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두 얼굴

See

애플티비의 <씨 : 어둠의 나날>(이하 ‘어둠의 나날’)은 인간의 시각 능력이 소멸해버린 세계를 재현한다. 갑자기 모든 인류가 바이러스에 걸려 시력을 잃고, 오랜 시간이 지나 시력 자체가 그저 미신이 되어버린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시각의 부재로 인해 화려한 기술문명을 이룬 인류는 사라지고, 미신과 야만이 지배하는 원시적 문화가 만개한다.

이 시리즈의 핵심은 원시적 문화를 배경으로 시각적 무능력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스펙타클과 서스펜스다. 서로 가까이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상황, 자기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처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력에 만족감을 느낀다. 이 작품은 그것으로부터 우리에게 이중적 만족을 제공한다. 신적인 구경꾼으로서의 위치와 더불어, 시력을 가진 자의 우월함까지 더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지점은 다른 곳에 있다. 이 작품의 과제는 ‘시력을 잃었어도 오랫동안 (비록 야만적이긴 하지만) 문명을 지속했다’는 점을 설득하는 일이었을테다. 그것을 위해 이 작품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람들의 몸짓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주변 상황을 서로 공유하며 소통하고, 물건을 만들고, 건물을 짓고, 정치 제도까지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신체의 물리적 움직임을 더 특별하게 활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시력뿐 아니라, 사람의 몸짓이 만들어내는 문명의 흔적들을 도리어 발견한다.

그러한 몸짓들 중에서도 제이슨 모모아의 몸짓은 유독 눈길을 사로 잡는다. 여기서 모모아는 ‘야만인’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캐릭터명도 야만인이란 뜻의 바라리안barbarian을 연상케 하는 ‘바바 보스’다. 사실 제이슨 모모아는 이 작품에서만 야만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왕좌의 게임>에서 그 세계의 외딴 야만족 칼 드로고를 연기했으며, <아쿠아맨>의 아쿠아맨으로서 ‘이방인스러운 몸’이라는 커리어를 쌓고 있다. 하와이 출신 사모아족 아버지와 독일-아일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모모아’라는 신대륙 원주민스러운 성을 가진 제이슨 모모아는, 완전히 원주민스럽지도, 완전히 코카시안스럽지도 않은 외모로 주류 매체 기획자와 향유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야만’을 신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배우다. 그래서 그가 없었다면 대체 누가 바바 보스를 연기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둠의 나날>과 바바 보스라는 캐릭터는 모모아에게는 딱 맞는 옷처럼 여겨진다.

그런 모모아를 통해 이 작품은 ‘야만의 몸짓’을 기획한다. 이 세계 내부에서 바바 보스는 그 누구보다 강한 전사이자 리더인 동시에, 지독하게 야만적이다. 그가 적대자들을 처단하는 방식은 (환상적으로 투사된) 유럽 중세 기사의 우아한 몸짓도 아니고 동양 무사의 날쌘 맵시도 아니다. 그는 마치 오랑우탄처럼 무릎을 굽혀 상체를 낮추고, 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무기로 길을 더듬으며 어기적대듯 움직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누구보다 강하고 빠르다. 둔탁해 보이지만 신속하고, 우둔해 보이지만 판단이 빠르며, 엄청난 맨몸 격투 실력과 괴력마저 자랑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그가 너무도 잔혹무도하다는 사실이다. 그는 한번 베어 쓰러뜨릴 수 있을 만한 상대도 기어코 아주 작살을 낸다. 목을 베는 것을 넘어서 아예 도려내고, 배를 찌르는 것을 넘어서 내장을 갈기갈기 찢는다.

<어둠의 나날들>의 재미난 점은 그렇게도 무자비한 인물의 잔혹한 행동이 충분히 용인될 만한 것처럼 여기게 한다는 것, 그러한 용인을 넘어 매력적으로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물의 시각이 무능력하다는 사실과 깊이 관련된다. 바바 보스가 그렇게 능숙한 전사로 자리한 것은 시각적 무능력을 청각적 초-능력으로 대체한 것 같기 때문이며, 바바 보스가 그토록 잔인하게 적대자를 도륙하는 까닭은 그가 적대자의 상태를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그점을 인지하며 가혹한 폭력을 허락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시즌 3까지 갈 수 있었을까? 잔혹한 액션도 반복되면 질리기 마련이다. 그런 탓인지 <어둠의 나날들>은 또 다른 야만적 형상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바로 신앙적 태도라는 형상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세계를 ‘볼 수 없는 것들’로 여길 수밖에 없게 한다. 그리고 ‘볼 수 없는 것’은 신의 존재와 연관짓게 한다. 시력이 있는 인간에게도 신은 볼 수 없는 존재, 인간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존재이지 않는가. 그래서 이 세계 속 인간들은 맹인인 자신들이 이해하기 힘든 것, 혹은 만들어내기 힘들다고 판단되는 것에 신의 역량을 부여한다.

그렇게 상상되는 신의 역량은 그것을 대리하는 전제군주를 통해 재현되거나 전유된다. 바바 보스 이외에 이 작품을 끌어 가는 핵심 축이 있다면, 단연코 케인 여왕이다. 그녀는 관객에게는 죽이고 싶을 만큼 밉고 혐오스러운 악한이며, 단순한 폭군인 것만이 아니라 일종의 제사장과도 같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 작품에서 야만의 또 다른 극단적 축이라는 역할을 담당한다. 바바 보스와 케인 여왕은 <어둠의 나날들>에서 가장 초인간적인 잔혹함과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로 꼽힌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바바 보스가 전통적인 야만성, 즉, 동물과 같은 야만성을 보인다면, 케인 여왕은 제도가 부여한 권력을 아무렇지 않게 야만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제도를 사용해 그 야만성을 가린다. 바바 보스가 탈-제도적 생존술을 쓴다면, 케인 여왕은 친-제도적 기만술을 앞세운다. 몸짓도 전혀 다르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바 보스는 마치 유인원처럼 어기적대며 걷는 것에 반해, 케인 여왕은 꼿꼿이 선채로 제도가 허락한 우아한 몸짓을 드러낸다.

이렇게 <어둠의 나날들>은 야만의 양대 축을 통해, 우리에게 야만과 비-야만의 위태로운 동거를 목격하고 긴장을 느끼도록 한다. 그리고 그 목격은 철저히 물리적 몸짓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 바바 보스가 어기적대면서도 민첩한 동작으로 조용히 적에게 다가가 목숨을 끊는 인물이라면, 케인 여왕은 제 손을 우아하게 들어 요란하게 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재현하는 인물이다. 이런 방식으로 물리적 몸짓의 중대함을 오락적 요소 내부에 통합하는 것이 <어둠의 나날들>의 가장 큰 매력이다.

복사되었습니다!