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용 영화로 만들어졌다가 모종의 이유 탓에 4부작 OTT 시리즈로 공개된 <폭군>은 박훈정 감독에게 어울리는 옷이 애초부터 영화가 아닌 시리즈물이 아니었을지 싶을 정도의 놀라운 적합성을 보여준다. <폭군>의 이야기나 만듦새가 유별나게 탁 월해서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작품의 서사적 뼈대와 전반적 톤 앤드 매너는 박훈정 감독의 전작인 <신세계> <마녀> <마녀(魔女) Part2. The Other One>(이하 < 마녀2>)나 <낙원의 밤>, <귀공자> 등과 거의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필름 누아르의 양태를 띤 화면 속에 피를 칠갑한 인물들이 나와 SF, 하드보일드, 멜로드라마, 조폭 코미디, 홍콩 누아르 등의 요소를 혼성 모방하는 방식이다.
다만 <폭군>은 박훈정 감독이 그간 지녀온 영화적 야심이 시리즈물의 형태에 편히 안착함을 통해 그의 필모그래피에 전례 없던 호기로움을 만들어낸다. 이는 같은 연출자의 비슷한 이야기일지라도 그것이 어떠한 그릇에 담기냐에 따라 결과물이 뚜렷하게 달라진다는 확신의 방증이 된다. 그리고 이 호기로움의 모양새는 주인공 자경(조윤수)이 끝내 한 몸에 3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결말의 구색과도 비슷하여 더욱이 흥미롭게, 한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기분 좋게 공명하는 경우로 <폭군>을 기억하게 한다.
조화로운 혼성 교배종
아버지에 의해 어릴 적부터 전문 킬러로 자란 자경(조윤수)의 몸엔 오빠의 인격까지 깃들어 있다. 이에 자경은 이중인격에 시달리며 종종 혼잣말하듯 오빠와 싸우곤 한다. 여기에 <폭군>의 후반부는 자경이 폭군 프로그램의 시험체가 되는 설정을 추가하여 그녀의 몸에 총 3개의 인격이 담기도록 만들어 버린다. 원래 폭군 프로그램의 약물을 맞은 시험체는 대개 그 오버파워를 이기지 못하고 신체가 부서지거나 금방 죽어버린다. <스파이더맨> 프랜차이즈에 나오는 베놈의 심비오트처럼, <마녀> 연작의 초인 프로젝트처럼 무척 강한 힘이 무척 강한 부작용을 수반한다. 물론 <마녀> 시리즈의 자윤(김다미)과 소녀(신시아)가 그랬듯 자경 역시 가뿐하게 부작용의 어려움을 넘겨내고 3개의 정체성을 오롯이 한 몸에 지니게 되며 무척 강해진다.
자경이 폭군에 먹혀 폭주하려는 때 국가 요원 출신의 전문 살인청부업자 임상(차승원)이 자경을 총살하려 하는데, 이 순간의 숏은 자경의 시점에서 임상을 바라보는 구도로 나타난다. <폭군>에서 이토록 직접적인 시점 숏은 보기 드문 선택이다. 이를 통해 자경의 시선이 시청자에게 온전히 종속되며 자경이 <폭군>의 화자이자 시점이자 주인공임을 천명한다. 이 주체성 비대의 숏은 자신의 몸체에 시리즈물의 형 식미까지 모두 가지고 싶다는 박훈정 감독의 자아실현적 이미지로도 이해된다. 누아르, 폭군 두 개의 인격을 지니고 있던 자경의 신체에 침입하듯이, 영화와 누아르라는 박훈정식 세계의 두 거대 축에 시리즈라는 형식이 침입하는 과정인 셈이다. 자경과 <폭군>을 박훈정이란 연출자가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조화로운 혼성 교배종으로 만들겠단 함의로 보인다.
한 인물의 정체성이 2개이냐 3개이냐, 이로써 얼마나 강해졌냐를 따지는 일 따위는 어찌 보면 유치한 숫자놀음이나 설정 놀음 같을 수도 있다. 다만 <폭군>을 비롯한 박훈정의 세계에서 숫자 혹은 수치적 설정의 과잉, 여러 장르의 신체적 혼재란 늘 주목해 볼 만한 요소다. 물론 그 주목의 결론은 대개 비판의 근거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마녀2>가 크게 비판받은 이유는 모든 인물의 설정이 무척 강한 반면 그들이 결말에 이르러 만나는 과정의 접점이나 연결감이 너무 희박하단 것이었다. 인물은 튀고 이야기의 끈기는 약하다. 수분 없이 치댄 탓에 분진이 흩어지는 밀가루 반죽처럼, 온전한 빵이 되지 못한 밀가루 덩어리의 냄새를 맡게 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따로 노는 인물들, 갑작스러운 조우들
박훈정 감독이 평소 택해 온 작법은 과잉의 설정과 무수한 캐릭터가 한 무대에 모여 그 힘을 한 번에 폭발시키는 형태다. 다만 그 과정을 애써 한 바구니에 담으려는 교차 플롯 혹은 교차 시퀀스 간의 충돌과 단절감이 영화의 이음매를 제대로 잇지 못하고 전반의 서사에 다분한 무리를 부여해 왔다. 예컨대 <마녀2>엔 미지의 주인공이자 초인적인 힘을 지닌 소녀가 있고, 그를 도와주는 경희(박은빈)의 남매가 있 다. 경희는 아버지가 물려준 농장을 조직 폭력배 용두(진구)로부터 지키려 애쓴다.한편으로 소녀의 신병 확보를 목적으로 특수 요원 조현(채수빈)의 팀이 한국에 들어온다. 또 한편으론 상해에서 온 어린 초인들, 토우 4인방이 경희와 소녀에게 다가온다. 이처럼 이야기의 판은 무척이나 크고 쓸 말(piece)은 더욱더 많다.
그런데 영화는 전쟁의 과정에 필요한 사전 탐색전이나 척후병의 존재 같은 준비 단계도 없이 급히 백병전의 클라이맥스로 뛰어넘어 버린다. 각 진영의 인물들은 완전히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펼치다가 문득 소녀의 존재를 매개 삼아 제주의 경희 집에 모인다. 이런저런 세계관과 설정에 따라 인물들의 이해관계와 서사적 매듭이 느슨하게 묶인다. 그렇게 모든 이들의 물리적인 만남은 후반부 30분간 이어지는 전투 신에서 한 번에, 어떻게 보면 대강 치러진다. <마녀2>의 소녀, 경희, 조 현, 토우 등 각 진영의 이야기는 기실 하나의 맥락이 아니라 별개로 존재하며 각자의 막을 지닌 에피소드에 가까웠다.
<낙원의 밤> 역시 태구(엄태구)와 재연(전여빈) 그리고 양 사장과 마 이사의 이야기를 하나의 영화가 아닌 각각의 에피소드로 따로 상영해도 이야기의 결성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을 정도였다. 빗대자면 수 회짜리 TV 애니메이션을 굳이 극장총집편이란 이름으로 재편집하여 낸 구태의연에 가까웠다. 복수라는 근원적인 비극의 테마에 묶인 인물들이 이리저리 한 자리에 모여 각자의 감정을 분출하는 구조 다.
한 편의 영화는 물리적인 매체적 특성으로 인해 시퀀스 간 물리적 막간을 소거할 수밖에 없고, 제대로 된 에피소드의 형태를 확보할 순 없다. 이로써 <마녀2>나 <낙원의 밤>의 전체는 부품들이 서로를 찌르고 접합되지 않는 결함을 지니게 된다. 영화 관객의 감각이 유리된 이야기의 파편들을 편히 짜맞출 틈이 없단 것이다. 즉 박훈정 감독은 이야기의 플롯을 세밀화하고 혼잡하게 배치하여 그 형식 자체의 재미를 성취하기보단, 이야기의 전체 판을 성실하게 짜고 그것을 최후에 이르러 친절하게 설명하는 전통적 드라마 구조에 치중해 온 것이다. 다만 이 패턴은 점차 고착돼 박훈정의 영화를 동어반복의 구조로 내다 몰며 그 결과물들을 지루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폭군>의 여전한 작법
“모두가 한곳에 모이게 된다. 최후의 샘플을 차지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진다.” -디즈니+ <폭군> 4화 소개글
상술한 시놉시스처럼 <폭군>의 얼개도 전작들과 비슷하다. 흩어져 있던 모두가 결국 모여 싸운다. 지나치게 간단하다. 다만 그 과정은 이상할 정도로 불친절하다. 1화는 최 국장이 모종의 인물과 비밀스러운 정보(뉴스)를 주고받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이 정보가 무엇인지, 최 국장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이어지는 시퀀스는 자경이 죽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연모용을 만나 폭군 프로그램 샘플의 강탈을 사주받는 일이다.
그 이후엔 폭군 프로그램이 구심력으로 작동하여 그 궤도를 한국 정보 요원 최국장(김선호), 전문 청부업자 임상, 해외 정보 요원 폴(김강우), 정부의 프락치 연모용(무진성) 등이 이리저리 각자의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각 주·조연의 이야기가 미세한 접점만으로 교차하며 움직이는데, 그들의 움직임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처럼 인물들이 닿을 듯 말 듯한 간지러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각 인물이 지닌 강한 캐릭터로 인해 그저 다른 세계의 다른 개체들이 따로 움직인다는 인상을 자아 낼 법하다.
심지어 <폭군>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는 자경과 폭군 프로그램의 핵심 관계자 최국장은 마지막 화의 중간쯤을 넘어서야 만나게 되고 이때조차 자경은 최국장의 정체를 제대로 모른다. 얼핏 들으면 <마녀2>의 경우처럼 <폭군>도 모든 톱니바퀴가 제대로 맞물리지 않는 허술한 클라이맥스를 맞이했을 성싶지만, <폭군>의 4화가 보여준 전반적인 감정의 갈무리와 최국장의 최후 선택은 이야기의 헐거움이나 이질 감 없이 매끄럽게 수용된다. 폭군 프로그램으로 초인이 된 여러 인물이 모두 모여 천하제일무술대회처럼 각자의 힘을 펼치는 이 폐쇄된 무대에서 자경은 아버지의 복수를, 최국장은 국가의 대의를, 폴은 출세의 욕구를, 임상은 일상에의 욕망을 모두 해소하는(혹은 해소에 실패하는) 데에 이르고 <폭군>은 다면적이되 명확한 비극의 카타르시스 발현을 성취한다.
에피소드란 틀의 힘
왜일까. 왜 <마녀2> 같은 작품은 못 했고 <폭군>은 해낸 것일까. <폭군>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각 인물의 사연과 동선을 세부적으로 따지며 이야기의 연결감을 하나하나 따지려는 시도는 무용하다. 이야기란 결국 전체의 형식에 갇힐 수밖에 없고, 이 글의 중핵은 시리즈물이란 형태의 고유한 형식미가 박훈정이 원래 해오던 이야기를 적절히 품었단 논지를 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폭군>이 <마 녀2>와 비슷한 논조를 띄고 있음에도 더 좋은 결과로 갈무리된 이유는 거의 명백히 하나, 이 작품이 4부작 OTT 시리즈로 공개됐다는, 그리고 그 4부작의 사이사이에 에피소드 간의 막간이란 물리적인 틈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폭군>이 취한 네 에피소드 간의 틈은 각 에피소드의 독자성을 키우고 그것이 오롯이 자립하여도 여느 위화감 없도록 구현해 낸다. 영화 관객보다 시리즈 시청자의 인내심은 능동적이고, 집중력은 선택적이다. 각각 40분 내외의 의지만 발휘할 수 있다면 1화부터 4화의 에피소드까지 지그시 관조하며 이야기의 전체 판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 인물들 사이의 무리한 간격이나 갑작스러운 만남까지를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오프닝, 엔딩 건너뛰기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실제 몇 분의 시간이 주어지느냐가 중점은 아니다. 시청자가 인지할 만한 시지각적 ‘막간’이 주어지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이미 한 편의 전체로 완성된 영화 매체와 달리 시리즈물의 에피소드라는 틀은 그것을 가능케 한다.
<폭군>의 인물 관계도 사이에 섞인 에피소드의 틈은 그렇게 여러 개체를 적절한 중력으로 이끌며 작품을 하나의 적절한 군체로 만든다. 1화와 2화, 3화와 4화라는 독립적 에피소드의 존재란 언뜻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를 단절시키는 듯 보이지만, <폭군>에선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 사이의 틈을 틈 그 자체로 적절히 물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 틈에선 시청자의 물리적·정신적 휴지기와 상상의 여지, 그리고 각 캐릭터의 사연에 몰두할 공백이 생겨난다. <폭군>의 인물들이 제아무리 따로 놀며 적절한 예고편 없이 갑자기 함께 만나더라도 각 에피소드엔 독립적이면서도 함께하는, 모순적인 공존의 끈끈함이 부여된다. 재차 빗대자면 풋내나는 밀가루 반죽이 점도 있게 발효될 시간이 생겨난다. 이는 영화 매체에서 드러났던 박훈정의 약점을 지운다.
극에 안착한 극작가
박훈정 감독은 원체 이야기의 플롯을 유려히 접합하기보단 그들이 최종적으로 향할 드라마의 종착지로 나아가는 데에 집중하는 이다. 흔히 박훈정의 영화를 장르물이라고 눙치며 말하지만, 엄밀히 정의할 때 그의 작품은 언제나 연극적이자 드라마적인 요소로 가득한 문자 그대로의 드라마 장르였다. 단순화할 때 연극적이고 드라마적인 요소의 중핵이란 ‘집합’의 시도와 가부다. 고전적인 연극의 드라마에서 감정의 고조와 낙차는 필연적이며 이를 위해 인물은 사랑, 복수 등 어떠한 특정적 정동에 의해 움직인다. (혹은 움직여진다) 그리고 이 정동은 인물과 다른 인물들과의 운명적 만남을 필수적으로 수반하여 결국 한 공간 내 인물들의 집합과 모든 감정이 해소되는 카타르시스의 합목적적 결말로 나아가야 한다. 즉 박훈정 감독은 어떠한 이야기를 프레임 바깥으로 꺼내며 인물들의 물리적인 접촉과 충돌 지속적이고 묘하게 일으키는 영화적 방식보단 이야기를 집합적 무대 안에서 끝내버리거나 아예 작품 바깥으로 꺼내 연결하고 반복하는 연극적 작법에 훨씬 익숙한 태도를 보여 왔다. 프레임의 발산보단 수렴으로, 확산보단 응축으로 온 인물을 하나의 공간으로 불러 모아 드라마의 감정을 종결하는 일에 집중하는 극작가에 꾸준히 가까웠던 셈이다. 하지만 <마녀> 연작 등이 ‘결’의 단계로 가기까지에 영화 관객의 인내심이란 무척 약하고 차가우며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박훈정 감독이 어느샌가 영화란 틀에 점차 갇히게 됐으며, 지금의 그에게 맞는 옷은 시리즈 형태라고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하여 시리즈로 돌아온 <폭군>의 박훈정은 무엇 하나도 포기하지 않는다. 세 개의 인격 중 어느 하나 포기하지 않고 공존하길 택한 자경의 선택처럼 자신이 꿈꾸는 장르와 매체, 그리고 어쩌다가 마주하게 된 매체의 형식을 전부 끌어안는 욕심을 보여준다. <폭군>의 마지막에서 심해에 떨어진 임상을 자경이 구하는 에필로그는 박훈정이 그간 계속해서 시도했던 작품의 작품 바깥 연결, 즉 한 세계관의 프랜차이즈화 욕망을 재연한다. ‘이 사람 정말 어느 하나 포기하지 않는구나’란 실소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니 박훈정이 그간의 영화에서 보여준 일련의 부진은 어쩌면 OTT의 시리즈의 구축에 도움이 될 하나의 반면교사적 답안지인 동시에, 영화와 달리 시리즈의 구성이란 어떻게 되어야 좋은 것인지를 되돌아보기 위한 필연적 시행착오였다고 <폭군>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