가 삼체인을 초대했듯이, 관객을 믿음의 세계로 은근히 초대하는 것처럼 들렸다. 농담은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농담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은근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아무리 못된 위악적인 농담도 전혀 악의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고, 오히려 그래서 더욱 웃길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자주 즐겨하는 농담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농담이다. 이런 식이다. 누군가 본인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 때 나는 나의 아버지가 죽기 전 병환으로 어떻게 고통스러워했는지를 뜬금없이 묘사한다. 이 농담은 보통 발화자인 나만 웃겨 하는 농담이지만, 꼭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한 친구가 있는데, 우연하게도 그 친구의 어머니와 나의 아버지는 같은 해에 돌아가셨다. 이런 맥락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애미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농담하며 웃을 수 있다. 이런 맥락은 무척 고유하며 고유한 것은 대체로 아름답다.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만이 우리를 나아지게 한다. 자기계발서에나 실릴 것 같은 무책임한 말을이지만 이건 어느 정도 진실이다. 예전에 ‘농담은 어떤 믿음 위에서만 제대로 작동한다’는 식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어쩌면 농담의 효용을 과대평가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붙인 말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변치 않는 생각은 있다. 농담은 어떤 가능성이며 인간은 가능성의 존재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인류애가 사라진다’느니,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 같은 말은 되도록 그대로 믿지 않으려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거창한 말만을 너무 믿고 숭상하다간 우린 저열해지고 뭉뚱그려지고 말 것이다. 우린 말보다 대단한 존재다. ‘윌’이 죽음을 앞두고 우주를 표류하는 뇌가 되는 ‘계단 프로젝트’에 동의한 건, 거창한 인류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청’이라는 개별의 인간을 위해서였다. 이건 내가 ‘인간’과 ‘믿음’이란 말을 서로 가까이 쓸 때 지향하는 마음가짐과도 비슷하다. 인간을 추상적인 역사적인 개념으로서 뭉뚱그려서 바라본다면 역시 사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고유한 개체로서의 인간은 비교적 사랑하기 쉽다. 다시 말하지만 고유한 것은 대체로 아름답다.
박애주의자처럼 보이는 말을 늘어놓았어도 사실 우린 앞으로도 자신에게 자주 실망할 것이다. 그건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삼체>의 원작자 ‘류츠신’은 소수 민족을 탄압하는 중국 정부를 옹호하는 듯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인류의 미래에 대해 온갖 과학적, 사회적 상상력이 동원된 대작을 쓴 작가일지도, 어떤 상상력은 부족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교훈적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서로가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아득바득 유지하는 선택지 밖에는 없다. 그런 믿음 없이는 400년은 커녕 10년도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막막해보이겠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애초에 편향된 인지를 갖도록 진화했다. 그럼 우리는 그저 늘 하던대로 사실을 취사 선택해 믿음을 유지하면 된다. ‘토마스 웨이드’는 PDC의 수장으로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전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건 곧 ‘믿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 그런 대쪽같은 태도로 살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태도로 살아야 한다면, 나의 수단은 이야기와 농담일 것이다. 이야기와 농담은 가능성이며 열망이다. 그건 어떤 상황에도 우리가 죽지 않고 대신 웃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며, 인간에게서 100가지의 실망스럽고 진부한 면에 실망하기보다, 한 두가지의 고유하고 복잡하며 불가해한 면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다. 세상이 암흑의 숲이 아니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